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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다 Sep 11. 2022

사랑의 언어

'장기하와 얼굴들'의 가사를 빌려보자면, ‘바라만 보고 있어도 그저 아무 생각할 필요도 없이 아주 긴 편지를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던’ 순간이 있다. 그런 순간을 맞이할 때면 소통에 말은 필요 없는 것 같다. 눈빛과 미묘한 얼굴의 움직임이, 둘 사이에 흐르는 공기가 서로의 마음을 말해준다. 직접 말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알 수 있냐고 따질 수도 있겠지만, 그 순간에 있다면 그 마음을 안 듣기가 어렵다. 그 순간에는 상대방에게서 나온 마음의 기운이 온 세상에 퍼진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운이 나를 감싼다. 그러니 어찌 모르는 척 할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제대로 설명할 수 없어도, 나조차도 겉으로는 부인할 수 있어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짐작한다. 그 마음을.


생각해보면 소통에 ‘말’은 정말 필수조건이 아닌 것 같다. 왜냐면 우리가 늘 솔직하고 정확한가 싶기 때문이다. 마음과는 다른 말을 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속마음을 꼭 맞는 단어로 표현하지 못할 때도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 어쩌면 소통을 할 때 말 외의 표현을 제대로 캐치하고 알아듣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겠다. 


사랑의 언어에는 다섯가지가 있다고 한다. 말, 함께하는 시간, 스킨쉽, 도움, 선물. 나의 사랑의 언어는 함께하는 시간과 언어다. 함께하는 시간으로 보자면 나의 사랑을 경청과 시간을 내어줌으로 표현한다. 그 사람이 얘기 할때면 만사 다 제쳐두고 집중한다. 그 사람에게 완전히 이입해서 공감해준다. 또 혼자있는 것을 좋아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먼저 나서서 약속을 잡기도 한다. 말로는 특별한 날이나 기회가 있을때 표현하는 편이다.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고 고맙게 생각하는지 말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리기 마련이고, 여자들은 대부분 이런 표현방식이 익숙하다. 그래서 학생때는 별 문제없이 사랑을 잘 주고받았던 것 같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다른 성과 세대들과 만나면서 문제가 시작되었다. 나의 사랑의 언어가 이렇다 보니 나와 다른 사랑의 언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함께하는 시간에 집중하지 않거나, 말로 표현하지 않는 사람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라고 으레 짐작했었다. 그랬던 내가 나와 다른 사랑의 언어에 눈을 뜬 계기가 있었는데, 22살때 이야기다.


그 사람과는 한 모임에서 3년동안 함께 했었다. 나이차이가 꽤 많이 났고 남자였다. 또 외향적이고 직설적인 성격이였으며 mbti도 정반대였다. 아마 친구관계였다면 우리는 절대 서로를 친구로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말은 즉슨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가까이 지내보지 못한 유형의 사람이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임을 이끌어야 하는 위치였는데 모임의 어려운 상황에서 서로를 의지하고 도와야 하는 관계였다. 나는 그가 나를 어느정도 아끼고 있다는 것을 알긴 했지만 그의 마음이 의심스러울때가 많았다. 그래서 그의 직설적인 말에 상처를 받고 많이 참고 있었다. (하지만 아마 그도 나의 답답함을 많이 참고 있었을 것이다.) 모임에서 헤어질 쯤 생긴 갈등이 없었다면 이대로 서로를 오해하며 관계가 끝났을 것 같다.


나이차 때문에, 다른 성향때문에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속마음을 우리는 마지막 갈등을 통해서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사실 그 사람 입장에서 더 어려운 일이었다. 어린 사람에게 자기의 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자존심을 많이 내려놔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내게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내가 그를 의지하는 마음이 있었듯, 그도 나를 아끼는 마음이 있었기에 나에게 실망하고 상처받았었다고 했다. 나를 너무 성숙하게 생각해서 그릇된 기대를 가졌던 내 잘못인 것 같다라고 결론을 내리셨지만 그의 이야기는 내게 굉장히 충격적으로 다가왔었다. 나를 그만큼이나 아끼고 있는 줄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을 알고 지난 시간을 되돌아 봤을때 비로소 보였었다. 그의 사랑의 표현이 말이다. 나의 언어와는 다르지만 그의 언어로 얼마나 내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는지 그제서야 보였다. 그는 자주 나와 모임원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요리를 해주었다.  나에게 따뜻하게 말해주진 못했지만  필요한 이야기들을 해줬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지적을 해준다는 것은  사람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고,  노력이 드는 일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는 그렇게 선물과 도움으로 사랑을 표현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로는 이런 사랑의 표현을 잘 받아들이게 됐다. 특히 나를 진심으로 생각해주는 분들이 조언을 할때 그것을 더 감사하게 느낀다. 그들이 팩트라는 공을 던지는데, 받고보니 그건 따뜻한 심장이었고 나는 오랫동안 그걸 껴안고 있게된다. 온기가 온 몸에 퍼지도록 말이다.


나이가 들어가며 성숙해져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많은 경험과 만남을 통해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또 다른 세계를 거부하지 않고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누군가를 좀 더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을 이렇게 사랑할 수 있다면, 그래서 내 세계가 사랑으로 가득찰 수 있다면, 나는 나이드는게 더이상 슬프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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