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살. 1학년1반.니들이 배고픔과 서러움을 알어?
나는 1남 2녀 중 막내이다.
그로 인해 부모님으로부터 누나들에 비하여 아주 조금(정말 아주 조금으로 기억한다.) 귀한 대접을 받았던 것 같다.
누나들은 지금까지도 "넌 늘 특별했지"라고 한다. 정작 그런 나는 부모님께 지금껏 변변한 효도라는 걸 한번 못해보았으니 나를 지금쯤은 원망하고 계실는지도...
그로 인해 나는 그 시절엔 추첨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 사립초등학교를 가게 되었으며 그 당시에는(87년도) 전무하던 급식이란 것을 일찍 경험했었다.
누나들은 도시락을 바리바리 챙기던 때 나는 그저 포크 달린 수저하나만 가방에 넣고 가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시간이었다.
4교시 끝 나갈 즈음 떠들거나 졸은 아이들을 교실뒤쪽으로 나가서 세워놓으시는 벌을 주시던 담임선생님이 계셨다.
내 기억으로는 정작 말을 걸었던 친구는 걸리지 않고 조금 억울하게 나 혼자 떠든 사람으로 분류되어 홀로 뒤쪽으로 나가있게 되었다. 어느덧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리고 모두가 기다리는 점심시간.
급식차가 교실뒤쪽으로 들어오고 선생님을 필두로 1 분단부터 차례로 식판을 들고 배식을 받기 시작했다. 그렇게 차례로 4 분단까지 모두 배식을 받고 시작된 식사. 하지만 난 홀로 뒤에 서서 친구들의 밥 먹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선생님께서 서있는 벌을 멈추어 주시지 않은 관계로 그 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친구들의 안쓰럽고 애틋하게 쳐다보던 눈이 아직도 선명히 기억난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식판들은 퇴식구로 쌓여가고 급식차는 정리되어져 복도로 나가지고 있었다.
슬프지도 억울하지도 않았다.
그저 배가 고팠다.
식사를 마치신 선생님의 시야에 비로소 내가 눈에 들어온 건 주린배를 부여잡고 있을 때쯤이었다.
그 시절 담임선생님은 눈이 크지 않고 무척 작은 새우눈이셨던 걸로 기억한다.
순간 선생님의 눈이 비현실적으로 그렇게 크게 떠질 수 있었나 싶었다. 동그랗게 눈을 치켜뜨신 후 내 이름을 크게 부르시며 달려오셨다.
왜 아직까지도 거기 서있느냐면서... 두 손을 잡고 부둥켜안아주셨을 때에야 비로소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선생님이 알아채준 그제야 복받쳤던 서러움이 몰려온 것이다.
나의 학창 시절 중 통틀어서 그렇게까지 목청껏 크고 서럽게 운 적이 그날 이후 없었다.
"아이고. 내가 깜빡 잊고 있었네... 그냥 줄 서서 밥을 먹었어야지... 미안하다 미안해."
한바탕 서럽게 울고 난 후 선생님은 날 지하매점으로 데리고 가셨다.(그 시절 흔치 않게 매점도 있었던 초등학교였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 형편인지라 당연히 용돈 같은 것은 없었다.
그래서 매점을 단 한 번도 이용해 본 적은 없었다. 잘 사는 집 친구들만 가끔씩 가던 곳으로 기억한다. 그곳에는 각종 문구류와 먹거리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난 항상 소보루빵이 너무도 먹고 싶었다.
선생님께서는 늘 구경만 하던 그 소보루빵과 흰 우유를 사주셨다. "어서 이거라도 먹거라"
급식보다는 훨씬 초라했다. 그런데 맛있었다. 분명히 아직까지도 내 기억 속엔 어떤 빵보다도 너무 맛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선생님께서는 앞에 앉으셔서 물끄러미 나의 먹는 모습을 지켜보시며 다시 한번 미안하다고 나지막이 말씀하셨다. 더불어 부모님께는 말씀드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셨다.
나 역시 어린 나이였지만 말씀 안 드리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부모님께서 아시면 갠스리 마음 아파하실 것만 같았다.
그렇게 그날의 서러움은 살면서 평생 잊지 못할 소보루빵의 기억을 내게 심어주었다.
내가 지금껏 살면서 그 당시 먹었던 소보루빵, 일명 곰보빵보다 맛있는 빵은 먹어본 적이 없다고 감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눈물 젖은 빵이야말로 바로 이런 것이었으랴...
이제서야 그때를 추억하며 마음속으로 외쳐본다.
"이현창 선생님. 저는 괜찮았어요. 제가 너무나 먹고 싶어 한 소보루빵을 사주셔서 먹을 수 있었으니까요." 매일 먹는 급식보다 더 특별했으니까...
*항상 서럽기만 한 건 아니야.
서러움과 슬픔과 아픔을 인내한 뒤에는 내가 간절히 원하고 꿈꾸었던 일들이 이루어져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