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두 번째 지난주
‘여름이니까 덥다’라는 인과관계는 부연을 요구한다. 짧게 전하자면, 태양은 높게 떠오르고, 땅은 달구어지는 탓이다. 위와 아래의 열기가 만나, 우리를 휘감는 작용을 우선 주지한다. 조금 설명을 늘리자면, 지금 우리는 한반도가 속한 북반구의 태양 고도가 가장 높은 시기를 살고 있다. 태양의 고도는 하지에 가장 높아져, 땅에 내리쬐는 단위면적당 열량을 극적으로 드높이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나며, 높은 태양의 에너지와 데워진 땅의 에너지가 만나, 근일의 당신을 에워싼 사태로 발현된 것이다. ¹ 나도 죽겠다.
이상은 여름이라는 계절의 시기가 더운 과학적 설명이다. 하지만, 필자 역시 이상의 근거를 알아내기 위해 인터넷을 찾아 나섰듯, 우리 대부분에게는 특정 현상에 대한 과학적 인지 행위는 낯설다. 차라리, 감정의 언어를 공유하는 일이 훨씬 수월하리라……. 그리하여 섬세한 사람들이 여름을 감정의 모양으로 잘라내어 종이에 새긴 활자들을 나눠보려 한다. 마음으로 나눈다 하여 더위가 감해질 리 없겠으나, 타인의 더움을 엿보는 일은 가장 보편적인 경험 속에서도 우리의 다름을 발견하는 일을 돕는다. 물리적으로는 굳이 닿고 싶지 않은 여름의 우리를 맞잡게 하는 것이다. 가운데 시를 두고 둘러앉은 딱 이만큼의 거리에서, 첫 시를 전한다.
한여름밤의 꿈
이현승
나뭇잎에 베인 바람의 비명
몸이 벌어지면서 나오는 신음들
수도꼭지의 누수처럼 집요하게 잠을 파고드는
불편한 소리들,
아, 들끓는 소리와 소리 사이
폭발과 폭발 사이 화산의 잠
어둠 속에서 숨죽여 우는 사람이 있다
누가 밤하늘에 유리 조각을 계속 뿌려대고 있다 ²
2016년 8월 7일을 기준으로 15일째 열대야가 이어지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한다. 여름의 밤은 소란스럽다. 봄에 태어난 생명들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뼈의 성장을 못 이긴 살들이 부르트는 소리에 시인은 잠들지 못한다. 어설픈 바람이 자라나는 나뭇잎에 베여 지르는 비명들이 밤을 수놓는다. 마음이 아닌, 신경에 닿는 소리들은 마치 폭발과 같아서, 시인의 잠은 화산이 된다. 잠이 올 리가 만무하다. 그 와중에 어떤 이는 숨죽여 흐느낀다. 모두가 여름에 자라나기만 하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너무 자라난 자신이 두려운지 훌쩍거리는 소리마저 시인의 귀로 전해진다. 잠 못 드는 이들이 여름의 밤에, 눈물로 별을 수놓고 있다. 한여름 밤의 꿈이 깊다.
한여름 새벽에
박재삼
이십오 평 게딱지 집 안에서
삼십 몇 도의 한더위를
이것들은 어떻게 지냈는가
내 새끼야, 내 새끼야
지금은 새벽 여섯 시
곤하게 떨어져
그 수다와 웃음을 어디 감추고
너희는 내게 자유로운
몇 그루 나무다
몇 덩이 바위다. ³
이제 새벽이다. 어떤 집의 아비도 잠들지 못한다. 제집을 게딱지의 그것에 비유하는 초탈한 제 비애 따위는 중한 것도 아니다. 자신이 아니었으면, 굳이 이렇게 더워할 필요도 없었을 핏덩이들의 존재만이 눈에 밟힌다. 대체 이것들은 어떻게 지냈는가? 아비는 스스로에 묻는다. 아비의 눈에는 잠든 모습에도 종알종알 거리던 수다와 웃음이 보인다. 그렇게 흐뭇하다가도, 이내 이것들은 몇 그루의 나무임을, 몇 덩이 바위임을 떠올린다. 삼십 몇 도의 한더위도 제 잘못인 것만 같은 어떤 아비의 여름이 무겁다.
서울市 新林洞 山77 聖 金福禮의 하루
권혁웅
5
바람만 따라오던 넌출 가로등 돌아가고 건너편 산등성이 불빛들도 까무룩 조는 초여름 저녁, 김복례 할머니 형광등 값을 아끼려 일찍 자리에 든다 벌써 눕느냐고 칭얼대며 은초롱꽃들이 등을 켜들고 슬레이트 처마 아래를 들여다본다
6
야채나 생선차도 이곳엔 들르지 않는다 해서 이곳엔 기다림이 없다 그저 마른 방구들 풀썩이며 노는 먼지들뿐이다 그 위로 햇살이 부서진다 하늘에 제일 가까운 곳에 세워진 빛의 고딕 성당 서울시 신림동 산 77번지, 거기 김복례 할머니가 산다 ⁴
이마에 맺히는 땀 한 방울에도 마음을 써주는 사람이 있는 아이의 여름은 차라리 포근하다. 비단 여름이 아니더라도, 일찌감치 시야에서 벗어난 삶들에게 내려진 혹서는 가혹하다. 누군가는 누진세를 걱정할 때, 변변한 선풍기 하나 없는 쪽방촌의 노인들은 불구덩이의 한 복판에 있다. 그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으나, 그 누구들이 모은 실외기의 열기가 침범하는 노인의 여름을 시인은 엿본다. 이와 중에도 형광등 값을 아끼겠다며, 일찍 잠자리에 드는 김복례 할머니의 여름은 시인이 아니었으면 누구도 들르지 않았을 시간이다. 기상청은 서울의 경우 32도부터 기온이 1도 오를 때마다, 65세 이상 고령층에서 9명의 초과 사망자가 발생한다고 한다. ⁵ 지난주 5일 서울의 최고기온은 36도를 기록했다. ⁶
숲향기
김영랑
숲향기 숨길을 가로막았소
발끝에 구슬이 깨이어지고
달 따라 들길을 걸어다니다
하룻밤 여름을 새워버렸소 ⁷
마음도 관계도 다 지치는 여름이다. 사람들은 기록적이었던 1994년의 그것을 떠올린다. 이 더운 와중에도 시인들은 감정들을 잘라 기록해두었다. 덕분에 잠시 마음을 식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룻밤의 여름을 새워버린 시인의 노래를 엿듣는다. 숨길을 가로막는 숲 향기와 발끝에 차이는 밤이슬이 시인의 밤 산책을 함께한다. 달빛을 향해 들길을 걷다가 여름의 하룻밤을 다 보냈다 한다. '새워버렸소'라는 수동적 고백 앞에, 더위에는 둔감했던 시간임을 짐작한다. 우리도 시인처럼 숲의 향기에 취해 여름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으면 좋을 일이다. 정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질 않으면, 각자 마음 속의 숲길이나 들길을 찾아 걸어보시기를 권한다.
참고
¹
- 세계일보, 2016년 6월 16일 자, “[이태형의 우주여행] 여름이 길게 느껴지는 진짜 이유”
- segye.com/content/html/2016/06/16/20160616003302.html?OutUrl=naver
²
- 이현승 저, 《아이스크림과 늑대》,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중
³
- 박재삼 저, 《박재삼 시집》, 범우사, 1989, 중
⁴
- 권혁웅 저, 《황금나무 아래서》, 문학세계사, 2001 중, 일부 발췌
⁵
- 연합뉴스, 2012년 8월 6일 ,“'최악의 폭염' 1994년 여름 얼마나 더웠길래”
- yonhapnews.co.kr/bulletin/2012/08/06/0200000000AKR20120806060000004.HTML
⁶
- SBS, 정구희 기자, 2016년 8월 5일 자, “가마솥 된 한반도…'서울 36도' 또 최고 기온”
- 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717876&plink=ORI&cooper=NAVER
⁷
- 김영랑 저, 《영랑시집》, 그여름, 2016, 중
이미지 출처
커버 이미지 및 ****
- 산림청 블로그 ‘푸르미의 산림 이야기’ 중 “장성 편백숲, 산림치유 서비스 개시”
- blog.daum.net/kfs4079/17206468
*
- 센티멘탈 초이의 블로그 중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포스팅 중
- 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IXYT&articleno=697077&categoryId
=412657®dt=20160207142238
**
- 오마이뉴스, 이혜선 시민기자, 2016년 3월 20일 자, "심야 퇴근 잦은 워킹맘, 시어머니 말에 눈물이..."
- 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94241
***
- 포커스 뉴스, 김기태 기자, 2016년 8월 5일 자, “무더위에 더욱 힘든 독거노인”
- img.focus.kr/mnt/photo/web/2016/08/05/2016080501111545490_L.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