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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아 May 28. 2023

1평짜리 화장실에서 생긴 일

떨어도 괜찮아

“이번주는 어떠셨어요?”

명상 선생님이 안부를 물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내가 어떤 명상을 했는지 알아보는 나름의 숙제 검사다.


“이번주엔 회의 전에.. 웃기지만 화장실에서 명상을 했어요.”

화장실에서 명상을 했다는 게 어쩐지 민망해서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선생님이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놀랍게도 많은 분들이 화장실에서 명상을 해요!”




왠지 모르게 명상을 하는 곳이라고 하면 탁 트인 하늘에 바다가 보이는 곳이나 절벽 위 같은 자연 속 풍경이 떠오른다.

아쉽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이런 곳에서 명상을 해본 적이 없다.


출근 전 10분은 1초와 같고 퇴근 후에는 녹초가 되어 내 마음을 살필 틈이 없다. 그나마 출근길 지하철에서 종종 명상을 하곤 했는데 이것도 최상의 방식은 아니었다. (지옥철에서 명상이라니 정말 수련하는 기분이었다.) 이래저래 핑계를 대고 보니 화장실에서 명상을 가장 많이 했다. 업무 중 예상치 못한 일이나 상사의 무례한 발언으로 마음이 불안해지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달려가는 곳이 화장실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화장실이 최애 명상실이 되어버렸다.


사내 타 부서 담당자와 미팅을 앞둔 날이었다. 나의 기획안을 1:1로 설명하고 관련 업무를 요청하는 자리였다. 첫 회의 전, 가슴이 두근두근 불편하게 뛰었다. 이상하게 처음 보는 사람과의 회의는 항상 긴장이 됐다. 사실 처음 보는 사람이라서 긴장이 되는 지 내 기획안과 나에 대한 평가 두려운 것인지 잘 구분되지 않았다.


회의 1시간 전부터 다른 업무가 손에 안 잡히기 시작했다. 10분 단위로 모니터 하단의 시간을 체크했다. 벌써부터 스몰토크는 어떻게 할지, 어떤 식으로 회의를 진행해야 자연스러울지 걱정이었다.


회의 10분 전 자리에서 일어나 나만의 명상실로 향했다. 몹쓸 짓을 앞둔 영화 속 빌런처럼 칸마다 아무도 없는지 확인하고 비장하게 가장 구석탱이 칸에 들어갔다.


변기통 뚜껑을 닫고 앉아서 눈을 감았다.


들숨- 날숨-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었다가-


호흡을 하며 콧 속에 들어왔다가 빠져나가는 숨을 느꼈다.

그러다 천천히 귓바퀴에 주의를 옮기고 들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콸콸콸 배수관에 물이 흐르는 소리. 화장실 밖 복도에서 들리는 말소리.


저 소리가 나쁜지 좋은지 판단하지 않고 그냥 들었다. 물소리는 멈췄다 다시 이어가길 반복했다.


불안하게 콩콩콩 뛰는 가슴도 의식했다. 심장이 반복적으로 뛰는 느낌. 불안하고 떨리는 느낌.


마음을 진정시키거나 통제하려는 의도 없이 그냥 지금 내가 느끼는 대로 알아차렸다.

떨리는 감각과 감정을 바라보고 허용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함께 떠오르는 생각도 알아차렸다.

아, 내가 지금 떨리는구나. 심장이 빠르게 뛰고 긴장이 되네. 그럴 수 있지. 사람인데 떨 수도 있지! 떨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뭐 어때? 떨어도 괜찮아.


어느 순간 한 평 남짓한 화장실이 광활한 자연 속처럼 느껴졌다.

신기하게도 떨면 안 돼! 라며 급히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을 때 보다 훨씬 마음이 평온해졌다. 평범한 화장실이 이 순간만큼은 마음 편안한 안식처 같았다.


그 이후에도 항상 회의 전에는 긴장이 된다. 하지만 그 상태를 알아차리고 지켜보고 받아들인다.

떨려도 돼. 떨 수도 있지! 떨어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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