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나는 낯을 많이 가리는 아이였다. 대화가 통한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에게만 나를 보여줬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런 친구들은 그때도 드물었다. 그래서 나는 대다수의 친구들에게 얌전한 아이로 정의 되어졌다. 먼저 말을 걸지도 않았고, 묻는 말에 예의상의 짧은 답변이나 웃음으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다수의 친구들이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리액션 할지 예측이 불가능해 두려웠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니면 굳이 통하지 않는 친구와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얌전한 아이란 어떤 아이인가? 그리고 어린이들은 얌전한 친구를 어떻게 대하는가? 얌전한 아이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던 내가 대표해서 얘기해보자면, 튀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튀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일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대화가 통하는 소수의 친구들을 제외하고) 모든 친구들에게 일관적인 리액션을 한다는 것이다. 일관적인 것은 극적인 것을 싫어 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진지하다로 이어질 수 있겠다. 즉 그들은 진지한 어린이들이다. 그런데 ‘진지한 어린이’라니 상반된 단어를 붙여 놓은 것 같다. 갓난아이가 걸을 수 없는 것처럼, 어린이는 절대 감정을 숨길 수 없다. 그러니 그런 어린이는 존재할 수 없겠다. 내가 두려움과 귀찮음으로 진지한 모습을 ‘연기’했던 것처럼 말이다. 아마 이 세상의 얌전한 어린이들은 다들 어렸을 적 나처럼 연기를 해오고 있는 걸 거다. 얌전한 어린이는 그렇기에 소수이다. 그래서 어린이들은 얌전한 친구를 조심스럽게 대한다. 그것은 대다수의 친구들과 다른 리액션에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몰라서 일 수도 있다. 또는 배려심 깊은 어린이의 경우에는 얌전한 아이를 지켜주고 싶어서 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 놀림을 받은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 나에게 장난을 치던 동생이 있었는데, 바로 혜진이였다.
어렸을 적 우리 부모님은 개척교회를 하셔서, 복지센터를 통해 몇몇 아이들이 연결되었다. 그 중의 하나가 혜진이였다. 혜진이는 3살 어린 내 동생과 동갑이어서 금방 친해졌다. 우리는 매주 일요일마다 꼬박꼬박 보게 되었다.
작은 키에 마른 몸, 그리고 늘 짧은 더벅머리를 고수했던 혜진이는 유독 나를 그렇게 놀렸다. 아무도 시키지 않고, 나도 원하지 않았는데도 별명을 지어서 불러줬다. 처음에는 내 성을 따서 ‘깡깡’이라고 불렀다. "야 깡깡”이라고 부르면 당연히 3살 언니로써 반응을 안할 수가 없었다. 혜진이는 이렇게 부르고 맨날 도망가고 나는 쫓아갔다. 이것은 우리의 관계에 빠질 수 없는 레퍼토리였다. 우리는 만나면 아마 꼭 이것을 의식처럼 치뤘던 것 같다.
혜진이와의 기억을 되짚어보면 특별한 추억은 없다. 그런데 어린시절 자주 갔던 장소엔 어김없이 혜진이와의 기억이 있다. 그 그네에서, 그 모래 위에서, 그 동네 거리에서, 그 오후의 하늘에서, 그 ‘나루토’와 ‘이누야샤’에서 함께했던 기억. 특히 내 어릴 적 놀이터 옆 거리에 가면 혜진이와의 기억이 또렷하게 난다. 다른 친구에게 장난을 치려고 했었을 때였던 것 같다. 우리는 숨어있다가 만나야 했었기 때문에 서로의 위치를 파악했어야 했었다. 그런데 그 당시 우리에겐 휴대폰이 없었다. 그래서 긴 고심 끝에 헨델과 그레텔처럼 돌을 떨어뜨리고, 거리에 영역표시를 하면서 각자의 위치를 알리기로 했다. 그 거리 위에서 혜진이와 진지하게 의논하던 시간이 선명하다. 장난을 의논하다 눈을 마주치며 웃던 순간, 서로의 위치를 알릴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렸을 때 기뻐하던 순간, 청명하고 눈부시게 빛나던 정오의 햇빛 모두 말이다.
혜진이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혜진이가 14살이 될 무렵이였다. 우리 교회가 좀 멀리 이사하게 되어서 혜진이도 전보다 뜸하게 나왔다. 가끔씩 만날때도 혜진이는 여전히 혜진이였지만 나는 그의 어떤 시절이 지나가고 있다는 걸 느꼈었다. 혜진이는 놀이터에서의 찬란함에서 어른의 세계로 관심이 옮겨지고 있었다. 우리는 주일 예배가 끝나고 전처럼 놀이터에서 뛰어다니지 않았다. 그리고 쓸데없이 놀리지도 않았다. 대신 거리를 걸어다니며 이야기를 했다. 몸으로 친해지던 시절을 지나, 이야기를 하며 친해지는 소녀의 시절로 들어선 거였다. 혜진이는 유독 어른의 세계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그런 친구들과 어울렸던 이야기를 해줬다. 나는 그런 혜진이가 걱정이 되었었다.
그 후로 혜진이는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 사실 개척교회에서는 누군가 왔다가 가는 것이 정말 흔했다. 몇 번 연락은 해보지만 오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아마 부모님께서도 그렇게 연락을 몇 번 하시고 마셨던 것 같다. 나도 그렇게 교회에서의 익숙한 헤어짐을 받아들였던 것 같다.
혜진이의 소식을 들었을 때는 대학생 때였다. 교회 동생이 혜진이의 사촌 언니와 한 반이 되어서 혜진이의 소식을 듣게 되어서였다. 교회 동생은 혜진이가 작년에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했다.
교회 동생과 슬픔을 한참 나눈 후에도 오랫동안 혜진이 생각이 났다. 혜진이와의 추억을 되짚어보다 그의 인생에 대해서 생각했다. 17년의 짧은 인생에 대해 말이다. 나는 혜진이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가 겪었을 인생을 상상했다. 아기와 어린이, 소녀가 되면서 겪었을 기쁨과 슬픔. 엄마의 품에 안겼을 때, 처음 초등학교에 갔을 때, 친구와 놀 때, 시험을 쳤을 때. 그리고 그의 인생이 끝날 때.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짧은 인생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 짧은 인생 안에 나도 있었다.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이 6년 정도니 혜진이의 인생에 3분의 1 정도를 함께했던 거였다. 그때 내가 인생에서 정말 의미있는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진이와 좋은 소식을 나누고, 함께 어울렸던 시간이 말이다. 혜진이의 짧은 인생에 내가 기쁨이었다는 사실이 말이다.
그 당시 나는 동아리의 대표였는데 우리 동아리의 인원 수가 적은 걸 아쉬워했었다. 그리고 나는 인간관계가 좁아서 소수의 친구들과만 어울렸는데, 친구가 더 많지 않음에 아쉬울때도 있었다. 하지만 혜진이의 일을 겪고선 그건 이제 아무 상관이 없었다. 사람이 많고 적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한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깊이 들어가 있는가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된 거다.
이제는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 가벼운 대화와 추억을 만들기 보단, 내 곁에 있는 중요한 ‘한 사람’들에게 집중한다. 시간과 에너지를 들이며 ‘천하보다 귀한 한 사람’들의 인생과 함께 한다. 그들과 웃고 울며, 복잡한 서로의 인생의 대소사에 함께하며 얽힌다. 그들의 인생이 끝나는 날 내가 그들의 인생에 큰 비중으로 기쁨이었길 바라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