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퍼펙트 데이즈>
느지막이 일어나 미역국이나 끓였다. 국거리로 소고기를 사다 넣을까 꽝꽝 얼려진 숨굴 몇 개를 대충 던져 넣을까 냉동실 깊숙이 손을 뻗어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는 생선을 통째로 집어넣을까 했다가 빨지 않은 이불 같은 어묵 몇 장을 잘라 넣었다.
한소끔 끓더니 어묵들이 돔처럼 부풀어 냄비 밖으로 흘러넘쳤다. 둥글게 조각난 대파와 잘게 다져진 마늘도 보였다. 미역국이 되지 못한 것을, 그렇다고 어묵탕도 아닐 괴이함을 가만 보고 있으니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나는 빈손으로 부엌에서 빠져나와 거실 바닥에 눌러앉았다. 이제야 노랫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Khruangbin & Leon Bridges의 Texas Sun이었다. 모르는 노래지만 알 것만 같았다. 영어가 잘 들렸더라면 삶이 좀 더 넉넉했을까 싶은 생각이 쓸모없이 스쳤다.
가사를 번역해보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 노래들로 가득 찬 영화였다. 어제는 아주 오랜만에 영화를 봤다. 과연 오랜만이었던지 전에라면 아주 헤아리지 못했을 양상, 함축, 상징 같은 것들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차츰 내 삶도 은유가 되어감을 느낀다. 그 처연한 순간들 속에서 수많은 히라야마들을 발견한다. ‘10점 만점에 9점 정도로 이상한(작중인물 타카시가 히라야마를 칭하는 표현)’ 그림자들을 스친다. 그의 마지막 표정을 내 얼굴에서 읽는다.
히라야마의 삶으로부터 위안받았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매일 같은 공간 그러나 매 순간 분명 다른 프레임 속에서 나는 연신 안심을 해댔다. 눈으로 하고 코로도 하고 입술로도 그랬다. 그럴수록 지금은 강력해지고 지금 그래도 되나 싶은 의식은 힘을 잃어 간다. 부풀어 오른 어묵처럼 부드러워진다. 그런 미소를 띨 수 있게 된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그것만으로 충분해 보였다.
<퍼펙트 데이즈>는 지금을 향하는 것. 지금에 충실한 순간이 확장되는 것. 나아가 순간을 팽창시킬 수 있게 되는 것. 시간이 아닌 오직 지금만이 태양처럼 빛나며 영원의 진실이라 말한다. '코모레비(こもれび: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 매 순간 존재의 기쁨 안에 머물길, 그로부터 미소 지을 수 있길, 바라며 이만 부엌으로 돌아가 보련다. 기록을 남기는 동안 국물도 조금은 깊어졌으리야. 흘러넘친 것을 닦고 냄비에 불을 마저 켜야지. 먹어야지. 웃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