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계약서가 작가의 처우를 개선할 수 있을까?
카카오엔터테인먼트가 1월 31일 웹툰&웹소설 창작자 대상 계약서 개정안을 발표했습니다. 카카오엔터에 정기적으로 작품을 연재하는 모든 작가를 대상으로 2월 1일부터 휴재권과 제작 분량을 명문화한 것이 주요 내용이었습니다.
카카오엔터는 계약서를 개정하며, 1) 웹툰의 경우 40화 기준으로 휴재권 2회를 보장하고, 2) 상호 협의 하에 휴재를 정할 수 있다고 명시했습니다. 3) 웹툰 최소 분량도 60화에서 50화로 낮추었습니다. 공은 이제 문체부로 넘어갔습니다. 향후 문체부가 개정 표준계약서를 발표할 것이라 공표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
플랫폼 입장에서는 작가와의 상생을 위해 한걸음 나간 것이나, 작가 입장에서는 여전히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작가는 플랫폼과 계약하지 않고 스튜디오와 계약을 맺고 있기에, 핵심은 작가-스튜디오 간 계약서 변경에 있습니다. 책의 저자는 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출판사는 서점들과 유통 계약을 맺습니다. 서점이 작가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박수받아 마땅하나, 출판사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헛수고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웹툰, 웹소설 업계에서 ‘표준계약서’가 화두가 된 것은 출판사와는 조금 다른 이유에서 입니다. 출판계의 표준 계약서 논란의 핵심에는 출판사가 보유하는 저작권 기간 (5년 일지, 10년 일지)과 2차 저작권의 권한을 누가 가질 것이냐가 있습니다. 2004년 출판된 ‘구름빵’이 유명해지며 뮤지컬, 애니메이션 등 2차 저작권 수익이 커졌으나, 한 푼도 배분받지 못한 작가가 소를 제기하면서 이슈화되었습니다. 소송 결과는 작가의 패소였으나, 작가들에게 2차 저작권 계약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고, 문체부 주도로 표준계약서 개정이 이루어지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웹툰 업계의 표준 계약서 논란 이면에는 웹툰 작가들의 ‘건강 악화’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가 2023년 1월 5일 발표한 ‘웹툰작가들의 정신건강 및 신체건강과 불안정 노동 수준 실태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웹툰작가 3명 중 1명은 우울증과 불면증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악성 댓글과 과도한 작업 시간, 촉박한 마감 일정도 정신 건강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합니다.
연구소는 최근 1년간 50만 원 이상 소득이 있는 웹툰 전업 작가 320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을 진행하며, 웹툰작가의 정신건강 및 신체건강 실태조사를 수행했습니다. 실태조사 결과, 17.3%는 ‘극단적 선택’을 생각했고, 8.5%가 이를 계획했으며 4%는 시도까지 해봤다고 응답했습니다. 일반인의 생각, 계획, 시도 비율(각 10.7%, 2.5%, 1.7%) 보다 모두 높게 나타나고 있어 심각한 상황입니다.
이 상황이 ‘표준계약서’로 해결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표준계약서’를 만든다고 유저들의 악성댓글을 막을 수 없으며, 업계 표준으로 자리 잡은 주 1회 연재 방식을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웹툰 작품들 간 무한 경쟁 상황에서 더 멋진 그림을 그리려는 작가의 창의력, 더 많은 분량을 요구하는 유저들의 요구를 바꾸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업계 영향력이 큰 플랫폼이 나서서 해결하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지만, 더 큰 문제는 수많은 플랫폼들이 적자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네이버웹툰은 연간 천억 원대에 이르는 적자를 기록하고 있으며, 리디 역시 잠깐 흑자를 기록했으나 다시 적자로 돌아섰습니다. 넷플릭스를 제외한 모든 OTT 플랫폼이 적자이듯, 웹툰 플랫폼 중 흑자가 나는 경우는 손에 꼽습니다. 역설적으로 플랫폼이 협상력이 높다면 플랫폼이 어떻게 해서든 ‘흑자’를 기록하기 위해 다양한 요구를 할 수도 있겠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데 문제의 본질이 있습니다.
한 발짝 떨어져서 보자면, 여전히 웹툰-웹소설 업계는 산업화되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웹툰 산업이 빠르게 성장하고는 있으나 2021년 웹툰 매출 규모는 1.5조 원 수준입니다. 쌈장, 고추장 등 국내 소스 시장이 약 2조 원으로 비슷한 규모입니다. 누구나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이지만, 큰 시장 규모도 아닙니다. 모든 식품 제조 회사가 도전하고 있지만 영세한 OEM 업체들도 상당수입니다. 영세한 업체들에서 일하는 수많은 임직원들의 처우를 정부가 나서 표준계약서로 개선하기 어렵듯이 수많은 작가들, 수많은 영세 스튜디오의 상황 하나하나를 개선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소스 시장의 노동자 처우를 이마트나 쿠팡 같은 유통사가 나서서 해결하기란 불가능에 가깝겠으나 그래도 대형 유통사가 나선다면 언론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효과 정도는 있을 것입니다.
작가의 처우를 본질적으로 개선하는 방법 중 하나는 ‘사전 제작’ 방식일 것입니다. 작가가 매주 연재 마감에 시달릴 필요도 없고, 필요에 따라 작업량을 조절하면서 작업할 수도 있습니다. 한국 드라마 업계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실시간 제작’ 방식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은 ‘넷플릭스’의 사전 투자 방식이었습니다. 저작권을 100% 넷플릭스가 보유하는 방식이나, 업계 제작 환경은 많이 개선되었습니다.
사전 제작이 가능하려면 투자자가 흑자가 나는 사업 구조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넷플릭스처럼 상당한 흑자를 내고 있거나, 디즈니처럼 스트리밍 사업이 적자가 나더라도 다른 사업의 흑자로 메울 수 있을 때 지속 가능한 방식입니다. 개별 사업만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적자를 기록한다면 넷플릭스처럼 과감한 투자를 하기 어렵습니다. 현재 한국 웹툰 업계가 정확히 이런 상황입니다. 플랫폼으로서는 상당한 적자를 감내하며 리스크가 높은 사전 제작에 투자를 선뜻하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작가 처우 개선의 해답은 스튜디오에 있습니다. 현재 업계에서 그나마 수익을 창출하고 있는 사업자들은 스튜디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아직 영세하다는 데 있습니다. 시장이 커지면서 소수 대형 ‘스튜디오’가 생기기 시작했으나 아직 규모가 그리 크지 않습니다.
‘나 혼자만 레벨업’으로 유명한 디엔씨미디어의 2022년 매출이 600억 원이고, 미스터블루의 2021년 매출이 615억 원입니다. 국내 선도 영상 제작 스튜디오인 ‘스튜디오 드래곤‘의 2022년 매출 6,702억 원에 비하면 10배 가까운 차이입니다. 상대적으로 작은 외형을 가진 웹툰 스튜디오 업계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더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가 불거지는 표면적 이유는 단순해 보일 수 있으나, 문제의 본질 이면에는 복잡한 실타래가 얽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성장 중인 웹툰 업계의 문제 중 하나는 엔데믹이 되면서 고성장의 기세가 꺾일 수도 있다는 본질적 두려움에 있습니다. 산업이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될 많은 문제들이 성장이 둔화되면서 어려움이 더 커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엔데믹이 본격화된 2023년은 작가에게도 플랫폼에게도 스튜디오에게도 중요한 한 해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