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조아름 2019 세 번째
파랑은 차가운 색으로 알았다. 그런데 파란색이 가장 따뜻한 색이라고 말한 영화가 있다. 물론 프랑스어의 원제는 달랐지만 영어와 한국어로 단 제목이 그랬다. 실은 영화를 두 번이나 봤지만 제목의 뜻 같은 건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오늘 유튜브에서 오랜만에 영화 삽입곡 ‘I follow rivers’를 들으며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는데, 파랑이 정말이지 따뜻한 색이었구나, 아니 뜨거운 색일지도 모르겠구나, 갑자기 깨닫고 말았다. 제목을 그렇게 달았던 이유에도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나는 파란 머리를 하고, 파란 눈동자를 가진 엠마에게 뜨겁게 반했다. 그녀의 짧은 머리, 무심한 눈빛, 흘리는 웃음에 맥없이 빠져들었다.
나에게 파랑은 무엇이었지. 파랑은 출렁이는 바다의 색, 파랑은 태극기에서 빨강 밑의 색, 파랑은 남자아이가 태어날 때 준비하는 옷의 색. 그 정도였다, 파랑은. 그런데 잠깐, 그러고 보니 파랑은, 내가 중학교 때 남몰래 좋아했던, 남몰래 너. 무. 좋아했던 선생님의 눈동자 색. 영어를 가르쳐 주던 선생님의 푸르디푸른 눈동자 색이다. 이제야 생각났다.
나는 처음에 그를 보고 내 눈을 의심하고 이어서 그의 눈을 의심했다. 한국 사람이 어째서 저렇게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건가. 그는 혼혈인가, 기형인가, 아니면 그저 파란 렌즈를 낀 건가 궁금했고, 너무 알고 싶었지만 어디에도 물을 수 없었다. 선생님이 파란 눈동자에 검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에게 관심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파란 눈동자와 너무 잘 어울리는 새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하얀 분필을 집어 칠판 위에서 미끄러지듯 영어를 써내려 가는데 이유 없이 가슴이 쿵쾅거렸다. 남자가 쓸데없이 손이 왜 저렇게 예뻐.
나는 어떻게 하면 선생님의 눈에 띌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수줍음 많고 소심한 중학생은 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았다. 주로 상상을 통해 선생님과 부적절하지만 애틋한 관계에 놓인 상황을 만들어 보곤 했다. 수업이 모두 끝나고 다 돌아간 교실에 혼자 남아 있는데 갑자기 선생님이 들어오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기도 하고(10가지 정도의 다른 패턴이 있다), 학교 앞 은행에 가는 중에도, 저 은행에 선생님이 볼일을 보러 와 있고 우연히 나와 마주치는 상황을 그리며, 어떤 말을 할까 입으로 소리 내어 말해보기도 했다. 안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고 생각만 하는 시간이 좋던 그때의 나는, 더욱더 혼자만의 시간을 아껴가며 공상에 빠졌다.
내가 아무리 예습을 해 가고 영어 공부에 열중해도, 알파벳을 더 예쁘게 쓰는 내 앞줄에 앉은 애가 특급 칭찬을 받거나, 나보다 교과서 13과 본문을 더 잘 외워온 내 뒷번호의 애가 선생님이 머리통을 쓰다듬어 준 것에 크게 기뻐하는 모습 같은 걸 보고 있어야 했다. 질투심에 눈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나도 언젠가 그의 관심을 받아 보겠다는 의지 하나로 버티다 보니 그런 날도 왔다. 체력장이 있던 날, 백 미터 달리기 종목에서 골라인에 타이머를 들고 서 있는 선생님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나에게 이런 괴력이 나올 수 있나 스스로에게 놀라며 전속력으로 달려 골인 지점을 통과하니, 나의 최고 기록을 갈아치운 것뿐 아니라 전교생 중에 가장 빨리 들어온 사람이 되어 있었다. 선생님은 박수를 치며 너무 잘 뛰었다고 내게 칭찬했는데 그날은 하루 종일 설레서 밤에 잠도 안 왔다.
파란 눈을 가진 선생님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어 중학교 내내 서기로 활동하며 아침저녁으로 열심히 교무실을 들락 거렸지만, 선생님은 다른 아이들과 이야기하느라 바빠 내가 들락거리는 건 알지도 못했다. 전교생이 모여 수요 예배를 하던 강당에서 선생님이 내 쪽을 한 번만 봐주기를 기대하던 날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3년을 선생님에게 영어를 배우면서 3시간도 그와 수업 외 딴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없지만, 졸업식 당일까지 ‘실은 네가 좋았다’ 고백을 받지 않을까 두근거렸다. 짝사랑의 종지부를 찍어야 했던 슬픈 졸업식 날, 나는 우리 담임에게도 써보지 않은 편지를 영어 선생님에게 써왔고, 그 편지마저 다른 선생님 책상에 잘 못 올려놓고 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는 가슴이 저려서 발끝만 봤다.
저 은행에 들어가면 선생님이 딱 있는 거야, 그럼 선생님이 “여어, 아름아, 이런 데서 다 만나고 무슨 일이니 여기는.”이라고 말하지.
그런데 어느 날 선생님이 정말 거짓말처럼 거기 있었다. 단 한 번 그런 일이 있었다. 그리고 굳어있는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짙고 깊고 푸른 눈동자가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던 파랑도 따뜻함이다. 한창 감수성 풍부한 소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파랑. 한 번도 좋아하는 색으로 말해 본 적 없는 파랑을 좋아하는 색으로 올려놓고 싶어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