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은 자신의 삶 한가운데 있다

위로 수집: <딸에 대하여>

by haley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는 게 어떻겠냐는 이야기였다.

첫째는 출가외인이 되었고 둘째와 셋째도 성인이 되어 제 용돈쯤은 직접 벌고 있지만, 아직 청소년 딸의 학부모인 엄마에게 앞으로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불현듯 찾아온 듯했다. 나라에서 공짜로 공부를 시켜준다는데 요양보호사 자격을 딸까 말까 하는 말에서 어쩐지 여러 감정이 느껴졌다.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말이야. 과연 내가 이 나이에 공부할 수 있을까?’라고 묻는 듯한 목소리에, 나는 나의 역할을 눈치챘다. 그리고 주저 없이 말했다. “엄마, 해봐! 일단 다 해보는 거지!” 그러자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그래. 내가 앞으로 살 날 중에 오늘이 제일 젊은 날일 텐데!” 딸의 직감으로, 엄마가 이 문장을 마음속으로 수십 번 되뇌었으리라는 것쯤은 안다. 무엇에든 조심스럽고 세심하며 만에 하나까지 다 고려하는 성격 상, 그 문장은 여러 달 동안 엄마의 머릿속을 배회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떠돌아다니던 마음이 밖으로 나오기 위한 트리거로, 조금은 철 없이 밀어붙이는 20대 딸의 한 마디가 필요했을 것이다.



전화 통화 이후, 나는 때때로 엄마의 머릿속에서 유영하고 있을 그 문장을 생각한다. “내가 앞으로 살 날 중에 오늘이 제일 젊은 날일 텐데” 그리고 현재 내가 가진 객관적인 젊음과 함께, 엄마의 오늘일 주관적인 젊음에 대해 생각한다. 아직 객관적으로 젊은 나에 비해, 이제는 자신에 대해서 주관적인 젊음을 생각해야만 하는 엄마는 한 걸음을 옮기는 것이 쉽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가끔 엄마에게 잔소리를 퍼부어 댈 때가 있다. 도대체 왜 그렇게 하냐며 건방지게 따져 물을 때가 있다. 납득이 가지 않는 행동이라고, 왜 한 치 앞 밖에 못 보며 사냐고 답답해서 있는 말 없는 말 다 꺼낼 때가 있다. 그때 엄마는 내 눈치를 본다. 전에는 서로 언성을 높였던 것 같은데, 이제는 나만 언성을 높이고 있다. 엄마에게 득이 되지 않으니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두라고 폭풍 잔소리를 하고 온 다음 날, 업무 시간에 전화가 왔다. 엄마가 생각해봤는데 그래도 그냥 계속하고 싶어-라고 조곤조곤 말하는 엄마에게 알아서 하시라고 말하고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 문득 내가 왜 엄마에게 꼰대 짓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하든 엄마의 삶이고 엄마의 마음인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하세요 마세요 하고 있는 걸까. 전화를 끝내고 책상에 앉았을 때,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내가 앞으로 살 날 중에 오늘이 제일 젊은 날일 텐데” 엄마가 나에게 남긴 한 마디를 곱씹으며 오후 업무를 끝냈다.



사람이 입체적인 존재라는 것을 나에게 가르쳐 준 사람은 엄마였다. 대학교 3학년이 끝나가던 무렵, 목사님이라는 사람이 우리 학교를 개인 소유로 만들어 버리려고 해-라며 불같이 화낸 적이 있다. 도대체 목사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돈을 좋아할 수가 있어? 그렇게나 많이 가지고도 만족이 안될까? 부끄럽지도 않나? 신학교가 왜 신학교야? 그런 식으로 운영해도 되는 거야? 내 말을 듣고 있던 엄마는 그때도 딱 한 마디를 남겼다. “나이가 들면 그럴 수 있어.”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이가 들었다고 다 그러면 온 세상 사람이 그래야지. 나이 들어서도 그러고 있는 게 자랑이야? 나이가 들었으면 더 어른다워야지. 20대 애들이랑 싸우고나 있는 게 말이 돼? 내가 하는 온갖 이야기들을 엄마는 묵묵히 들었다.

전혀 납득이 안 갔던 그날의 일방적인 대화가 지금까지도 내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은 엄마의 한 마디 때문이었다. 나이가 들면 그럴 수 있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일까. 그 얘기를 하던 엄마의 표정, 말투와 함께 그 말은 내 마음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김혜진 작가의 소설 <딸에 대하여>는 성소수자인 딸을 둔 엄마의 시각에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딸과 엄마는 서로를 좀처럼 이해할 수 없다. 이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소설을 읽는 내내 이해하고 싶어도 이해할 수 없는 마음으로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딸과 그의 연인이 자신의 집으로 함께 들어오면서, 그 애들을 보는 엄마의 심경을 읽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그동안 내가 이해하고자 노력해도 절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많은 사람들이 스쳐갔다. 돈과 명예에 목숨을 걸고 어떻게든 총장이 되려던 그 목사님, 효율성이 중요한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우리 엄마. 그리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 그들을 떠올리며 읽던 책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나와 마주 앉은 그 애들이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는다. 손을 뻗으면 언제나 닿을 수 있는 거리. 그러나 나는 이 애들이 나로부터 얼마나 먼 곳에 어떤 모습으로, 어디를 딛고 서 있는지 알지 못했던 게 틀림없다. 그리고 이제 모든 것이 뚜렷해진다. 이 애들은 삶 한가운데에 있다. 환상도 꿈도 아닌 단단한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다. 내가 그런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p.149 (김혜진, <딸에 대하여>)


삶 한가운데에 있다, 라는 문장에서 처음에는 이해받지 못해 고통스러운 많은 사람들을 생각했다가 불현듯 엄마를 생각한다. 사람은, 삶은 참 입체적이어서 나이가 들수록 시시각각 달라진다는 것을 알려준 엄마. 어쩌면 늘 강하고 늘 똑똑하고 늘 이성적인 엄마의 모습은 내 환상과 꿈일 수도 있겠다, 돈과 명예를 초월해 존경받을만한 목사님의 모습 또한 내 환상일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들이 스쳐간다. 그들에게 화를 내고 모진 말을 하고 조롱하고 비판하고 더욱이 그들을 바꾸려던 내 모습이 처음부터 잘못됐던 것은 아니었을까. 처음부터 그들은 내가 바꿀 수 없는, 단단한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삶이 아니었을까. 나이 들어가며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삶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이가 들면 그럴 수 있다”는 말도, “내가 앞으로 살 날 중에 오늘이 제일 젊은 날일 텐데”라는 말도 나에게는 한 사람의 입체적인 삶을 생각하게 한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하는 저 사람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가는 저 사람도, 자신의 삶 한가운데서 오늘이 가장 젊은 날임을 기억하며 애쓰고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총장이 되려던 목사님은 결국 반짝 학교에 입성했다가 물러나며 그 꿈을 이루지 못했고(그래도 정의가 살아있다고 외치고 싶은 대목이지만 단지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을 뿐 그는 여전히, 좋게 말해 돈과 명예를 향해 가고 있다), 엄마는 코로나로 인해 시험 날짜가 미뤄지는 상황에 힘들어하면서도 결국 자격증을 따냈다. 어쨌든 시간은 부산스럽게 지나갔고 모두가 또 단단한 땅에 발을 내딛고 있다. 그 방향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누구도 논할 수 없다. 시간 단위마다 사람은 변하고, 더 입체적인 모습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불의의 아이콘이 되기도 했다가, 누군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따듯한 사람이 된다. 그러니 나는 더 이상 혼란스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화가 나는 상황에서는 그냥 화를 내기로 했다. 그러다 그 사람의 입체적인 삶이 내 눈에 들어왔을 때는 그를 이해하기로 했다.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나조차도. 그냥 그러기로 했다.


오늘의 위로는 <딸에 대하여>다. 앞으로 내 삶을 스쳐갈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삶에 한가운데 있음을 기억하길 바라며 나에게 보내는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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