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지트, 너의 이야기>
파리 외곽의 작은 게스트하우스.
지친 날 저녁, 호스트의 실수로 갑자기 방이 변경되었다는 통보를 들었어요.
아휴, 짧은 숨을 내뱉고 헤집어진 짐을 다시 모아 영차, 좁은 계단을 올라갑니다. 좁디좁은 파리의 계단.
누가 누굴 끄는 건지.. 헷갈릴 때 즈음 도착한 4층 작은 2인실.
2인실? 하… 도미토리에서는 조용히 잠만 자면 되지만,
2인실에서는 뭔가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고… 이상한 사람 걸리면 더 피곤한데…
걱정과 긴장의 호흡을 안고 들어간 방 안에는 차가운 공기만 돌았어요.
김이 빠진 채 캐리어를 넣는 순간, 훈훈한 라디에이터 공기와 함께 발견된 쪽지와 과일.
‘옆에 묵고 있는 사람(?)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과일이 참 맛있네요 - 란경’
유럽 여행 3주 차, 한국의 온기가 그리워지는 시점에 만난 정.
란경의 말대로 파리의 자두는 정말 달았습니다.
그날 밤부터 시작된 우리의 대화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란경과 파리 보쥬 광장에 누워 와인과 크루아상을 놓고 하루 종일 사랑과 자유에 대해 이야기하던 날,
나지트의 초석을 발견했죠.
란경은 저와 아주 다른 분야의 사람이지만,
철학과 예술을, 본인의 삶을 사랑한다는 점에서 가장 깊게 연결되어 있어요.
외곽의 게스트하우스, 호스트의 실수, 란경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저도 없었겠죠.
란경에게 배운 가장 큰 일은,
내가 우연히 만난 한 사람이 나에게 큰 스승이 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손님들에게 귀를 기울여요.
때마침 스승의 날이네요.
오래전 선생님도 좋지만, 내 옆에 나를 변화시키는 사람들에게
고마움의 인사를 보내보면 어떨까요?
나지트 드림.
안녕! 나는 인생을 모험하듯 살아가는 란경이라고 해. 지금은 코리빙(공유주거) 브랜드인 ‘맹그로브’의 전략팀에서 일하고 있어. 맹그로브에서는 호텔처럼 짧게 숙박할 수도 있고, 오랜 시간 거주할 수도 있거든. 나는 그 둘 중에서도 숙박 쪽에 좀 더 집중한 Revenue Management를 담당하고 있어!
지금은 이런 일을 하지만 이전에는 PO, 마케터, 사업개발 등 정말 많은 일을 했었어. 일터 밖에서는 글을 쓰고 만화를 그리기도 하고, 해커톤을 열거나 창업에 도전하기도 했지. 인생을 모험가처럼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나를 잘 표현해주는 단어인 것 같아.
여태껏 나는 ‘어떻게 하면 나의 스타트업을 창업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커리어 선택을 해왔었어. 필요한 스킬들을 배우고, 대표로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나의 스타트업은 어때야하는 가를 떠올려보면서 회사를 다닌 거지.
그러다가 어느 날 스타트업 창업이 나에게 잘 맞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 나의 커리어 전반을 재정의해야만 했지. 그때 나에게 중요한 것을 혼자서 나열해보았거든. 그 전까지는 어플리케이션 기반으로 사업을 해내는 회사에 계속 있었는데, 사실은 손에 만져지는 것에 대한 동경이 있었던 거야 나한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 피부로 느껴지는 것, 이런 것들에 대한 동경을 늘 가지고 있었어. 특히나 공간/커뮤니티에 대한 애정이 깊어서 코리빙 브랜드인 맹그로브의 문을 두드리게 된거야.
객실의 가격에 관한 전략을 짜고 판매하는 일을 하다보니, 무엇이 좋은 숙소이고 편안한 공간인가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게 되더라고. 그런데 되게 놀랍게도, 편안한 공간에 필요한 물리적인 조건들도 당연 있겠지만 .. 편안한 공간이려면 내가 편안한 상태여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어.
아무리 푹신한 침대와 멋진 인테리어가 있는 곳이더라도 내가 싫어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편하지가 않잖아.
그런데 나는 나지트에 처음 간 그 날부터, 그곳이 너무 편했거든. 아마도 그건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나은이가 있기 때문일 거고.
객실을 판매하는 입장에서 이용객분들이 좋아하는 사람들을 객실 안에 모셔둘 수는 없겠지만... 이 이용객이 객실로 들어가는 여정이나, 예약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편리함을 준다면 그게 곧 현장에서의 편안함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어.
존재. 현재로서 나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존재‘인 것 같다. 예전에 정신나간 사람처럼 ’나는 왜 사는 가?’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있거든. 몇년 간의 고민 끝에 도달한 한 지점은.. ‘인생에는 딱히 주어진 의미가 없다. 그러니 그저 존재하며 나만의 의미를 만들어내야한다.’라는 거였어. 낙관적 허무주의 (optimistic nihilism)이라고도 말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유투브 채널(쿠르크게작트)에서 본 말이거든. 어차피 사람은 다 죽으니까 고통, 부끄러움, 두려움... 그런 것들에 크게 흔들리지말고 또 한 발자국 나아가보라는 철학이지.
나는 세상의 그 누구든 존재하기만 한다면 그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해. 나 역시도 마찬가지고. 물론, 그렇게 생각하기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에는 지나치게 요구하고 줄 세우는 게 많은 것 같지만! 존재로서 가치있다는 생각을 하면 스스로에게, 또 타인에게 너그러워질 수 있지.
최근 나에 대해 또 하나 알게 된 것이 있는데, 나는 ‘내 것을 만드는 일’이 엄청나게 중요한 사람이었더라고. 그래서 업무에 대한 권한과 책임이 많은 스타트업을 사랑하고, 그래서 창업을 하고 싶었고, 그래서 나의 글을 쓰는 거였더라고.
5년 뒤에는 그것이 숙소 사업이든, 뉴스레터이든, 인스타툰이든, 창작으로서 또 나의 일로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나의 일을 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과 교류하면서 돈 버는 일에 대한 노하우를 나누고, 새로운 일을 응원하고, 또 삶이 얼마나 덧없는가, 그렇기에 이 시간은 또 얼마나 소중한가에 대해 떠들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