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로 인해 무엇이 달라졌을지 뭉뚱그려 본다. 관계가 달라졌을 것이고 관심이 달라졌고 성적이 주저앉았다. 성장판도 뚝 하고 일찌감치 선을 그었는지도 모른다. 담배를 피우지 않았더라면 각종 사고와 질병으로부터 낙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끝내 이지경으로 글 따위나 쓰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토록 이 순간은 거대하게 조작되었다.
안경을 쓰기 전과 후의 삶이 분명 다르듯이 흡연 전후의 삶도 얼마든지 다르게 보일 수 있다. 매 순간 어떤 작은 요인들이 삶을 지배하고 움직이는지 전부 알 수 없지만 당장 눈에 띄는 아무것을 붙잡아 얼마든지 심문하고 책임을 뒤집어 씌울 수 있다. 그 과정이 억지스럽고 꾸며낸 이야기라고 해도 진실이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다. 함부로 말할 수 없으면서도 필연 우리가 닿지 않는 어딘가에서 어떤 모습으로든 드러나는 게 삶이다. 그러므로 어디든지 가만 귀를 기울이면 끝내 억울하다는 소리가 들려온다. 전파에서도, 앙상한 가지에서도, 고요한 가슴은 지난밤들의 혈맥을 모르지 않는다.
그간 담배 구입에 사용된 비용만 따져 봐도 족히 삼천만 원이다. 타격감이 느껴지도록 단번에 홱 낚아채가는 놈이 있는 반면 잘 느끼지 못하도록 장기간에 걸쳐 시간, 물질, 영혼 같은 삶의 징표들을 야금야금 굴절시키는 놈들이 있다. 야금야금 움직이는 날카로운 시곗바늘에 굴복하고 싶지 않다면 더욱 예민하게 깨어있어야 한다. 예민하게 깨어있음은 시곗바늘보다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우는 게 아니라 시간보다 느리게 지각을 확장시켜 빛이 닿는 면적을 늘려 감사와 찬미로 그것을 지속시키는 일이나 그것이 허락되지 않을 때에는 적어도 불투명한 지성에 의지하여 부단히 삶을 점검해야 한다. 지성을 따르다 보면 삶은 황폐해지고 의심과 적대감에 둘러싸이기도 한다. 외로움이다. 외로움도 담배를 피우면서 더욱 짙어졌다. 즐거우나 슬프나 담배는 곁에 있었지만 외로웠다. 생명이 뿌리내려야 할 자리를 담배가 차지했기 때문이다. 호흡은 콘크리트 숲이나 겉돌았고 민들레 홀씨는 수많은 봄을 데려왔다가도 내려앉을 곳이 없었다. 사탄이 실재한다면 딱 어울릴 만한 성격이 담배이지 않을까.
지난날 정신과 약을 끊겠다 다짐한 뒤로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500일이 지나고는 안심했지만 느닷없는 환청에 사로잡혀 30일간 전혀 잠을 이루지 못하는가 하면 일순간 거대한 공포에 휩싸여 숨마저 제대로 쉬지 못하게 되자 결국 제 발로 병원을 찾아가야 했고 한동안 약을 다시 억지로 삼켜야만 했다. 금연에는 어떤 혼돈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결국 비슷한 상실을 지나가는, 죗값을 치르는 과정일 것이다. 허물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세계로 도약하기 위해 감내해야만 하는 마땅한 고통인 것이다. 이겨내지 못하면 그곳이 한계이자 죽음이다.
허물을 벗고난 직후가 가장 취약할 것을 알고 있다. 날뛰는 마음을 누그러뜨려야 하며 적들로부터 연약한 새살을 보호해야 한다. 존재가 새롭게 구성될 때까지 번데기처럼 인내해야 한다. 호랑이의 모습을 하고 고양이처럼 굴을 뛰쳐나가서는 안 된다. 다시 태어나려면 줄곧 외면해 왔던 업고와 맞닥뜨려야 한다.
이제는 똥 쌀 때든 글 쓸 때든 밥을 먹고 나서든, 아픔을 겪을 때든 낯선 풍광 앞에 설 때든 담배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강력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에도 기대할 수 없다. 때문에 가능한 스트레스 없는 삶을 건설하거나 그것에 대항할 힘을 갖춰야 한다. 힘을 갖추겠다면 완강함보다는 의연함을 닮아야 할 것이다.
―담배―
그런 건 원래 없다.
그런 건 원래 없다.
그런 건 원래 없다.
정신과 약을 끊을 때 유효했던 다짐을 문에 붙여 두었다. 그런 건 원래 없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