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로움은 나이를 제대로 들고 있다는 증거

by 늘보

아침을 먹고 남편과 식탁에 앉아서 후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다. 남편이 빵을 먹다가 바닥에 쨈을 흘렸다. 순간 나를 쳐다보았다. 둘이 웃음이 빵 터졌다.


“치우면 되지 왜 나를 봐?”


평상시 뭔가를 흘리면 구박을 하는 내 모습이 그려졌다. 그런 나에게 익숙해진 아이들과 남편도 본능적으로 엄마의 반응을 확인하는 모습이 미안하기도 했고 민망했다. 하루 종일 치워도 하루가 부족한 로봇 같은 일상이 나를 지치게 했다. 아무리 무한 반복을 해도 표시가 나지 않는 일이 집안일이 아니던가. 하지만 세월이 흘러가면서 날이 선 나의 잔소리도 조금씩 무뎌간다. 아마도 로봇청소기를 집에 들여놓고부터 조금씩 마음의 여유를 찾은 것 같다. 청소에 대한 여유의 창을 하나 만들었다고나 할까.


여전히 먹다가 흘리면 나를 쳐다보는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하는 대신

“엄마 쳐다보지 말고 흘렸으면 치우면 돼.”

라고 말을 한다.


다른 사람들은 애가 좀 흘리면 어때라고 하겠지만 흘린 것을 바로 바로 치우는 데는 나름 이유가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흘린 것을 밟고 온 집안을 돌아다닌다. 침대며 노는 곳이며. 그렇다고 쫓아다니면서 치우기도 벅차고 아이의 흔적을 추적할 수도 없다. 그래서 바로 바로 치우는 것이 답이라는 것을 육아하면서 터득한 모든 엄마들의 지혜일 것이다. 되도록이면 한 자리에서 먹고 흘린 것은 그 자리에서 치우자가 우리 집의 규칙이다. 그래도 귤을 까 먹으면서 치킨을 먹으면서 텔레비전을 보는 재미까지는 나도 뭐라고 할 수는 없다.


아주 사소한 것이지만 조금씩 내 마음에도 ‘여유’라는 사치의 방이 생기기 시작한다. 아이를 낳고 나서,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면서 나도 유연해 진다.


知止而后有定 定而后能靜 靜而后能安 安而后能慮 慮而后能得
(지지이후유정 정이후능정 정이후능안 안이후능려 려이후능득)

“멈출 것을 안 다음에야 정해지는 것이 있고, 정해진 후에야 마음이 고요해질 수 있고,

고요해진 후에야 편안해질 수 있고, 편안해진 후에야 생각할 수 있으며,

생각한 후에야 얻을 수 있다.”

<대학 경1장> - 다산의 마지막 공부 중에서


<다산의 마지막 공부>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구체적으로 풀어 놓으니 곱씹으면서 음미 하게 된다. 멈춰야 하는 것을 멈춰야 할 때를 아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났지만 멈춰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말을 할 수 있을 때는 마음의 여유가 찾아와야 나의 화를 평정할 수가 있는 것 같다.


아침에 학교에 급하게 나가느라 입다가 벗어 던져놓은 옷가지들, 어제 밤에 놀다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레고 조각들, 남편이 컴퓨터 앞에서 먹고 난 후 치우지 않은 음식물과 딱딱하게 굳어버린 커피가 담긴 컵. 남편 출근 후 방에서 나와서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보고 머리 끝까지 화가 나지만 마음을 다스린다. 바쁜 아침이니까 다 나간 다음에 처리하자! 아침에는 되도록이면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기분 좋게 아이들을 보내자가 나의 다짐이다. 이런 부분도 시간이 흘러가면서 나에게 주어진 '여유' 다.


서른이 되어갈 때 앞으로 잘 살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30'이라는 숫자를 넘을 때 한 번 철이라는 것이 들었던 것 같다. 마흔이라는 '40' 숫자가 다가오면서는 조급해졌다. 앞으로 몇 년을 살지도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장염이나 감기처럼 흔한 병은 걸렸어도 하루 이틀이면 털고 일어났던 몸이 일주일을 앓아도 털어내기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몇 살까지 살지는 모르지만 인생의 절반을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나는 나이를 잘 들어가고 있는 건가. '40'이라는 숫자 앞에 '30'이라는 숫자보다 무거운 책임감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커졌다. 이제 앞으로 남은 날은 좋은 일도 있지만 하나씩 지워져 가는 일이 더 많을 테니까.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세월이 붙잡을 겨를 없이 흘러가는 것도 가혹한데 몸과 감각들 마저도 둔해져 가다니. 그래도 다행인 것은 마음만은 너그러워지고 더 넓어진다는 사실이다. 어떤 일에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차분하게 생각을 먼저 한다. 흥분한 아이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마음의 방이 하나 더 생겼다.


나이 들어 감은 이런 것이 아닐까.

진짜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

여유롭게 멀리 내다볼 수 있는 힘.


오늘도 차분히 마음을 다스려 본다.

keyword
이전 19화내 삶의 치열을 느끼게 해 준다 여행 바로 그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