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꼭 프라이팬 사자 호기롭게 마트를 향했건만, 비싸기만 하고 영 마음에 드는 프라이팬을 만지작 거리며 한참을 서성이다가 다음 주에 시내 나가서 꼭 사자 하며 또다시 선택 보류를 선택하곤 식빵과 계란만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얼룰덜룩 코팅이 벗겨진 것으로 보이는 프라이팬에 버터를 바르고 계란빵을 굽는다. 다행히 빵은 맛있게 구워졌고, 달달한 초코우유와 함께 단백질 살짝 넣은 탄수화물 아침식사를 한다.
독일의 자랑 중의 하나인 WMF에서 큰돈 주고 산 프라이팬은 관리 부족인지, 알게 모르게 독일 사람들이 얘기하는 이름만 WMF요 made in china인지 어느 날 거뭇거뭇한 기름때 자국이 생겨 매번 요리할 때마다 들러붙다, 내 한번 살려볼 테요 베이킹 소다 무기 들고 살살 벗겨내다 결국 얼룰덜룩 말 그대로 수명을 다 하였다.
매번 남편의 요리뿜뿜의 든든한 조력자였던 프라이팬은 그렇게 한 달 전 처분 보류 상태로 서랍장에 대기 중이다. 보통이면 1-2주를 미루다 미루다 하나를 장만했겠지만, 때마침 터진 코로나 셧다운으로 이동제한이 생기고, 상점이 휴무를 하고, 괜스레 통장이 얇아진 듯한 기분에 이번 선택 보류는 두 달째 이어지고 있다.
코로나로 인한 정부 보조금이 60%에서 80%로 올려질 수도 있다는 기대 가득한 루머를 전하는 회사 동료에게 진짜로 80%까지 할 수 있을까 묻는다. 너나 나야 월세에 그나마 다행히 맞벌이라 좀 낫지만, 아이 셋에 집 대출 꽉 찬 옆팀 누구네와 같은 상황의 사람들은 당장 하루하루 은행 이자에 애들까지 진짜 힘들잖아. 그런 사람들이 많으닌깐 어쩌면 진짜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별 뜻 없이 건넨 동료의 말이 괜히 그날 저녁 설거지하다 마음에 걸린다.
우리는 스스로 책임질 수 없는 부분을 선택 보류라는 카드를 꺼내 들고 참고, 인내하며 당당히 Yes-No 선택할 수 있는 그날을 기다리는 중이다. 우리가 마냥 좋아 딩크 아닌 딩크족 생활을 하는 건 아닌데, 가끔은 그런 우리의 고민은 폄하된 채 너넨 맘 편해서 좋겠다 하는 것만 같아 마음이 상한다. 다른이들의 고심끝에 선택한 귀한 삶인 만큼 나의 삶도 고심끝에 선택한 우리모두 귀한 선택의 연장선이라고.
합이 평균 서른 후반의 우리 부부는 아직 집도 아이도 없다. 멋모르던 20대, 원하던 꿈을 좇아 이곳에 온 남편과 막연히 외국에 살고 싶어 뒤따라 온 나는 이곳에서 10대 20대 어린 친구들과 다시 한번 공부를 하고, 그렇게 한국의 친구들보다 반박자 늦게 직장인이 되었다. 이곳에서도 우리는 이방인이었고 그리운 한국에서도 점점 우리는 이방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방인이란 생각하기에 따라 마음의 자유를 주었다. 누구보다, 누구만큼 잘하고 앞서갈 필요가 없는 주위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남다른 배경을 가진 이방인이기 때문에. 그래서 늘 능력 이상의 누구만큼 잘하고 싶었던 자존감 절벽의 나는 이곳에서 조금은 나로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작은 자유를 얻었다.
취직하면 당연한 보상으로 따라올 것 같던 밝은 미래의 내 집 마련, 뚜벅뚜벅 뚜벅이에서 해방시켜줄 부릉부릉 네발 달린 자동차를 지르기에는 우리는 애매하게 현실의 많은 것을 알아버렸다.
좁은 원룸에서 벗어나 각자 시간을 가질 수 있는 방하나 딸린 하얀 집으로 이사를 왔고, 싸고 선택권이 좁은 작은 슈퍼마켓 Penny에서 나름 사치를 부리며 주말의 주전부리를 고를 수 있는 대형마트 Kaufland에서 장을 보게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배낭과 장바구니 한가득 짐을 담아 뚜벅뚜벅 걸어서 장을 보며, 윗집 옆집 층간 측간 소음, 앞집 잔디 깎는 기계와 미친 듯이 짖어대는 댕댕이가 있는 이곳에 월세 내며 살고 있다.
유학을 오면서 넣어둔 남편의 연애시절 부릉부릉 오토바이 뜨거운 심장은 유럽횡단의 꿈과 함께 다시 꺼내려했건만, CarSharing 회원증과 함께 무기한 선택 보류가 되어버렸다. 주변 사람들이 권하는 이율이 0.0X%인 저금리 주택대출을 하기엔 한국이 너무 그리워졌고, 그렇다고 무작정 돌아가기엔 애매한 이곳에서의 경력이 몇 년만 더 기다려보자며 이 또한 선택 보류. 한국보다야 나름 복지가 있는 유럽에서, 서른 후반 늦기 전에 이제 아이 낳는 생각을 해야지 않을까 하기엔 아직은 외벌이로 월세며 육아비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 이 또한 선택 보류.
이곳에서 반발짝 늦게 걸어가며 얻은 마음의 자유와 삶에 대한 나름의 혜안은 그와 함께 선택 보류라는 옵션도 함께 따라왔다. 조급하고 마음 급한 나는 종종 언제까지 이래야 해 하며 징징 거리며 그 마음을 헤집기도 하지만, 나 역시 알고 있다. 지금은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카드가 선택 보류라는 것을.
보류의 보류를 보류하다 보면, 어느 날 더는 보류할 수 없을 만큼 프라이팬이 절실해지는 순간이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