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에이전시에서 웹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에이전시다 보니 고객사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일이 몰릴 때면 한 고객사가 이틀의 시간을 주고 부탁한 것을 2시간 만에 해내서 보낼 때가 있다. 물론 디자인 퀄리티가 크게 중요하지 않은 고객사여서 그렇게 처리한 것이긴 하다. 그랬을 때 대부분은 잘 넘어가지만 가끔 굉장히 불만을 표할 때가 있다. 보통은 그 불만을 기획팀에서 잘 풀어서 얘기해 주지만 그 강도가 좀 심각할 때면 그냥 워딩을 그대로 캡처해서 보내준다. 심각성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일 년에 3번도 안 되는 일이긴 한데 바로 그 3번 중 한 번이었던 날이었다.
불만의 강도가 세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판단하는가. 이성보다 감정이 더 드러날 때 그렇고, 인신을 공격할 때 그렇다. 그것은 비판(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잘못된 점을 분석 및 지적하는 것)보다 비난(남의 잘못이나 결점을 책잡아서 나쁘게 말함)에 가까운 것이다. 그 척도로 판단해 기획팀은 내게 워딩을 캡처해서 보냈고 나는 그 문장을 읽기 시작했다. 참고로 나는 F적인 사람이다. 나랑 엄청 친한 사람들 외에는 나를 T로 볼 때도 많은데 내가 이성적이려고 노력해서 그렇지 사실 누군가의 말투나 비난에 예민한 편인 사람이다. 그런 내가 감정적이고 인격을 공격하는 글을 읽기 시작했다.
전에 이런 일을 겪었을 때는 그 글자글자 하나가 내 가슴에서 돌아가면서 모서리로 찌르는 듯했다. 내 안의 자신감을 청소기로 모조리 빨아들이고 나는 며칠간 그 문장에 따르면 이렇게 못난 나를 외면하며 풀 죽은 채 살아갔다. 그때를 떠올리며 나는 놀이기구가 출발하기 전 안전바를 꼭 붙잡듯, 마음을 붙잡고 읽었다. 그리고 다 읽고 생각했다. '많이 빡치셨네' 그게 끝이었다. 글에는 역시나 디자인을 이런 식으로 밖에 못하는 나에 대한 비난으로 가득 차있었지만 말이다. 그냥 어떻게 달래줘야 하지 싶었다. 이런 내가 나도 좀 놀라웠다. 왜 나는 이제 비난하는 말에 아무 타격을 받지 않는 걸까.
아마도 내 실력에 대해 자신감이 생겨서 인 것 같다. 내가 디자인을 잘하는 건 아니지만, 상업적으로 내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수준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디자인을 말도 안 되게 해서가 아니라 서로 소통에 문제가 생겨서 생긴 일임을 안다. 전에는 그런 자신감이 없어서 내 실력에 대한 비난에 반격할 마음의 갑옷이 없었다. 내가 봐도 이상하니까 선을 넘는 비난도 어쩐지 대꾸하면 안 될 것 같아 그냥 마음을 내어줘 버렸다. 이젠 갑옷을 입고 있어서 부당한 비난의 화살은 그대로 고꾸라져 버리고, 나는 그 화살들을 주어서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자세히 살핀다. 그리고 그렇게 작업해서 그들을 달래준다.
이런 비난과 마주하는 일은 일상 속에서도 자주 일어난다. 그리고 그 비난도 최근에는 이겨낼 힘이 생겼다. 이때도 똑같다. 나에 대한 자신감이 그 비난을 이겨내게 한다. 그 자신감은 자존감과 같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작은 성공들과 나만 아는 작은 선행들이 쌓여 나를 좋아하게 된 것이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또 오랜 시간을 보내며 깊어진 관계들이 주는 사랑도 그렇다. 비난을 들을 때는 그 시선으로 나를 보며 위축된다. 그때 신과 깊은 관계의 사람들이 나에게 그렇지 않다고 얘기해 주면 그들의 사랑의 시선으로 나를 다시 보며 이겨내게 된다. 마지막으로 경험이 있다. 그 시절에 중요하게 느껴졌던 것들이 지나고 나니 그렇지 않다는 경험말이다. 사람일 수도 있고 어떤 공동체의 법칙 일수도 있고 유행하는 물건 일 수도 있다. 되돌아보니 거기에 내 가치의 기준을 두었던 게 후회스러웠다. 지나고 보니 별거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제는 어떤 것에 쉽게 휩쓸리지 않으려고 한다.
얼마 전 읽게 된 책에서 이런 비유를 봤다. 누군가 숫자 셈의 답을 틀리게 말한다면 그 사람이 잘못된 것이며, 거기에 쓰인 숫자와 기호들의 평판에는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부당한 비난에 대처하는 자아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내면이 단단하다면 비난은 자아에 아무 영향도 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