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아빠 밑에서 눈물 콧물 흘리며 페더러 되기

유구한 테니스의 시작

by 팜팜


테니스를 시작한 지 어엿 5년 차 어디 가면 "젊은 아가씨가 좀 치네"라는 말을 듣는 중수 정도로 볼 수 있다. 2025년에는 대학 학부시절 내내 동고동락한 테니스 동아리 동기, 언니들과 전국 대학동아리 테니스 대회에 출전에 준우승까지 할 때는 눈물이 줄줄 흘렀다.


[테니스 역사의 시작]

내 테니스의 역사는 2020년도 겨울에 시작됐다. 우리 아빠의 가장 친한 친구들은 대학 테니스 동아리 사람들이다. 내가 아주 어릴 때는 아빠가 바빠서 잘 나가지 못했다고 전해 들었지만, 내가 기억이 생기고 나서는 매년 2번 정도는 웅비테니스 클럽이라는 경일대학교 테니스 동아리의 유산 즉, 친한 기수들끼리 모여 만들어진 모임의 총회다. 어느 해에는 다른 가족들과 다 같이 밥을 먹기도 하고, 다른 해에는 바다에 다 같이 놀러 가기도 해던 기억이다. 돌이켜 보면 아빠는 날씨가 좋은 봄가을 주말에 친할머니 댁에 가는 일이 아니면 테니스 대회에 나갔다. 사업이 힘들 때도 아빠의 오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새벽에 꼭 테니스 레슨을 받았다. 집 현관에는 항상 테니스 라켓과 신발이 있었고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

image.png 아빠의 대학시절 준우승 트로피

어릴 적부터 허약했던 나는 대학 입학 전까지는 운동을 크게 해 본 적이 없었다. 학교에서 항상 건강검진을 하면 저체중이었고 고등학교에서도 150 후반의 키에 41kg가 나가며 허약함을 줄곧 유지했다. 가끔 방학 때나 시간이 있을 때 엄마가 내가 죽을까 봐 아파트에서 하는 요가에 데리고 가기도 하고, 방학에는 요가를 주로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근력, 힘과는 거리가 멀었다.

카이스트에 다니는 공대생이 말하기에는 웃길 수 있지만 그럼에도 한의학을 신봉하는 나는 나를 진정한 소음인으로 인정한다. 한 달에 적어도 3번 이상은 체하고, 수박이나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2개 이상 먹으면 바로 화장실로 달려가야 했고, 성골 허약체질이었다. 운동을 아주 많이 해서 건강을 찾은 지금도 이주에 한 번은 무조건적으로 체하고,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먹은 날이면 어김없이 또 체하는 기적의 위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아빠는 본인이 좋아하는 운동인 테니스를 나에게 권한 적이 없다. 엄마도 테니스 레슨을 아득바득 독기를 품으며 2년 동안 했지만 내 허약 체질의 모체인 나의 어머니답게 결국 어깨 부상으로 엄마의 테니스 인생은 막을 내리고 만다. 아빠는 내가 본인과 같은 불같은 성향인 걸 알아서 어떤 일에 빠지면 모든 걸 다 바쳐버릴까 봐 시키지 않았는지 학생은 공부에 집중해야 된다고 생각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매사에 내가 아빠한테 매달리면 그제야 허락을 해줬다. 테니스도 그중 하나로 조기입학으로 18살에 카이스트 합격이 결정되고 나서 치고 싶다고 치고 싶다고 대학교에 들어가서 테니스 동아리에 들어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서 겨우 레슨을 시켜줬다. 그마저도 "몸이 그래 히바리가 없어서 라켓이나 들겠나"라는 말을 들어가며 시작했다.

내가 테니스를 치고 싶다 마음먹은 것은 바로 아빠를 이기고 싶다는 마음 그거 하나였다. 경상도 고유의 따뜻한 말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하고 자존심이 말도 못 하게 센 부녀였던 우리는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싸웠다. 딸 때문에 아빠가 가출한다, 아빠 때문에 딸이 가출하겠다를 번갈아가면서 해댔다. 아빠는 본인과 닮은 딸의 성격이 걱정스러우면서도 말을 뭐 저렇게 밉게 하냐 싶었고, 딸은 사과 한마디 안 하는 아빠가 미웠다. 사춘기 때부터 아빠와의 전쟁은 시작이었고 죽이 잘 맞는 몇 순간도 있었지만 정말 서로 톰과 제리처럼 싸웠다. 청소년기에는 아빠의 권위에 깔려있던 나였지만 18세 겨울의 나는 19살이 곧 되고 대학에 입학할 그 순간을 생각하면서 아빠를 이겨먹겠다는 생각을 시작한다. 그 마음으로 41kg의 종이인형의 몸으로 테니스를 시작했다.

그때 영상을 지금 내가 보면 처참하다. 운동신경이 좋은 아빠를 닮지 못해 휘적휘적 테니스 공으로 뛰어가는 나... 힘이 없어 공을 네트 반대편으로 넘기지를 못하는 나였다. 테니스는 얼핏 보면 팔운동 같지만 사실은 코어 하체 힘으로 탄력적으로 전신의 힘을 활용해야 하는 운동이다. 근력이라고는 없던 나에게 테니스 공은 너무 빠르고 강력했다. 아빠가 칠 때는 잘만 나가던 공이 내가 치기만 하면 땅으로 처박혔다. 그렇게 아빠를 이기겠다는 마음만은 창대했지만 실상은 곧 테니스를 포기할 것 같은 테린이 1 이였다.

하지만 경상도 부녀의 자존심 싸움에서 질 수는 없었기에 한겨울에도 벌벌 떨면서 테니스장까지 4km를 걸어 레슨을 받으러 갔다. 가끔 아빠랑 같이 테니스 장에 가게 되면 아빠는 아직 공 주고받기를 하지도 못하는 나를 보면서

1. 어후 저래가지고 뭔 공을 치겠다고

2. 저래 발이 느려가 공은 따라가겠나

3. 와 이걸 못하노?

이 3개를 반복해서 시전 했다. 그럴수록 더 악에 받쳐서 이를 꼭 깨물고 테니스를 쳤다. 실제로 나는 아직도 테니스를 칠 때 입술을 앙다물고 테니스를 친다.

그런 아빠의 말이 자극이 되긴 했는지, 두 달 동안 레슨을 받고, 나는 KAIST 테니스 동아리 stroke에 들어가게 된다. 경쟁률이 높은 동아리였지만 그래도 나는 라켓을 들고 포핸드 백핸드 흉내를 낼 수 있어서였는지, 대학교 테니스 동아리를 한 아빠의 사연을 기가 막히게 지원서에 적어서 내서 인지 어쨌든 합격했다. 그 뒤로 진정한 내 테니스 인생이 펼쳐졌다. 새내기 시절 노는 시간 빼고 다 테니스를 쳤다. 수업이 끝나면 끝나는 대로 테니스를 치러 갔고, 아침이면 동아리 아침훈련을 나갔고 (가끔 훈련부장이 술 먹고 훈련에 늦을 수는 없으니 테니스장에서 자는 것도 관찰할 수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4시부터 또 오후 훈련을 나갔고 그렇게 훈련이 끝나면 같이 저녁을 먹고 또 테니스를 쳤다.


[테니스를 위해서라면 가자미처럼 아빠에게 납작업드릴 수 있지]

솔직히 고등학교 때까지도 아빠와 사이가 그렇게 좋지 않았다. 내가 아빠에게 모질게 말하고 아빠도 한소리를 하고의 반복이었다. 처음 레슨을 받은 2020 겨울에도 아빠가 테니스를 치긴 하지만 내가 언젠가 이 길거고 아빠에게 맞서지 않을 이유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동아리 활동을 한 학기 하면서 아빠와 나의 실력차이는 아빠가 호호 할아버지가 돼서 기력이 다 쇠하는 경우가 아니고는 줄여지지 않는구나 그때도 심지어 내가 질 수도 있겠다는 현실을 깨닫게 했다. 또 아빠가 동아리에서 내가 더 테니스를 잘 치는 인재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키워줄 구세주처럼 보였다. 나름 어느 정도 늘었다고 생각했던 오만한 나는 2021년 맞이한 첫여름방학에 대구에서 아빠와 특훈을 하게 되었다. 이때 일주일에 한 번은 테니스 친다고 아빠랑 싸웠던 것 같다. 저녁에 아빠가 퇴근하고 집에 오면 나는 테니스 갈 옷을 입고 아빠를 기다리고 있는다. 그러고 학교에 있는 동생을 빼고 셋이서 저녁을 먹고 아빠와 테니스에 간다. 아빠와 공을 주고받는 랠리를 한다. 아빠가 말도 안 되게 어려운 걸 (그때 내 실력으로는 정말 어려웠다...) 시킨다. 목에서 피맛이 날 때까지 사방팔방 뛰어다닌다. 그래도 아빠는

1. 안 뛰나!!!

2. 그래 게으르게 공칠 것 같으면 때리치아라

3. 발이 그래 느려가 공치겠나

를 시전한다.

그러면 어느 순간 아빠 테니스 클럽 사람들이 고마해라라고 하고 나는 테니스 코트를 나오면서 코트장 문을 닫고 분해하거나 심한 날에는 눈물을 흘리며 집에 왔다.

아직도 친절하게 말은 안해주는 아빠

여기서 웃긴 점은 내가 테니스를 인생에서 제대로 한 첫 운동이라 첫사랑처럼 사랑했는지, 그러면서 계속 그다음 날도 갔다. 또 싸우고 또 갔다. 아빠도 그렇게 테니스 장에서 소리를 지르면서 공을 대줬다. 쇼맨십이 어느 정도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어이고 장사장 딸이랑 그렇게 테니스 치면 좋겠어~, 장사장 선수 한 명 키우는 구만이라는 말이라도 듣는 날에는 아빠 기분이 좋아져서 더 힘든 특훈이 시작됐다. 포핸드 백핸드를 이제 겨우 치는 테린이에게 전후좌우로 공을 주고 자기 장기인 슬라이스를 마구 뿌려대는 아빠의 훈련은 운동복을 다 땀으로 적셔서 다 끝나면 옷이 더 이상 땀을 흡수 못해 땀이 다리로 흘렀다. 겨울까지만 해도 아빠가 저렇게 말하는 게 너무 미웠는데, 여름에는 미워도 계속 붙어 있다 보니 알게 됐다. 좋아서 저렇게 말하는 거구나.정말 반어법을 제대로 쓰는 사람이구나. 아빠의 애정 표현은 저거였구나.

그러다 보니 테니스 코트 밖에서도 아빠 말의 의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없 환경에서 자라, 따뜻한 말을 배우지 못했을 뿐이라는 걸.. 심지어는 아빠가 그날 기분 나쁜 말을 해도 테니스를 치면 만사형통으로 다 풀리는 지경에 이르렀고, 테니스 신발과 라켓을 새로 사준 이후에는 아빠에게 가자미처럼 엎드려 지냈다. 테니스 4대 그랜드 슬램인 USopen 까지 아빠와 밤마다 같이 보니 어느새 앙숙인 두 부녀는 계속 테니스 이야기를 하면서 붙어 지냈다. 엄마가 "기도 안 찬다 그래 아빠가 싫다더니"라고 말하면서 웃을 정도로 테니스는 내가 아빠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줬다. 테니스는 그렇게, 서로 자존심 때문에 좁히지 못했던 부녀 사이의 거리를 공 하나도 안될 정도로 줄여줬다.


[내가 페더러 한 명 키운 거 아니오~]

이제 구력이 5년이 되어가는 지금, 아빠는 웅비테니스클럽 월례회에 나를 부른다. 나는 연구실에 있다가 아빠가 몇 월 며칠 웅비 월례회다.라는 전화를 들으면 네 히~ 하고 캘린더에 저장해 놓고 그날이 되면 테니스 가방을 메고 대구로 내려간다. 그러면 아빠는 어이고 니는 학교에서 공부는 안 하고 볼만 치나 한소리를 하다가도 다른 아저씨들 앞에서 일부러 딸에게 공을 세게 준다.(세게 공을 주고 세게 말을 해도 지지 않는 테니스를 잘 치는 딸내미를 보여주고 싶은 모양) 그 쇼맨십까지 닮은 나는 더 기세등등해져서 뛰어다닌다. 아빠가 나에게 죽어라고 포핸드를 때리면 죽어라 할딱할딱 뛰어가서 또 받는다. 그래도 절대 칭찬은 없다. 느리다. 더 빨리. 안되잖아~ 의 반복을 듣고 또 속상해지지만 뒤에서 아저씨들이 딸내미 자세가 기가 막히네라는 말에 아빠는 "내가 페더러 한 명 키운 거 아니오~" 라고 말하는 걸 들으면 또 나는 기분이 풀려 빙그레 웃으며 아빠 공 쳐줘라고 말하며 아빠에게 쪼르르 달려간다.


테니스를 치고 집에 오는 길에 아빠는 말한다. "이래 공쳐주는 사람이 어디 있니 아빠밖에 읎제?" 그러면 나는 말한다"이래 잘 따라주는 딸이 어딨니, 다른 아저씨들 배 아플 걸~" 서로 지면 죽는 부녀지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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