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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주 선생님]이 계셨던 유치원

7살. 7반. 내 인생의 첫 번째 기억, 댓가 없는 사랑의 얼굴

by GOLDRAGON

내 인생의 첫 번째 기억, 댓가 없는 사랑의 얼굴

나는 서울 마포 태생이다.
고향은 서울.

아버지는 오랜 시간 제약회사 영업사원으로 일하셨다.
내가 여섯 살, 유치원생이던 해 아버지의 전북 전주 발령으로 가족 모두가 전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약 2년을 살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 시절의 기억은 놀라울 만큼 선명하다.
살던 집, 집 근처의 재래시장, 구멍가게, 양장점...
심지어 유치원과 선생님들까지 또렷이 떠오른다.

성함은 기억나지 않지만,
'주 선생님'이라 불리던 분이 기억 속에 각인되어있다.
성이 주 씨였던 그분은 나를 유독 예뻐해 주셨다.
각인된 이유야 당연하겠지, 예뻐해 주셨으니까.

그때의 내 기억 속에서,
그분은 엄마보다 더 나를 아껴주셨던 것 같다.

지금은 세월을 얼굴에 정면으로 맞아
그저 배불뚝이 아저씨가 되었지만,
사진 속 어린 나는 꽤나 예뻤다.

앨범을 보면 유치원 사진 대부분에
'주 선생님'이 나를 안고 있는 모습이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분은 정말 나를 많이 아껴주셨던 게 분명하다.


유치원 앞마당의 그네


어느 날, 유치원 앞마당에서 자유놀이 시간이 있었다.
나는 그네를 똑바로 앉지 않고,
무릎을 모두 세워 올린 채 탔다.
그 자세면 체중을 실을 수 있어 더 높이 올라갈 수 있었다.

사진 속의 내가 바로 그렇게 타고 있었다.
'잘 못 타는 아이의 자세'였다.

그네를 멈추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나보다도 어린 꼬마 하나가
아장아장 그네 앞으로 걸어오는 걸 봤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어떡하지?"
그네를 멈출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나는 그네를 타는 게 아니라
그저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충돌은 불 보듯 뻔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눈앞에는 유혈 낭자한 현장이 펼쳐져 있었다.

놀랐고,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주 선생님'이었다.

그분은 다친 아이가 아니라
먼저 나를 그네에서 내려 안아주셨다.
그 순간, 세상이 멈춘 듯했다.
선생님의 품에서 나는 떨리는 숨을 몰아쉬었다.
따뜻했다.
그 온기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쓰러진 아이는 성이 '문'씨셨던 다른 선생님이 안아 들었고,
뒤이어 원장님이 달려 나오셨다.
그제야 알았다.
그 아이가 유치원 건물주의 손자였다는 것을.


그 사건 이후 한동안,
나는 '주 선생님'을 빼고
원장님과 '문 선생님'의 눈치를 보며 등원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날의 장면은 아직도 선명하다.
그만큼 강렬한 기억이었으리라.

그리고 지금까지도
전주시 태평동의 '중앙유치원'이 뚜렷하게 기억나는 이유는
아마 그곳에 '주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가 다시 본사로 발령이 나면서
우리는 서울로 돌아왔다.
그날, 전주 고속버스터미널까지
'주 선생님'이 홀로 나와 배웅해 주셨다.

가족도 아닌, 아무런 댓가도 없는 그 따뜻한 마음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내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다.

요즘 들어 문득,
그분이 너무도 그립다.
아무런 조건 없이 나를 안아주셨던,
그 시절의 주 선생님이.

"감사합니다. 선생님."


댓가 없는 사랑에 대하여

살아보니,
세상에 댓가 없고 이유 없는 호의와 사랑은 거의 없다.

하지만 누구나 한때는
그런 '조건 없는 사랑'을 한 번쯤 받아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작은 기억 하나로
우리는 마음 한켠을 따뜻하게 적시며 살아간다.

그래서인지,
어른이 된 지금도 이유 없이 따뜻한 사람을 보면
문득 그 시절의 주 선생님이 떠오른다.
그때처럼 나도 누군가를
그저 안아줄 수 있는 어른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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