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친구가 없는가

가을 조아름 2019 두 번째

by 피츠로이 Fitzroy


하호를 스무 살 이전에 만났다면 나는 하호와 좋은 친구가 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초등학교 때 사귀었던 친구들은 중학생이 되자 담배 자판기에서 뽑은 담배를 주머니에 찔러 넣고 PC방에 가서 모르는 상대와 대화를 하며 담배를 피웠다. 나는 친구들과 멀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에는 나만 바라보고 있는 엄마가 있었기 때문에. 공부만 잘하면 당신 인생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그녀를 외면할 수 없었다.

내가 중학교 때 사귀었던 친구들은 나를 위해 편지도 자주 써주고, 맛있는 선키스트 맛 사탕도 사주곤 했는데 나는 그들에게 소홀했다. 그때의 나는 친구보다 다른 것들에 더 마음을 빼앗겼다. 영화가 좋고, MTV와 팝송이 좋고, 새벽까지 듣는 라디오가 친구보다 좋았다. 아무것도 안 하고 생각만 하는 시간들이 좋았다. 친구들은 나에게 주기만 하다가, 나에겐 아무것도 받지 못한 채 어느샌가 떠나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때 사귀었던 친구들은, 나에 대해 잘 몰랐다. 내쪽에서 전혀 마음을 열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나는 자신이 싫었다. 공부도 어중간하고, 외모도 어중간하고, 인기도 어중간하고, 성격도 어중간 한 나 자신을 경멸하고 있었다.
공부 잘하고, 잘 놀고, 인기 있는 애들과 친구 하고 싶었는데, 그런 친구들은 나랑 놀아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친구 만들기를 관뒀다.
혼자 있는 시간이 늘자, 조용하고 잘 웃고 착한 애라는 원치 않는 타이틀이 붙었다.
“넌 왜 그렇게 착해? 왜 맨날 웃어? 또 웃어봐.” 수업시간에 갑자기 내 앞에 앉은 애가 돌아보며 말했다. 자신이 착하다고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더 착한 애가 되어야 할 것 같았다.

하호는 아무런 준비 없이 앉아 있던 나의 옆구리를 훅 치고 들어왔다. 친구로 채워졌으면 더 행복했을, 오랫동안 비어있던 내 갈비뼈 5번째 자리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되는 내내 바로 옆에 앉아 잠시도 가만히 못 있고 부스럭거리더니, 펜이 없던 내게 펜을 빌려 줄 수 없겠다고 정색하며 말하곤 허락도 없이 내 안에 안착했다.

하호는 나와 전혀 다른 성격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나를 조용하고 착하고 웃는 애로 훈련시켜 놓았기 때문에 대학에 가서도 쉽사리 그 울타리 안에서 나오지 못했다.
하호는 유쾌하고 똑 부러지고 인기가 많았고 내가 친해지고 싶어 했던 그런 부류의 아이였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나까지 밝고 에너지 넘치고 사람들과 쉽게 어울릴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것 같았다. 고맙게도 하호는 어딜 가든 나를 데리고 다녔고, 뜬금없이 나에게 “넌 왜 착해? 한 번 웃어봐.”라고 말하지 않았다.
자기가 무슨 내 보호자라도 되는 것처럼 날 보살폈는데, 쉬는 시간에 건물을 넘어 나를 찾아와 사이다를 같이 마셔주기도 하고, 연애에 괴로워하고 있는 나를 위해 앞장서서 싸워줬다. 엄마 만나러 가는 길의 비포장도로를 맨발로 같이 걸어줬다.
남들에겐 가끔 얄짤없는 모습도 보였지만 나에겐 한없이 너그러웠다. 뭐가 이렇게 다 용서가 되냐.
하호 앞에서 만큼은 나의 본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고, 내가 욕도 한다는 사실을 남들이 믿어주지 않는 것에 그녀는 분통해했다.

대학 졸업 후 하호와 함께 살았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착한 체하지 않아도 되는 인간이 되었다. 하호가 나를 꺼내 준 것이다.
하호는 내가 호주로 떠나도 또 일본으로 떠나도 언제든 이 집으로 돌아와도 된다고 했고, 남자 친구 집에서 쫓겨났을 때도 구겨져 있던 나에게 얼른 들어오라 했다. 아니 뭐가 이렇게 항상 따뜻하냐.

우리는 각자의 회사를 다니고 각자 연애를 했지만, 무수히 많은 밥을 같은 상에서 나눠 먹고,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잠자리에서 나눈 덕분인지, 드디어 하호와 내가 비슷한 부분이 생겨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건 기쁜 일이었다. 나와 정반대라고 생각했던 하호였는데. 하호가 좋아하는 음악이 나도 좋고, 하호가 읽는 책이 나도 좋았으며, 하호가 추천해준 영화는 나도 정말 좋았다. 그녀는 좋아하는 것을 함께할 수 있는 친구인 동시에, 나의 유일한 조언자이며, 삶의 길잡이였다.

나는 더 이상 하호와 살지 않고 남편과 살지만, 물리적 거리 또한 멀어져 하호와 더 친한 것 같은 아무개를 질투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17년간 하호와 나 사이에 있었던 진-한 그 무엇이 우리를 아직도 이렇게 애틋하게 한다.
하호는 아직도 나를 애처롭게 생각해주고 품어주고 싶은 존재로 여기는 것 같고, 나는 하호를 내 보호자처럼, 인생의 멘토처럼 여기며 마음이 힘들고 눈물 나는 일이 생길 때마다 찾아가곤 한다.

하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면 새빨간 거짓말이고, 하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살아야 할 의미가 줄어드는 것과 마찬가지라 말할 수 있으므로, 나는 하호의 수술을 앞둔 이 시점에서 그녀에게 씩씩해야 하는 거라고 강요하고 싶다. 지고 오는 거 아니라고. 수술 잘하고 오는 거라고.
큰 수술이든 작은 수술이든 병원 침대에 누워 몸에 바늘이 찔러진 채, 동의서에 사인을 하라고 자꾸 뭔가를 들고 들어오면, 에너지 넘치는 어떤 건강한 이도 저절로 마음이 우그러지니 그 이상한 슬픔을 하호도 잘 견뎌내라고, 다 지나간다고 말해주고 싶다.

하호를 스무 살에 만났다. 특유의 소심한 성격 탓에 하호에게 자주 연락해주지 못했던 게 항상 미안함으로 남아있다. 내가 하나 잘한다고 겨우 말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글 쓰는 일이다. 하호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 과거에도 몇 번 썼고, 지금도 휘릭 몰아쳐 써내려 왔지만, 앞으로도 계속 하호에 대해 쓰고 싶다. 정성을 들이고 시간을 들여 내가 좋아하는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만들고, 남기고 싶다. (그리고 또 글 쓰는데 남다른 재주가 있는 하호가 언젠가 나에 대한 글을 써주지 않을까 몰래 기대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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