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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다 Sep 30. 2023

여름 (下)

우리가 도착한 식당은 s도 나도 처음이었고 그곳에는 매운 음식밖에 없었으며 그때서야 우리는 둘 다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할 수 없이 먹었다. 우리는 가벼운 이야기도 무거운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사이였는데, 지금까지는 가벼운 이야기를 훨씬 많이 나눴었다. 왜냐면 무거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닌 곳에서만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와 무거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기왕 분위기가 어색해진 김에 무거운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그것을 또 토론배틀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나는 나의 내일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했던 것인데 그는 그것에 대해 또 반박했고, 결국 나의 마음은 상했다. 내가 그를 오래 보고 싶어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어떤 현상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무엇이든지 장점만 있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좋은 이유는, 곧이어 그가 힘든 이유가 된다. 어쨌든 이번에는 의견이 아니라 존중을 주고받고 싶었는데 그가 착각해버려서 아쉬웠다.


그러나 그 이후의 대화에서는 의견과 존중을 아주 정확하게 주고받았다. 우리가 카페에 갔을 때다. 매운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부담감과 시끄러운 소리에서 벗어나 넓고 거의 아무도 없는 카페 2층에 자리 잡았다. 옆에는 밤바다가 불빛과 함께 넘실거렸고 갈색 탁자와 의자, 노란빛의 전구는 이곳은 마음 놓고 서로에게 집중해도 된다고 말하는 듯했다. 아까의 어색함은 사라지고 우리는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며 많이 웃었다. 이제 나는 그를 더 이상 못 보게 된다면 전보다 많이 슬퍼질 것 같았다. 나는 대화하면서 앞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뜯는 습관이 있어서 빨대 비닐을 다 나누고 플라스틱 컵 뚜껑을 문어 다리처럼 갈랐다. 그는 대화 중간중간에 그것에 대해 주의를 주었다. 자꾸 뜯다가 손을 다칠 수 있다고 말이다. 그가 그 주의로 나를 멈추려 했었다면 아쉽게도 실패다. 나는 그가 오빠처럼 걱정할 때마다 걱정 종자처럼 더 신나게 뜯었기 때문이다. 그의 걱정을 들을 때마다 나는 기분이 좋았다.


우리의 가벼운 이야기는 무르익었다. 한참 웃으며 나눴던 얘기 속에 마음이 기대어졌다. 그래서인지 s가 자신의 슬픔을 고백했다. 나는 너무 놀라고 당황스러웠다. 일단 s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슬픔에 위로해본 경험이 없었다. 그동안 나는 제법 위로를 많이 해봤음에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위로의 언어들을 마구 쏟아내 놓고 쓸만한 위로가 아닌 것 같아 사과하니, s가 괜찮다고 했다. 나는 나의 허둥지둥하는 모습에서 진심을 느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 마음이 많이 열렸다. 그래서 이번엔 내가 나의 슬픔과 어두움을 길게 이야기했다. 그는 가만히 들어줬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 그가 많이 늦었다고 말했다. 시계를 보니 11시 20분이었다.


지하철 막차가 끊기기 전에 타기 위해 서둘러 걸어갔다. 우리는 총 2번을 갈아타야 했는데, 첫 번째는 같이 갈아타고 두 번째는 서로 반대 방향 것을 갈아타야 했다. 지하철을 타고 옆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나는 너무 크게 웃어서 입을 막기도 했다. 첫 번째 열차를 같이 갈아탄 후 s는 초조하게 휴대폰으로 열차 시간표를 봤다. 우리는 둘 다 각자의 방향의 막차를 탔어야 했는데, 내 열차는 여유가 있었던 반면에 s의 열차는 갈아타러 가기에 빠듯했다. s는 갈아탈 역에 도착하면 뛰어가야 하기 때문에 지금 먼저 인사를 하자고 했다. 우리는 문 앞에서 인사를 나눴고, s는 도착해서 지하철 문이 열리자마자 뛰어가 무리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s가 뛰어간 방향의 반대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오늘 있었던 상황과 감정들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아직 정리되지 않았지만 떠올리는 것 자체로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몇 걸음 더 걷는데 누군가 뒤에서 내 어깨를 잡았다. 뒤를 돌아보니 s가 있었다. 그는 아까 뛴 사람답게 상기된 모습이었다. 그 모습으로 손을 흔들었다. 나는 영문을 모른 채 똑같이 손을 흔들며 답했다. 그리고 그는 뒤를 돌아 다시 뛰어 무리 속으로 사라졌다.


다음날 s에게 연락했다. s는 어제 결국 막차를 놓쳤고 1시간을 걸어 집에 도착했다고 했다. 나는 어제 먹었던 게 너무 매워서 오늘 아침 배가 아프다고 했다.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그도 나와 똑같이 아프다고 했다. 우리는 역시 어제 음식이 매웠었다며 웃었다. 그러다 문득 우리가 함께 아픈 곳은 배뿐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고통은 어쩐지 새로운 곳을 일깨워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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