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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다 Jul 03. 2022

갈대 위 봄바람

하루에도 몇 번씩 카카오톡 대화방에 들어간다. 그와 했던 대화를 보고 또 본다. 휴대폰을 끄고 난 뒤에는 그 대화를 곱씹고 또 곱씹는다. 그런 나날들이 계속되던 요즘이었다.

그는    잠깐 눈이 맞았던 사이였다. 그때 우리는 살고 있는 지역이 달랐고,  일은 그냥 해프닝으로 지나갔다. 그러다 어느  어떤 계기로 오랜만에 연락을 주고받게  것이었다.

사실 그와 닿기 며칠 전에 나는 친구에게 그때의 해프닝을 이야기했었다. 얘기를 하다 보니 오랜만에 그때가 가깝게 생각났다. 아마 다시는 연락이 닿을 수 없을 거란 생각에 아련한 잔상이 남았었다. 그래서 며칠 후 갑작스레 그와 닿게 되었을 때, 나는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와 안부를 주고받고, 공적인 대화를 나눈다. 우리는 가운데가 막대기로 고정되어 있고 공중에 떠있는 납작한 원 가장자리를 밟으며 돌고 있다. 나는 서둘러 우리가 원 중심으로 들어가 손을 맞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조심스럽다. 그는 기본적으로 착하고 예의 바르고 다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는 여자 친구가 있지만 적당한 친절을 베풀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이 예상이 맞다면 내가 원 가장자리에서 안쪽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우리의 원은 중심을 잃고 관계도 끝이 날 것이다.

아니야. 어쩌면 그는 소심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유독 이성관계에서 소심한 사람이 있다. 아니면 그도 나처럼 마음이 커졌어서 더 조심스럽게 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는 나랑 똑같이 생각하는 걸 수도 있다. 나의 연락이 사람 대 사람으로 그때의 추억과 고마움의 표현이라고, 원 가장자리를 걸으며 말이다. 하지만 20대 후반인 나는, 아무래도 믿기 싫지만 전자를 좀 더 붙잡아야 한다고 되뇐다.


그와 한마디 한마디 주고받으면서 나는, 스쳐 지나갔던 사람들과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들이 어떻게 다가왔을 때 기분이 좋았었지? 내가 어떻게 다가갔을 때 반응이 괜찮았었지? 아니면 반응이 안 좋았었지? 이 중에서 단연 많이 생각나는 것은 마지막이다.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게 압도적으로 많이 떠오른다. 그의 한 글자에서 조금이라도 유사한 느낌이 들면 여지없이 마음 무너져 내리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의 연락에 답할 때면 예전의 부정적인 몇 개의 기억들을 무찌르고 가는 것만 같다. 그래서 몸을 사리고 주저한다. 그런 나를 보며 나도 많이 컸구나 싶었다. 청춘과 어른이 각각의 꼭짓점인 선을 걷고 있다면 어른 쪽으로 좀 더 갔다는 얘기다.


어렸을 때는 몰라서 저지른 일이 많았다. 처음이었으니까 말이다. 비단 사랑의 얘기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몰라서 도전해보고, 몰라서 시작해보고, 몰라서 감정을 그렇게 무모하게 가졌다. 그런데 그게 어떤 것들은 아프게 끝나고 나니까 전처럼 쉽게 시작할 수가 없더라. 이번 것들이 똑같은 결말을 낳는다면 어떻게 아플지 예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산하기 시작했다. 경험과 현실과 이성을 신뢰하기 시작했다. 어떤 도전을 하게 될 때 전보다 많은 것들을 고려하고 그것이 어느 정도의 성공을 보장하며, 실패했을 시 얼마큼을 잃게 될 것인가를 계산해서 효율적일 때 시작한다. 어떤 관계를 시작하기 전 그의 많은 것들을 분석하여, 전에 만났던 사람들과 비교해 신뢰할 만한 요소가 클 때 조금씩 마음을 준다. 예전만큼 음악을 들으며 감정에 푹 빠지지 않는다. 감정에 빠지기에는 시간이 없고 에너지가 없다. 밤늦게 들으면 내일 출근에 지장을 준다. 이 감정에 빠지면 해야 할 일을 할 에너지를 뺏긴다. 나는 규칙적으로 해야 할 일을 해내야 하기 때문에 여기까지만 느끼자.

20대 후반에 들면서 이렇게 살게 되니 삶이 훨씬 안정적이 되었다. 한낮과 한밤을 마구 오가던 예전에 비하면 잔잔한 오후가 계속되는 기분이었다. 평화롭고 좋았다. 그런데 왠지 뭔가 허전했다. 삶이 단맛이 나지 않는 사탕을 빨고 있는 느낌이었다.


청춘의 시절을 지나고 어른이 되어버린 아쉬움에 대한 이야기들은 숱하게 봐왔다. 그땐 호기롭게 도전했는데, 무모했었는데, 그래서 살아있었는데. 지금은 현상 유지하려고 하고, 안정적인걸 찾게 되고, 그래서 미적지근하게 살고 있다, 그 생동감이 그립다는 이야기들 말이다. 예전엔 그것이 외국인들의 이야기 같았다. 그런데 요즘은 그게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물론 어른의 삶은 결코 나쁜 게 아니다. 지난 경험에 빗대서 계산하는 건 사실 훌륭한 자산이다. 리스크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어 가면 책임져야 할게 많아지기도 한다.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것에 피해를 주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이런 계산은 필요하다. 그러니 어른의 도전에는 무게가 실린다. 사람들은 청춘의 도전보다 어른의 도전에 더 큰 박수를 보낸다. 모두 알기 때문이다. 아무 아픔도 모르고 책임질 것도 없는 청춘보다,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책임져야 할 어른의 도전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말이다.

그럼 내 미래는 지나간 청춘의 생동감을 아쉬워하는 어른인 걸까. 그런 어른이 되지 않을 방법은 없을지 고민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파봤기 때문에 시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아파봤기 때문에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아플지 알기 때문에 시작하는 게 더 쉬워질 수도 있지 않을까. 계속 반복하며 아픔에 무뎌지는 운동선수처럼 말이다.

물론 아픔에 무뎌진다고 해도 안 아프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계속해서 ‘불가능한 꿈’을 향해 살아야 하는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정체되어 있는 삶을 살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청춘의 나이에서 벗어나도 생동감 있는 삶을 살고 싶다면 걸어야 한다.


‘우리 모두 현실주의자가 되자, 그러나 가슴에는 불가능한 꿈을 품자.’ 체 게바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말이 완성된 어른의 모습을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어른이 되면 경험이 쌓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전보다 더 냉철하게 분석한다. 그리고 전략을 세운다. 바로 ‘불가능한 꿈’을 위해서 말이다. 차갑게 바닥에 누워있지 않고, 뜨겁게 하늘에 마냥 떠있지도 않는다. 차갑게 세상을 바라보며 뜨겁게 이상을 향해 걷는다. 완성된 어른은 말이다.

여전히 한참 청춘인 나지만, 지금부터 연습해보려고 한다. 실패의 아픔이 생생하지만, 꿈은 계속 가져야겠다. 경험을 토대로 냉철하게 현실을 바라보지만, 적은 가능성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뛰어들어야겠다. 열심히 분석하고 지켜보되, 다시 한번 사람을 믿어보도록 한다. 낭만은 찾아야만 누릴 수 있는 거라고 했다. 늘 그럴 수는 없겠지만, 때로는 할 일이 밀리더라도 감정에 푹 빠져야겠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살아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카카오톡을 다시 한번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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