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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현 Jul 13. 2024

마흔 즈음에

Years in Review 2020-2023

팔리는 이야기, 팔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

“인생 말고, 하소연 말고. 내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보여달라.”


이야기를 잘 팔기로 유명한 이연실 편집자가 폴인 세미나에서 한 말이다. 그는 2023년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8,800여 편의 응모작을 하나하나 읽어본 뒤, 투고자들이 가장 많이 쓰는 동시에 특별하지 않은 소재들을 아래처럼 정리했다.


    퇴사하고 세계여행 간 이야기  

    육아를 통해 새 삶을 발견하거나 어려움을 깨닫는 이야기  

    본인 또는 가족이 암에 걸리거나 극복한 이야기  

    연애, 결혼 또는 이혼한 이야기  

    상사와 직장 미워하는 이야기  

    돈 많이 벌거나 성공한 이야기  

    글 열심히 쓰는 이야기  

    엄마 또는 아빠 이야기


그는 세미나를 통해 소재뿐 아니라 이를 전달하는 방식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팔리는 이야기’에는 시간과 공간이 압축돼 있다고 말했는데 개인적으로도 큰 도움이 되는 내용이었다) 앞서 열거한 소재는 대부분 “우리 모두가 살아가야만 하는 재미없는 인생”이기 때문이다. 재미없는 인생을 하소연하면 독자에게 팔리지 않는다.


이야기를 남에게 팔아야 하는 입장에서 그의 말은 타당하다. 비슷한 업을 가진 나도 같은 생각이다. 하지만 재미가 있든 없든, 의미가 있든 없든, 그 인생을 직접 살아가는 당사자에게는 이야기 자체로 고유의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굳이 팔지 않으면 어떤가. 자신이 살아온 시간인 걸.


두 편의 회고록을 다시 읽어봤다. ‘살고 싶은 대로 살아’는 퇴사하고 여행을 떠난 이야기(2015-2016)다. 그 과정에서 어떻게 업을 바꿨는지 담았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는 결혼 초반 3년과 더불어 임신 초기에 유산한 이야기(2017-2019)를 담았다. 앞서 이연실 편집자가 정리한 것처럼 둘 다 모두 특별하지 않은 소재들이다.


이제 ‘육아를 통해 새 삶을 발견하거나 어려움을 깨닫는 이야기’를 쓸 차례다. 이 이야기가 팔리지 않아도 좋지만, 누군가를 돌보거나 키우는 사람에게는 끝까지 읽히길 바라는 모순된 감정이 든다. 하소연으로 끝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미래의 나를 위해 이 글을 시작한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

2021년 4월 2일 오후 5시 27분, 이름조차 정해지지 않은 아기가 태어났다. 나중에 출생 신고를 할 때 이름이 생겼지만, 이 글에서는 태명이자 별명인 ‘송이’로 부르겠다. 송이가 태어난 뒤로도 처음 몇 달 동안 ‘아버지가 된다’는 게 무얼 뜻하는지 몰랐다.


에피소드 하나가 떠오른다. 같은 해 1월 초, 어느 글쓰기 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다. 송이가 태어나기 석 달 전이다. 글쓰기 주제는 ‘거꾸로 하는 회고’. 그해 연말의 나를 상상하여 매일 아침 9시, 모임에 올라온 질문에 답하고 멤버들끼리 인증하는 방식이다. 이런 질문들이 있었다.


    2021년, 한 해를 보내면서 OO님의 삶에 가장 큰 선물은 무엇이었나요?  

    2021년, 52번의 주말 가운데 OO님이 가장 행복했던 주말의 모습을 말씀해 주세요. 가급적이면 상세하게 알려주시면 더 좋을 것 같아요.  

    2021년 OO님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해 본 일은 무엇인가요? 그 경험을 하면서 든 생각과 느낌을 나눠주세요.  


열흘쯤 지난 뒤 글쓰기 모임에서 빠지기로 했다. 뭐든 적고 나니 (곧 태어날) 아이 이야기로 귀결되는데, 그 모습을 자세히 풀기엔 상상력의 해상도가 너무 떨어졌다.


시간이 흘러 2021년 말에 도착했다. 한 해를 회고해 보니 실제로 거의 모든 시간이 아이와 연관되어 있었다. 막연히 상상하는 것과 매 순간 겪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임을 깨달았다.

△ 막연히 상상하는 것과 매 순간 겪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임을 깨달았다.

갓 태어난 아이를 돌보는 경험의 강도와 범위는 상상 이상이었다. 평소 일희일비하지 않고 잔잔한 일상을 추구하던 나는 정신을 차려보니 감정 기복이 심하고 격정적인 사람이 되었다. 기쁠 땐 그 기분을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좋아서 아이 얼굴 앞에서 눈물이 핑 돌곤 했다. 힘들 때는 눈물 대신 깊은숨이 나왔다. 그동안 살면서 육체적으로 가장 고단할 때를 꼽으라면 군 복무 시절을 빼놓을 수 없다. 유격 훈련이나 불침번 서는 만큼 힘든 건 아니지만 은은하게 피로가 쌓였다. 아이가 태어나고 지금까지 한 번도 깨지 않고 푹 잔 날은 그리 많지 않다. 이따금 아이가 울거나 나를 찾는 듯한 환청도 생겼다.


부양하기 위해 타협한다

출산과 육아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이전의 삶을 감히 떠올리지 못하게 할 정도로 크다. 아내 수현과 나는 농담 삼아 송이가 없던 시절을 ‘전생 같다’고 말한다. 새 삶은 어떤 모습일까? 아이와 함께 산 지 3년이 지난 현재로선 두 가지를 말할 수 있다.


첫째, 끊임없이 타협해야 한다. 새 삶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삶의 양상과 균형은 아이의 가파른 성장과 변화에 따라 수시로 흔들린다. 육아가 주는 기쁨만큼 고단함이 따라온다. 내 행복과 불행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아이를 재우고 밀린 설거지를 하느냐, 맥주를 마시며 잠깐이라도 내 시간을 가질 것이냐 고민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아이를 재우다가 늘 내가 먼저 잠들어 버린다.


둘째, 부양의 의무를 실감하고 있다. “아이 때문에 우리 삶을 너무 희생하진 말자.” 송이가 태어나기 전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이치에 맞지 않는 소리를 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신생아를 먹이고 소화시키고 재우는 등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돌봄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며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 됐다.


임신 사실을 처음 알게 된 날부터 송이가 태어난 날, 그리고 첫 돌이 지나기까지 나에게 일말의 불안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지난 유산 경험으로 인해, 아이가 언제라도 (부모의 의지나 바람과 상관없이) 잘못될 수 있다는 불안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는 아이의 탄생을 온전히 축하하지 못하고 현재 주어진 행복을 누리는 데 걸림돌이 됐다.


불안은 송이가 성장하는 동안 자연히 사라졌다. 2022년 2월, 온 가족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렸는데 그때 온전히 열을 떨쳐내고 회복하는 송이를 보고 나서야 나는 안도했다. ‘내 아이가 튼튼하구나’라고 생각을 고칠 수 있었다. 이제는 송이가 잔병치레를 해도 꿋꿋이 견뎌낼 거라는 믿음이 있다.

△ 출생 당일, 산부인과에서 작성하는 신생아용 문서에 적힌 ‘신생아 사정’만 봐도 얼마나 많은 변수가 있는지 알 수 있다.

지금의 송이는 전보다 사람다워졌다. 스스로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고 양치질을 하고 알아서 수건으로 손을 씻을 정도로 성장했다. 그렇다고 독립할 수준은 아니다. 아이 돌보는 행위를 헌신이라 부르든 희생이라 부르든, 모든 양육자에게는 아이가 무사히 독립할 때까지 함께할 의무가 있다. 부양은 ‘생활 능력이 없는 사람의 생활을 돌봄’을 뜻한다.


늘 나에게 깊은 영감을 주는 삼촌에게 여러 고민을 토로한 적이 있다. 1년의 육아휴직을 마치고 일터로 돌아간 뒤 육아와 일, 나의 행복과 부양의 의무 사이에서 균형을 못 잡고 갈팡질팡하던 때였다. 육아와 일, 어느 것에도 몰입하지 못해 삶의 질은 전반적으로 낮았다. 그는 지금 내 모습이 과거의 내가 내린 결정으로 인한 결과임을 짚었다.


“넌 결혼을 선택했고, 아이를 이 세상에 데려오기로 선택했어. 네가 그렇게 행동했다면, 이제 스스로의 행복에만 집중할 순 없어. 과거에 내린 결정들로 인해 지금의 의무와 책임이 생겼으니까.”


삼촌은 나에게 앞으로 가족 관점에서의 5년을 (재무적으로) 고려할 의무가 있고, 때때로 타협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대부분의 요즘 사람들은 자신에게 늘 행복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유감스럽지만 사실이 아냐. (…) 세상은 네게 빚진 게 없거든. 인생은 타협으로 가득 차 있고 때론 그 타협이 네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어.”


뒤늦게 맞추는 퍼즐 조각들

부모가 되는 경험이 마냥 우울하거나 힘든 것만은 아니다. 유년 시절에 들은 말, 10~20대 때 스치듯 지나간 장면의 의미를 뒤늦게야 알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인생을 4,000조각으로 흩어진 비정규형 퍼즐에 비유한다면, 가운데 빈칸으로 있던 영역을 이제야 맞춘 느낌이랄까. 그렇다고 퍼즐의 전체 그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긴 어렵겠지만(인생이란 처음부터 아무것도 칠해져 있지 않은 상태의 퍼즐인지도 모르겠다), 삶의 여러 에피소드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걸 글로 풀어내기 좋아하는 나에게 소소한 기쁨이었다.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죽을 때까지 알지 못했을 기쁨이다.


예를 들면 이런 순간들이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2014년 1월 초, 안방에서 부모님과 마주 앉은 나는 1년 뒤 회사를 그만두고 모터사이클을 타고 장거리 여행을 떠날 거라고 선언했다. 당시 나의 태도는 승낙을 구하기보다 통보에 가까웠다. 엄마의 얼굴은 수심으로 가득해 처음에는 창백해졌다가 이내 어두워졌다. 그나마 아빠가 나의 결정을 지지한다고 했지만, 서로 의견이 다른 두 분은 나 때문에 그날 밤늦게까지 다투셨다.


자식이 생기니 10년 전 장면을 복기하게 된다. 입장을 바꿔 송이가 바이크 여행을 떠나겠다고 하면? 혹은 그게 무엇이든 내가 부모로서 반대하는 걸 선택한다고 하면? 어쨌든 송이의 결정을 응원하고 지지해야 할까? 부모가 된 이상 자식에게 쿨해질 수 없다는 걸 이제는 알겠다.


“너도 결혼하고 애 낳아봐라. 그래야 부모 마음 알지.” 이 말은 결혼하기 직전까지도 듣던 잔소리인데, 놀랍게도 진실이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거꾸로 나를 키웠을 부모 마음을 조금씩 헤아리고 있다. 결과적으로 나는 모터사이클 여행을 무사히 마쳤고, 바이크는 결혼 후 중고로 팔았다.


다른 하나는 드라이 마티니에 관한 에피소드다. 시계를 더 돌려 2007년의 늦가을 뉴욕. 군 제대 후, 맨해튼에 있는 삼촌 집에서 두 달가량 머무르며 한량처럼 지냈다. 어느 날 퇴근하고 돌아온 삼촌은 나에게 드라이 마티니 만드는 법을 알려줬다. 한창 설명하던 그는 자신이 밤늦게 퇴근한 밤에는 이걸 한 잔씩 만들고 다시 개수대에 버리곤 했다고 말했다. 당시 20대 중반인 내게는 그 장면이 미스터리였다. 삼촌은 왜 마시지도 않을 칵테일을 만들었을까? 잔에 담긴 올리브 가니쉬는?


아이가 두 돌을 넘긴 무렵의 어느 늦은 밤, 나 홀로 술을 찾는 경우가 잦아졌다. 주로 맥주 한 캔 또는 위스키를 넣은 하이볼. 복직 후 일과 육아, 아내의 사업, 대출금 등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느라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 날 출근하려면 얼른 자야 했고 독주가 필요했다. 문득 삼촌이 드라이 마티니를 만들던 밤이 떠올랐다. 돌이켜보면 그 무렵 숙모는 음악 레이블 사업을 하던 중*이었다. 그에게 다시 물었다.

* 숙모는 그 후 음반 사업을 접고 골드만삭스, 소시에테 제네랄을 거쳐 현재 모건 스탠리 컴플라이언스 조직의 Executive Director로 일하고 있다. 삼촌과 숙모 사이에는 세 명의 딸이 있다.


“그때 (드라이 마티니를) 만들기만 하고 마시지 않은 이유가 궁금해요. 다음 날 아침에 일찍 출근해야 하니까 버린 건가요?”

“아니, 마신 적도 많아.”


퍼즐은 15년 만에 맞출 수 있었다.


부모가 쓴 자식 이야기, 자식이 쓴 부모 이야기

부모의 자식 이야기, 자식의 부모 이야기 등 둘의 관계를 다룬 영화나 에세이 등에서 새로운 퍼즐 조각을 줍기도 한다. 처지가 비슷해 괜히 더 반갑고, 때론 예상치 못한 위안과 감동을 받기도 한다.

성우 배한성의 일생을 스트레스 테스트에 비유한 아티클에는 그의 맏딸이 아버지를 회상하는 대목이 나온다.


할머니가 편찮으신 날에는 아버지가 직접 내 도시락을 싸주셨다. 혹시라도 샐까 비닐랩에 두껍게 싸주신 반찬들을 하나씩 풀면서, 이른 아침 부엌 한편에서 익숙지 않은 손놀림으로 도시락을 준비했을 아버지를 생각하고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른다. 이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 성우 배한성의 맏딸 배지인의 칼럼 중 (조선일보, 1997년 12월 15일) 


배한성의 삶은 평탄치 않았다. 그의 자서전 <열정을 담은 천의 목소리, 배한성>에 따르면, 다섯 살 때 부친은 월북했고 40대 초반에는 배우자까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 상황에서도 배한성은 두 딸을 키워 독립시켰고, 한 가지 업에 머무르지 않고 여든에 가까운 지금까지도 다방면으로 일하고 있다. 그를 이렇게 움직이게 한 힘의 근원은 무엇일까? 그의 굴곡을 접할수록 삶 자체가 지닌 숭고한 에너지를 느낀다.


<아빠 구본형과 함께>는 28세에 아버지를 여읜 둘째 딸 구해언이 변화경영 사상가 구본형의 5주기를 기념하며 낸 책이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매우 개인적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출간한 이유에 대해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마다 아빠와 함께 보냈던 시간을 통해 답을 찾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책 후반부에는 그동안 구본형이 딸에게 보낸 편지들도 수록되어 있는데, 평소 그의 글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도 선물 같은 꼭지다. 이제 구본형은 나에게 작가뿐 아니라 아버지로서도 롤모델이다.

△ 부모의 자식 이야기, 자식의 부모 이야기 등 둘의 관계를 다룬 영화나 에세이 등에서 새로운 퍼즐 조각을 줍기도 한다. 

작가 임경선이 쓴 모녀 이야기 <엄마와 연애할 때>, 아이를 돌보는 일과 내 것을 만드는 일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돌봄과 작업>, 소설가 김애란의 첫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 밑미 육아일기 모임에서 만난 재원님이 내게 꼭 읽어보라며 선물한 <아빠의 어쩌면책>, 천문학자 칼 세이건과 작가 앤 드루얀의 딸 사샤 세이건이 쓴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 콜링 북스의 이지나 작가가 엄마에게 깊이 받은 사랑을 기록한 <로사리아의 선물> 등이 내 책장의 한 구역에 모여 있다. 긴 시간 동안 두고두고 음미하고 싶은 책들이다.


사랑받은 기억은 사람이 지나간 후에도 피어나고 자리를 잡아 또 다른 사랑을 틔운다. 그리고 기록하는 사람은 언젠가 자신이 남긴 기록을 통해 힘도 위로도 받는다.
— 이지나, <로사리아의 선물: 엄마를 그리며 써 내려간 이야기> (콜링 북스, 2024)


꿀렁꿀렁, 일과 육아가 건강하게 공존할 수 있을까

아파트 단지 안에서 포르쉐 한 대가 특유의 배기음을 내며 지나가고 있었다. 과속방지턱이 많은 구간이라 스포츠카는 고출력 엔진이 무색하게 가속을 충분히 하지 못한 채 이리저리 꿀렁꿀렁 대며 단지를 통과했다. 괜히 속도를 냈다가는 바닥면이 긁힐 게 뻔했다. 그 모습이 내 상황과 겹쳐 보였다.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가속할 때인가, 적당히 브레이크와 액셀러레이터를 번갈아 밝으면서 길을 최대한 부드럽게 통과할 때인가. 속도를 늦춘 김에 지금 가는 방향이 맞는지 다시 점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도로에서 차를 멈출 순 없으니 계속 이동은 해야 한다.


부모가 되면서 ‘일’에 대한 가치관도 변하고 있다. 전생의 내가 일하던 방식과 현생의 내가 일하는 방식이 같다면, 그 역시 이상하다. 전반부에서 출산과 육아가 지난 3년 동안 미친 영향을 적었다면, 이 글의 후반부에서는 일에 대한 요즘의 내 생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영감을 준 몇몇 장면이 있다.


음악가 정재일의 공연 <Listen>

2023년 말, 수현과 함께 세종문화회관을 찾았다. 아이가 태어난 뒤 오랜만에 앉은 객석은 그 분위기부터 황홀했다. 게다가 정재일의 단독 콘서트라니.


정재일은 클래식과 국악, 대중음악을 넘나드는, 국내에서도 독보적인 포지션의 음악가다. 나는 그가 2014년에 장민승 작가와 협업한 작품 <상림>을 통해 본격적인 팬이 되었다. 특히 그가 피아노를 칠 때 남기는 여음, 건반을 떠난 소리가 공기 중에 머물렀다가 내 마음으로 들어와 주는 울림을 좋아한다. 종종 그의 공연과 음반을 찾아 듣는 편이지만, 막상 개인사나 직업인으로서의 행보는 잘 몰랐다. 그저 미디어에서 수식하듯 ‘천재 음악가’로만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천재 음악가는 이날 연주와 연주 사이 곡에 대한 설명을 곁들이면서 이런 표현을 쓰곤 했다.


“제가 근본 없이 음악을 배워가지고… (중략) OOO에게 크나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정재일이 얼마나 겸손한지 말하려는 건 아니다. 뒤늦게 그의 커리어를 살폈다. 그는 1997년부터 음악인으로 활동을 시작했고(14살 때다), 1999년 프로젝트 그룹 긱스에 참여하며 데뷔했다. 햇수로 따지면 일한 지 27년이 지난 셈이다. 어린 나이에 데뷔한 사람이 어떻게 아직까지 일에 대한 초심을 유지할 수 있지?

△ 왼쪽: 정재일 콘서트  풍경 (사진 제공: 세종문화회관) / 오른쪽: 내가 가지고 있는 정재일의 음반들

그는 꾸준히 ‘음악’을 매개로 폭넓은 협업을 소화하며 점차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나름의 고충과 기복이 있었겠지만, 자신의 일터를 떠나지 않았고 전혀 다른 장르의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도움’을 구하거나 배우길 주저하지 않았다. 그 결과 <오징어게임> 사운드트랙, <기생충> 영화 음악처럼 세계적으로도 히트한 작품이 나왔다. 정재일은 스스로 근본 없이 음악을 배웠고, 주변 사람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고백했지만 나는 그가 무대와 백스테이지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파멸할 듯한 창작의 고통과 천재라는 찬사의 모순 같은 공존. 그 혼란에서 그가 실족하지 않게 자신을 지키는 방법은 세 가지(음주, 데드라인, 학습)다. (…) 세 번째 방법은 학습이다. 피나 바우슈의 공연을 본 이후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고 싶은 마음이 마비되지 않을 것’이 그의 인생 목표가 되지 않았는가. “사실은 마비되지 않는 삶을 살 자신이 없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있으면 가능성이 있는 것이니 항상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려는 마음이 살아 있으면 좋겠어요.”


“아름다움이란 대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는 이런 답을 이어갔다. “어떤 것을 경험했을 때 자신이 살아 있다고 느끼고 예전과는 다른 마음을 갖게 해주는 감정이 아름다움인 것 같아요. 보통 유년기에서 20대 초중반까지는 그런 감정을 잘 느끼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 마음이 닫히는 사람을 많이 봤어요. 이 마음이 마비되면 공식에 따라 결과물을 내놓는 ‘업자’가 될 테니 이것이 예술가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지점인 것 같아요.”
— 김민정 기자, 정재일 인터뷰 중 발췌 (<행복이가득한집>, 2015년 8월호)


그는 두 곡을 더 들려주며 공연을 마쳤다. 하나는 자신이 2010년 정규앨범 2집 때 발표한 곡 ‘주섬주섬’, 다른 하나는 샘플링한 김민기의 목소리와 더불어 피아노와 기타 연주로 완성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로비에 놓인 피아노와 공연 포스터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기다리던 팬들의 모습이 보였다. 어느 팬이 정재일에게 바라는 말이 귀에 맴돌았다. “오래오래 살아주세요. 술이랑 담배 하지 말고요.”


세계적인 투자 구루 하워드 막스의 메모 Sea Change

오크트리 캐피털 매니지먼트의 공동 창립자이자 공동 회장인 하워드 막스는 2022년 12월 13일, 자신의 투자자들에게 Sea Change*란 제목의 메모를 보냈다. 메모는 의미심장하게 시작한다.

* 우리말로 상전벽해, 거대한 변화를 뜻한다. 이 표현은 셰익스피어가 <템페스트> 1막 2장에서 처음 사용한 거란 의견이 있다.


제가 투자업계에서 몸담은 53년 동안 수많은 경기 순환, 진자 변동, 광풍과 패닉, 거품과 폭락을 보았지만, 진정한 상전벽해는 단 두 번밖에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세 번째 변화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 같습니다.
— 하워드 막스, Sea Change


1969년부터 투자업계에서 일해온 그가 관찰한 거대한 변화 2가지는 이렇다.


    리스크에 대한 투자자의 인식 변화: 리스크/수익률 개념을 수용하기 시작하면서 신용도가 낮은 투자부적격 회사채에 대한 투자가 등장  

    40여 년 동안 지속된 금리 인하: 1번과 더불어 금리가 내려가면서 투자 낙관론의 부활, 공격적 투자 수단을 활용한 수익 추구, 높은 증시 변동성  


이어지는 메모는 세 번째 거대한 변화가 어떻게 진행 중인지 설명하고 있다. 초저금리 시대가 저물면서 지난 수십 년 간 유효했던 공격적 투자 전략이 이제 통하지 않을 수 있으니, 확정 수익률을 보장한 채권 투자를 권장한다는 말이다. (그는 1년 뒤, 자신의 생각을 덧붙인 메모를 추가로 발행했다)


하워드 막스는 자신의 생각을 ‘메모’라고 부르지만, 그의 메모는 워런 버핏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기다려 읽을 정도의 높은 가치를 지닌다. 그의 메모를 읽으며 최소 50년은 일해야, 이 정도의 거대한 변화를 경험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전망을 글로 적을 수 있다고 느꼈다.


꾸준함과 일관성, 인내가 열정을 이긴다

어떤 일을 하든, 자신의 자리를 오래도록 지키며 산업, 시장, 씬에 있는 사람들을 다시 보게 된다. 정재일이나 하워드 막스처럼 반짝 빛나는 스타가 될 수는 없겠지만, 은하계의 구성원으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우주는 돌아간다. 그저 나이가 들어서도 현업에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일하는 동안 거대한 변화를 경험하고, 동료에게 도움을 받고, 생각을 글로 남길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강호준 부장은 17년 동안 근무했던 식품 기업을 나오며 자신의 일을 회고하는 세미나를 열었다. 그는 재직 시절, 고기리 막국수와 협업한 제품 사례를 언급하며 신제품 출시부터의 매출 추세를 대략적으로 그린 그래프를 보여줬다.

△ 초록집에서 진행한 강호준 부장의 세미나 중
고기리들기름막국수는 론칭 직후부터 매출이 계속 뛰었어요. 그래프가 올라가는 거 보이시죠? 자, 이 꼭짓점이 어쩌면 제 몸값을 높여 이직하기 좋은 때였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떠나지 않았어요. 오래도록 함께 준비한 프로젝트인데 끝을 봐야죠. 보시다시피 신제품 효과가 꺼지면서 매출이 떨어졌고, 그 뒤로도 매출을 올리기 위해 다양한 시도들을 했어요. 제품도 미세하게 계속 개선했고요. (…) 만약 제가 당장의 커리어만 신경 쓰고 이직했다면, 뒷부분의 그림을 전혀 몰랐을 겁니다.
— 강호준 부장, 프라이빗 세미나 중


나도 이 제품이 출시되던 때를 기억한다. 그 뒤에도 제품을 알리려는 활동들을 보며 F&B 시장에서 강 부장의 존재를 다시 인식했던 것 같다. ‘이렇게 일하는 사람도 있구나’라는 발견은 다른 산업에 있는 사람에게도 좋은 자극이 됐다. “짠, 하고 모든 일이 끝나진 않아요. 차근차근 전개해 나가는 게 중요해요.” 강 부장이 덧붙였다.


전 직장에서 만난 하대웅 님은 내부 구성원에게도 존경받는 리더였다. 리더십에 관한 그의 사내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메모한 내용 중 아래 문장들을 여기에 옮긴다.


Passion < Perseverance

Some losers seem passionate too.


그는 시스템이 목표를 이기고, 인내가 열정을 이긴다고 말했다. 그러니 장기적 관점에서 기댓값을 잘 설정하고 인내할 것을 강조했다. 누군가 뛰어난 리더는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고, 대웅님은 “뛰어난 건 별 게 없고, 오히려 꾸준히 (리더 역할을) 하는 게 어렵다”고 답했다.

△ 하대웅 님의 사내 강연 메모

일과 육아가 건강하게 공존할 수 있을까. 이 고민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블로그에도 쓴 적이 있지만 일과 육아, 그냥 둘 다 하면 된다. 산업과 시장을 떠나기엔 내가 일해온 경험은 아직 너무 미천하다.


“Her team”

수현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2022년 4월 사업자를 냈고, 5월 레디투킥을 론칭했다. (아내가 사업을 한다는 것에 대해 따로 쓸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배우자로서 지켜본 수현의 학습력과 실행 속도는 놀라운 수준이었다.

△ 레디투킥은 운동을 모티브로 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다. (사진 제공: 레디투킥)
브랜드 준비를 위해 아이템을 찾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퇴사를 한 후 지난 2년간의 커리어, 재능, 자원 등을 노트에 정리했을 때 유난히 눈에 띄었던 것이 수영이었다. 수영할 때만큼은 항상 행복했고 나이를 먹어도 꾸준히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 백가경 에디터, ‘유영하듯 즐겁게 독립하기’ 중 (인터뷰 미디어 디퍼 differ)


아이가 온전히 크기 위해 24시간 양육자의 돌봄이 필요하듯, 사업체도 성장하려면 자원을 수시로 투입해야 한다. 복직 후 나의 경제활동은 가계대출을 갚는 데 주로 쓰였고, 수현의 퇴직금은 사업 초기 운전자금*이 됐다. 돈이 금세 부족해진 우리는 새로운 대출을 받았다.

* 회사나 공장에서 임금을 지불하거나 원료를 구입하는 경우 등에 필요한 자금


어쩌다 맞벌이 부모가 동시에 바쁜데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상황을 탓했다. 간혹 송이의 조부모님들께서 우리 대신 송이를 돌봐주셔서 너무 감사했지만 미안하고 찜찜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정작 아이를 낳은 부모는 계속 일해야 하고, 조부모님까지 출동해야 하는 상황이 괜찮은 걸까. 때론 이런 고민도 사치인가 싶어 ‘일단 감사히 생각하고 내 할 일부터 하자’는 식으로 전환했지만 좀 더 고민해 볼 문제다.


2020년부터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과 이미지를 찬찬히 읽어봤다. (...) 중요한 건, 그동안 내가 일하면서 이룬 대부분의 성취에는 아내의 헌신과 지지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숨 쉬듯 반복되는 마감을 맞추고자 내가 글을 쓸 수 있도록 배려해 준다든지, 책이 나온 뒤 포장을 함께 해주는 등 아내는 곳곳에서 나를 도왔다. 정작 내가 육아휴직을 하면서는 스스로 벌인 사이드 프로젝트 때문에, 역할 교대를 제대로 못했다. 자신의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아내만으로도 바쁜데, 그 와중에 나도 뭔가를 하겠다고 발버둥 치느라 부부 사이에 마찰이 종종 생겼다.
— 2022년 12월 23일 일기 중


아내는 사업 중, 아이는 겨우 세 살. 그럼에도 ‘내 커리어가 그리 중요한가’란 마음과 ‘한창 일할 땐데 그래도 더 벌어야지’란 마음은 의외로 자주 충돌한다. 이런 미래를 일찍이 예감했던 걸까. 삼촌의 또 다른 명언이 떠올랐다. 그는 2020년 5월, (그러니까 아이가 생기기도 전에) 커리어 조언을 구하던 나에게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고 답했다. 두고두고 새길 우문현답이다. 삼촌은 부부로서의 팀워크에 더 신경 쓰라는 조언을 덧붙였다.


“전략적으로 생각하고 부부로서 함께 결정하렴. 수현이 더 성장하면, 너는 아내의 팀원이 되어야 해. (…) 남자들은 대체로 자신의 경력이나 결정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어. 현실은 네가 어떤 이유로 인해 결혼을 했고, 너희가 한 팀이라는 거지. 네가 돈을 더 많이 번다는 사실은 장기적으로는 별로 상관없는 일이야. 너희 부부와 자녀는 언젠가 팀으로 움직일 거거든.”


인생의 오전과 오후

지난해 생일 때 ‘열 흘 뒤에 죽는다면, 나는 무얼 할까?’란 질문의 답을 곰곰이 생각한 적이 있다. 삶의 유한함을 인식했더니 내겐 사랑이 남았다. 지금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사랑을 나누고 표현하자는 다짐이 절로 들었다.


다시 한 해가 흘렀다. 여전히 죽음이 와닿지는 않지만, 끝을 향해 차근차근 가고 있다는 사실에는 의심이 없다. 마흔 즈음의 내가 감히 정의하는 인생은 ‘자아’라는 껍질을 깨고 먼 길을 떠났다가 다시 그 껍질로 귀환하는 여정이다. 여정에서 잠시 방향을 잃거나, 짐이 무거울 때마다 사랑은 중요한 연료가 된다.


인생의 오전에는 나를 지나칠 정도로 사랑해야 한다. 제아무리 나를 낳거나 길러준 부모라 해도,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부터 나를 믿어야, 내재된 어느 하나라도 발현될 수 있다. 이는 A24가 제작한 넷플릭스 드라마 <성난 사람들 Beef>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극 중 에이미와 대니는 무조건적인(unconditional) 사랑을 갈구하지만, 현실은 배신과 배반의 연속이다. 심지어 에이미는 자신의 딸조차 초콜릿을 주거나, 젤리를 주는 등 조건을 달아야만 “엄마, 사랑해”라는 말이 나왔음을 깨닫고선 쓴 미소를 짓는다.
인생의 오후에는 정반대의 태도가 필요하다. ‘내가 뭐라고’라고 생각하며 에고를 다그치는 게 오히려 낫다고 본다. 먼저 내어주고 양보하자. 이때의 자의식 과잉은 쓸모가 없다. 나보다 더 어리거나 경험이 적은 상대일수록 경청하고 수용할 필요가 있다. 머지않아 그들이 새로운 시대를 이끌 것이다.
인생을 마무리할 무렵에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스스로와 화해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는 내면의 자아와 건강하게 헤어지는 수순도 필요할 것이다. 그래야 자유로워질 수 있다.
— 개인 메모 중


예전에 써 놓은 메모를 보니, 인생의 오전을 보내고 있을 송이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더 베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건 없는 사랑을 전폭적으로 받아 본 경험이 있어야 송이도 자신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받아 본 경험이 있어야 베풀 수 있다.


미국 작가 게리 채프먼이 쓴 <5가지 사랑의 언어 The Five Love Languages>에 따르면, 사랑을 표현하고 경험하는 다섯 가지 방법은 아래와 같다고 한다.


    인정하는 말(Words of Affirmation)  

    함께하는 시간(Quality Time)  

    선물(Receiving Gifts)  

    봉사(Acts of Service)  

    스킨십(Physical Touch)  


구체적인 방법까지 알았으니 이제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일만 남았다.


주섬주섬, 길을 다시 걸어본다

새벽에 깨어난 송이가, 또는 아침에 일어난 송이가 자기 방문을 열고 나설 때의 모습을 기억한다. 부스스한 머리로 인상을 반쯤 찌푸린 채 가느다란 눈을 뜨고는 거실로 나온다. 주섬주섬 한 손에는 곰인형을, 다른 손에는 사슴 모양의 애착 인형을 안고. 나는 그런 송이를 안아준다. 송이도 나를 안아준다.


주섬주섬  

    여기저기 널려 있는 물건을 하나하나 주워 거두는 모양. (책을 주섬주섬 가방에 챙겨 넣다)  

    조리에 맞지 아니하게 이 말 저 말 하는 모양. (주섬주섬 변명을 늘어놓다)  


송이가 매일 깨어나 마주하는 세계가 당분간은 나의 세계다. 그 세계에도 일터와 삶터라는 코트가 있다. 비록 플레이하다가 실수하더라도, 코트를 함부로 떠나진 않겠다고 다짐해 본다. 아내와 송이와 이미 한 팀이 되었으니, 필요하다면 벤치를 지키거나 볼보이 역할을 해도 충분할 것이다.


“자연은 기다려주지 않아.” 지난 주말, 남양주시에 있는 친구네 친정집에 놀러 갔을 때, 친구 어머님께서 해주신 말씀이다. 자세한 맥락은 기억나지 않지만, 모든 게 정신없이 흐르는 서울살이와 달리 절기 하나하나를 풍성히 느낄 수 있는 남양주 시골살이에서 느낀 바를 언급하셨던 것 같다.
나이가 든다는 신호일까. 육아를 하면서 ‘시간’ 개념에 더 집착하게 된다. 2022년 연말의 내게는 총 3개의 시간이 있다. 수현의 시간, 나의 시간, 그리고 송이의 시간. 우리는 같은 시계를 들고 사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실은 그 중력이 다르다. 아마도 중력이 가장 큰 송이의 시간이 가장 느리게, 대신 밀도 높게 흐르고 있지 않을까.
— 2022년 12월 23일 일기 중


자연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송이도 나를 기다려주지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가 지난 2020년부터 2023년까지, ‘육아를 통해 새 삶을 발견하거나 어려움을 깨닫는 이야기’다. 감사하게도 내가 발견한 새 삶은 아직까지는 살아볼 만한 것 같다. 앞으로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시련이 있겠지만, 적어도 이 아름다운 시절이 삶을 계속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 되어줄 것이다. 나아가 ‘살아볼 만하다’고 말할 수 있는 배경에는 우리 가족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고 배려해 주신 분들이 많다. 이분들께 정말 감사하다.


“공을 칠 때 몸의 무게중심이 살짝 앞으로 이동하면서 자연스럽게 발끝이 들려야 해요. 뒤로 도망치지 마세요.”


테니스 레슨을 받을 때 코치가 자주 했던 말이다. 전생을 그리워하거나 뒤로 물러설 시간이 없다. 주섬주섬, 새 삶의 짐을 챙겨 2024년을 걸어본다. 매일 아침, 아이가 하루를 시작하는 것처럼.          


 손현 (2024.7.12.)

- 커버 이미지는 데이비드 호크니의 그림 일부 (David Hockney's watercolour portrait of Lucian Freud and his studio assistant David Dawson)

-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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