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살다 Aug 21. 2023

헤아려 본 슬픔

그 책은 나온 지 꽤 되었는데, 그즈음에 나는 여기저기서 그 책의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 들었을 때는 언젠가 한번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들리니까 무조건 읽고 싶었다. 원래 나는 도서관에서 책을 많이 빌려봤었는데 최근에는 코로나 때문에 갈 수 없어서 사서 보고 있었다. 이 책도 사야 하나 고민하다가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낮춰져서 도서관이 열릴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선 도서관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도서관이 열릴 것이고 그 책 또한 소장하고 있다는 희망찬 소식을 발견하고 토요일 오후 소중한 침대 위에서의 시간을 떼어 도서관에 갔다.


그 책도 빌리고 오랜만에 책 산책도 하나 기대하고 있었는데 문이 닫혀있었다. 다음 주부터 열리기 때문이다. 너무 들떠서 언제부터 연다는 사실을 못 봤나 보다. 왠지 까인 기분이 들었다. 물론 이건 완전 내 탓이지만 말이다. 슬펐지만 괜찮았다. 평일에는 10시까지 열기 때문에 도서관이 열리는 다음 주에 퇴근하고 가면 되기 때문이다.


이틀 후 퇴근하고 곧장 도서관으로 향했다. 이젠 빌릴 수 있겠지. 퇴근하고 부푼 마음으로 도서관으로 향했다. 또 닫혀있었다.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열긴 하는데 일단 평일에 6시까지만 연다고 되어있다. 당연히 10시까지 열거라고 짐작한 내 탓이다. 오늘 못 빌리는 것도 그렇지만 또 토요일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끔찍했다. 그렇게 기다리기 싫으면 사면되지만 책이 도서관에 있는 걸 확인했는데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두 번째 까이고 집으로 돌아왔다.


드디어 대망의 토요일이 되었다. 3일이 너무 길었고, 그 책에 대한 갈망은 더 커져만 갔었다. 그러나 이제 그 시간이 끝났다. 더 이상 나를 돌려보낼 요소가 없다. 열심히 기다린 나를 다독이고 자신감 있게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은 환하게 열려있었다. 나는 도서 검색대에서 번호를 확인하고 찾아서 마침내 그 책을 손에 넣었다. 널 정말 보고 싶었단다. 그리고 오랜만에 여유롭게 둘러보면서 읽고 싶은 책 몇 권도 골랐다. 새로운 책들을 읽을 생각에 신난 마음을 가지고 책들을 대출 기계에 올려두고 대출증을 올렸다. 빌릴 수 없다고 떴다. 확인해보니까 연체 일수가 남아있어서 1달 뒤에나 빌릴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코로나 전에 빌린 책들이 있었는데 원래 조금 연체되었긴 했었다. 그리고 코로나로 도서관이 문을 닫은 후 무인 반납함에 넣어 반납했었다. 코로나 기간은 없는 거로 해준다고 해서 그렇게 오래 연체되었을 거라고 생각 안 했는데 책의 권수가 많은 이유도 있어서 그렇게나 오래 책을 빌리지 못한다고 했다. 도서관을 나오며 많은 감정을 느꼈는데 그중에 막막함이 제일 컸다. 1달 동안 어떻게 기다리지. 정말이지 나를 애타게 만드는 책이었다.


그렇게 세 번째 까이고 건물에서 나왔는데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도서관이 열려있냐고 말이다. 네 열려 있습니다, 저는 책을 빌리지 못했지만요 라고 생각을 하면서 얼굴을 봤는데,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었다. 8년 정도 만에 보는 것이었는데 살짝 지친 기색이 있는 것 빼고 똑같았다. 굉장히 각별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모르는 척하기도 싫어서 반갑게 인사했다. 선생님은 놀라시면서 반가워하시고 차에 타고 있던 아들도 소개해줬다. 나는 방금 도서관에서 내려오는 길이라고 열려있다고 대답해주고 작별 인사를 한 후 돌아섰다. 버스정류장으로 걸어오면서 너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낯을 가려서 처음 만나거나 오랜만에 만나면 커다란 리액션을 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되게 무미건조하게 정보를 알려준 후 헤어졌다. 물론 선생님이 나를 정말 알아봤을까 하는 생각이 있어서 그런 반응이 나온 거기도 했다. 나는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학창 시절 크게 튀지도 않았고 선생님과 아주 친한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선생님은 많은 학생을 만났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을 알아보는 제자에게 매몰차게 모른다고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너무 무미건조했던 것은 아쉬웠다.


계속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다 보니 선생님과 함께했던 고등학교 1학년 때 생각이 났다. 친하지 않았더라도 선생님은 내 학창 시절에 엄청 기억에 남는 분이셨다. 엄격하면서도 따뜻하게 학생 모두에게 관심을 엄청 쏟아부어주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심하며 크게 관심을 주신 선생님은 드물었다. 덕분에 1년 내내 선생님의 반인 것이 자랑스러웠다.


돌이켜보면 선생님이 주셨던 관심은 내 인생에 중요했던 부분에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하나는 꿈에 대해서였다. 선생님과 상담을 할 때 내 꿈에 대해 이야기를 했었다. 선생님은 내가 꿈이 있다는 것에 너무 반가워하며 응원해주셨다. 그런 응원은 처음 받아봤다. 내가 꿈을 가지고 있는 것을 그렇게 기뻐하는 것도 말이다. 나는 그때 하고 싶었던 일을 결국 지금 하고 있다. 그 과정에는 선생님의 응원도 지분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슬픔에 대해서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나는 특별반이었다. 그러나 반에서 하위권이었기 때문에 2학년으로 올라갈 겨울에 많이 긴장했었다. 다행히 나는 남아있게 되었다. 그렇게 마음 풀고 있었는데 갑자기 2차 시험을 또 친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결국 특별반에서 혼자 떨어졌다.


그 이후로도 큰 슬픔을 몇 번 겪었지만, 그 일은 내 생애 최초의 충격적인 슬픔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쩐지 화가 나지만 말이다. 그 발표가 있기 바로 전에 선생님은 나를 따로 불렀다. 어떻게 이야기를 하셨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하지만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꼭 안아줬던 것은 또렷하게 기억난다. 선생님께 꼭 안기던 그 순간. 진심 어린 위로가 나를 감싸던 순간이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며 선생님은 알고 보니 내 인생의 중요했던 시기에 가장 필요한 것을 주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사람은 중요했던 시기에 잘못된 것을 받아 삶이 바뀌기도 하고 오랫동안 고통스러워하기도 한다. 나는 선생님 덕분에 그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참 고민하다가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사실 선생님이 굉장히 반가웠었고 그리고 고마웠다고 말이다.


그 후에 결국 그 책을 빌렸다. 그 책은 C.S.루이스의 『헤아려 본 슬픔』이다.


그날 헤아려 본 슬픔을 빌리러 갔다가 내 슬픔을 헤아려 준 사람을 만났다. 누군가의 슬픔을 헤아려 주는 일은 이렇게나 중요하고 소중한 일이라는 것을 나는 다시 한번 되새긴다. 선생님의 눈빛과 품을 떠올린다. 우리의 작은 마음은 누군가의 인생에 크고 오래 남기도 한다. 부족한 나이지만, 가끔은 나를 돌보기도 벅차지만, 그 마음을 건네주자고 결심해본다.

이전 11화 나를 만들어준 사람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