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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다 Mar 21. 2023

상실의 시대

 중학생 때 나와 친했던 나무가 있었다. 우리 집 옆에 있던 나무였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 나는 나무에게 인사를 하고 말을 걸었다. 물론 나무는 한 번도 소리를 내어 대답해 준 적은 없었다. 나무와 친하게 지내는 일은 꼭 수줍고 관계에 서툴은 친구와 지내는 것 같았다. 늘 먼저 말을 걸 때면 리액션이 크진 않지만 내심 좋아하는 기운을 내비치는 친구. 웃으며 내가 오는 것을 반가워하는 친구. 나무는 꼭 그런 친구였다. 이게 평범한 중학생의 일상은 아니라는 사실은 그때도 알고 있었다. 그 당시 어떤 책을 읽고 영향을 받아 시작하게 된 일이었다.


내 첫 나무 친구와는 1년 만에 헤어지게 되었다. 이사를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오랜만에 나무에게 찾아갔는데, 나무를 보자마자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무서워서 나무에게 이제 찾아와서 미안하다고 사과한 후 서둘러 도망쳤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무와 내가 소통한다는 것을 반은 믿고 반은 안 믿고 있었는데, 그제서야 진짜 우리가 교제하고 있었던 건가 싶었다. 꼭 내가 누군가에게 장난스럽게 다가간 것만 같아 미안했다.


나는 이사를 가서도 나무 친구들을 만들었다. 집으로 내려가는 길에 있는 나무들과 올리브들이었다. 학교를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오후 5시쯤 되었는데, 그때는 막 해가 지고 있어서 온 세상이 따뜻하게 노란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햇살 가루가 마구 뿌려진 나무와 올리브들을 보는 시간이 정말 행복했었다. 이번 친구들에게는 ‘버플’이라고 이름도 지어줬었다. 왜 ‘버플’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어쨌든 매일 ‘버플들아 안녕’하고 인사했던 기억은 난다. 그렇게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그 길을 매일 지나며 인사하고 지냈다. 고등학생이 된 이후에는 위치가 달라 그 길을 지날 일이 없어졌다. 그래도 주말에 그 길을 지날 일이 있으면 인사했다. 친구들과 지나가게 될 때도 꼭 비밀연애를 하듯 마음속으로 인사하곤 했다.


사실 집에서 번화가로 나가기 위한 길은 두 가지였는데, 나무들을 지나칠 수 있는 길은 조금 더 불편했다. 풀 숲 사이 살짝 벌려진 틈을 지나야 갈 수 있는 길이었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그 길을 가지 않았다. 나는 중학생 때 자연을 좋아했고 그 길을 지나는 것이 꼭 모험하는 것만 같아서 불편함을 감수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늘 선택의 기로에 섰었다. 불편하지만 나무들과 인사할 수 있는 길을 갈 것인가, 편한 아스팔트 길을 갈 것인가. 시간이 지날수록 편한 길을 선택하는 빈도수가 늘어났다.


나무들에게 인사하기를 그만둔 건 20대가 된 후부터였다. 다른 지역으로 대학을 가게 되면서 그 길을 지날 일이 거의 없어지기도 했고, 가더라도 더 편한 길을 자주 선택했다. 꼭 어릴 적 인형놀이를 그만두고 친구들과 시내에 나가기 시작하는 10대처럼, 찬란한 젊음의 세계에 막 들어선 나에게 나무들은 추억의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아주 가끔씩만 마음을 먹고 나무들을 볼 수 있는 길로 갔다. 어느 순간부터 나무들을 보고 인사하는 대신 어렸을 때부터 한결같았던 그들을 보고 추억의 따뜻함을 느끼며 지나갔다.


나는 스물다섯 살에 처음 회사에 들어갔었는데, 사회생활이 처음이어서 많이 힘들었다. 주중이 빡셌기 때문에 반작용으로 주말은 무조건 행복해야 됐다. 그래서 약속 없는 주말을 맞았을 때 어떻게 즐겁게 보낼까 고민하다가 예쁘게 꾸미고 밖에 나가 사진을 찍기로 했다. 그때는 날씨가 한참 좋은 가을이어서 그랬다. 근처 공원과 함께 어딜 또 가지 고민하다가 나무들이 생각이 났다. 그래 한 번도 같이 사진을 찍은 적은 없었네. 그리고 오랜만에 보면 요즘 힘든 마음에 큰 위로가 될 것 같았다. 나무들을 보면 어렸을 때 행복했던 기억이 나니까 말이다. 그래서 그날 같이 사진을 찍었다.


나무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안 것은 그로부터 2년 뒤였다. 나는 사진을 찍은 뒤로도 나무들이 있는 길은 뜸하게 지나갔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계속되는 입사와 퇴사,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마음의 고개를 푹 숙이고 다닐 때였다. 마음의 고개뿐 만 아니라 실제로도 고개를 숙이고 다녔나 보다. 그 길을 가끔 지날 때도 나무들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했기 때문에 나무들을 볼 여유가 없어서 그랬던 것 같다.


2년 뒤 어느 날 회사도 다시 들어가고 마음도 자리 잡았던 그때, 오랜만에 생각이 나서 나무들이 있는 길로 갔다. 근데 뭔가 휑했다. 자세히 보니 한그루만 남겨지고 다 사라져 있었다. 한 그루만 남겨져있는 길을 걸으며 나는 마음이 많이 먹먹했다. 나무가 사라져서 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이제서야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서였다. 나는 그동안 무얼 얼마나 잊고 살아간걸까. 내가 놓은 걸까, 성장이 놓게 만든걸까.


이제 나는 나무들에게 말하지 않고 나무들도 나에게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무는 한 그루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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