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병신같음을 변명하기 위해 부모님을 원망했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먼 시간은 여섯살때 였던 것 같다.
아니 다섯 살 때였을 수도 있는 것 같다.
면목동에 살았는데 면목역 근처에 있는 동원 연립이라는 곳이었다.
다시 찾아보려고 네이버 지도에 검색해 보니까 지금은 이니지오라는 아파트로 재건축이 된 것 같다.
당신 면목동에는 빌라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었는데
서울에 위치한 동네이지만 좁은 골목길에 빌라가 엄청나게 많이 지어져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곳에 살았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여섯 살이었기 때문에 마냥 행복했던 것 같다.
동원연립 지하 1층에 살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당시에
어머니께서 왜 그 집을 선택하셨는지 잘 모르겠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거는 동생하고 같이 세발자전거를 타고 집 앞에서 놀았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자동차도 많지 않았었고
골목길에 아이들이 많이 놀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다.
집안이 가난하긴 했지만 유치원은 다닐 수 있었다.
동원시장 통로 쪽에 위치한 혜원유치원이란 곳이었는데
지금도 그 건물이 아직 남아 있다.
유치원 때 나의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1박 2일로 여행을 가고 장기 자랑을 했는데 인디언 복장을 했던 기억이 난다.
연말에 장기자랑을 할 때 큰 북을 맡아서 음악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산타할아버지께 라크리스마스 선물로 철인28호 장난감을 받았는데
본드를 이용해 조립하다가 기절했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 사진이 지금도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집에 카메라가 없다 보니 아쉽게도 사진이 많이 없는데
몇 장 남아 있지 않은 그 사진 속에 그 추억들이 담겨 있다.
지금 우리 아이들을 보면은 유치원 시절에 기억을 하는 것 같은데
나는 생각 없이 살았는지 크게 기억나는 사건들이 많지 않다.
하긴 지금은 네 살 다섯 살 때부터 아니 생후 1년부터
어린이집이라는 곳을 가고 여섯 살이 되면 유치원도 가게 되면서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좋은 추억을 많이 쌓을 수 있는 기회들이 많은 것 같다.
유치원 졸업 후에 우리 집이 이사를 한다고 했다.
어머니께서 입주 청소를 한다고 우리를 데리고 가셔서 엄청 깨끗하게 청소를 하셨다.
지금도 정확하게 기억나는데 그게 얼마나 강렬한 기억이냐면
지금은 도로명 주소로 바뀌어 더 이상 사용하지 않지만
그 집의 주소가 아직까지도 내 기억 속에 정확하게 남아 있다
서울시 중랑구 면목6동 1114-1호
국민학생이 되기 전에 이사한 이 집은 주인이 거주하는 다가구 주택이었는데
우리는 2층 같은 1.5층 지상층에 살았고 방이 세 개 있었다.
거실도 꽤 넓어서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지금 시대로 비유하자면 쉐어하우스처럼 집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방 한 개는 다른 사람이 사용을 했고 방 두개는 우리 가족이 사용했다.
나중에는 이모가 입주해서 살았는데
이모가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았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은 우리 어머니가 그 시절에 가장 행복하지 않았을까
나랑 동생도 작고 귀엽고 본인의 동생인 이모도 곁에 있고
그리고 이모가 낳은 딸 나에게는 2종사촌 동생이 함께 살았으니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뭔가 대가족을 이룬 것 같은 기분이었으리라
2층에는 주인 집이 살았는데
두 아들이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을 갔던 것으로 기억난다
주인 집에 들어갈 일이 아주 가끔 있었는데
집에 소파도 있고 장식품 같은 것들도 있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되게 부유했던 그런 느낌이 난다.
그때 그 감정이 나에게는 엄청 강렬하게 남아 있다.
부자의 삶은 저런 것이구나 집주인이 된다면 저렇게 살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때 강렬한 기억이 나의 인생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치는데
앞으로 만날 친구들을 선택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면목 6동 1114-1호에는 내 인생의 가장 많은 추억들이 남아 있어서
그곳에 가면 그때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진 않지만 뭔가 가슴 속에 뭉클한 기억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당시에는 자가 전세 월세 같은 개념을 전혀 몰라서
방이 많으면 전세라고 생각했고 방 개수가 적으면 월세라고 생각했다.
친구들이 너는 전세냐 월세냐 이런 걸 물어봤을 때
나는 뭣도 모르고 전세라고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어머니께서는 우리 집이 월세라고 말씀해 주셨다.
어린 시절에 남들과 비교를 끊임없이 하는 그 시절에
우리 집이 잘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물론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우리 집이 찢어지게 가난했던 것은 아니다.
대학 진학에 실패하고 자격지심을 끊임없이 생산해 냈던 나는
내가 남들보다 나은 삶을 살지 못하는 원인에 대해서
내가 아닌 부모님을 탓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이게 지난 25년간 내가 생각했던 가장 병신같은 생각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나 죄송스럽고 미안하고 고통스럽다.
아버지는 50년을 넘게 택시 운전을 하고 계신다.
배우지 못해서 오직 가족들을 위해 하루 종일 아니 밤 늦은 시간까지
고통 받으면서 운전을 하셨고 그 고통이 허리로 전이 되어 항상 허리에 침을 맞으셨다
허리가 아픈데 하루 종일 그 좁은 택시 안에서 움짝 달싹 못하고
12시간 이상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너무나 괴롭고 힘든 시간이 아니었을까...
아버지는 아들한테 사랑한다는 따뜻한 한마디 건네지 못할 정도로
인간관계에 미숙한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유일하게 말씀이 많아지는 순간은
술을 드시고 기분이 좋아지셨을 때다
동생도 그런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지 평상시에는 말이 거의 없다가
가끔 나랑 술 한잔 할 때는 몇 마디 말을 건네기도 했다.
유전자의 힘이 참 무섭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 하신 것이 아닐까?
물론 누군가의 기준으로 아버지를 봤을 때 많이 부족해 보일 수도 있었고
아버지로서의 역할도 부족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나도 아빠가 되고 나니까 왜 그렇게 행동했고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이니까 실수하고 인간이니까 힘들고 인간이니까 용서할 수 있는 거니까...
앞서 이야기 했지만 대학 진학에 실패하고
특별할 건 없는 인생을 사는 것에 대한 원인을
부모님에게서 찾으려고 했던 것 같다.
돌이켜 보면 나는 방 세 칸에 살아 보기도 하고 방 두 칸에 살아 보기도 하고
어린 시절부터 게임을 좋아해서
부모님께 미친 듯이 졸라서 게임기도 사고 퍼스널 컴퓨터도 사고
그 당시에 다른 아이들이 갖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소유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본인들의 것을 포기하고 나에게 모두 주었다는 사실을...
성인이 되고 나서 다른 사람들하고 비교해 보니까
내 삶이 그렇게 힘들고 괴로운 것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냥 내 의지와 노력이 부족한 것을 부모님 탓으로 돌리던 비겁한 인간이었던 것 뿐이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다만 그것을 잘 깨닫지 못했을 뿐이지
부모님의 무관심이 오히려 나를 자유롭게 성장시켰던 것 같다.
나도 두 딸을 키우고 있지만 그 두 딸에게 바라는 부분
그 두 딸이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내 무의식에 내 잠재의식의 깔려 있는 공부에 대한 열망이된 것처럼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자신들이 누리지 못한 자유로움을
아들들이 누리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방임인지 자율인지 경계선이 모호하긴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본 경험이 지금에는 큰 자산이 되었다.
내가 어린 시절에 그렇게 자유롭게 살지 못했다면
결혼하고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는 지금
미친 짓을 하고 돌아다니지 않았을까 정말 다행이다.
인생은 살아 보니까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모든게 다 운이고
나는 나에게 주어진 삶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충실하게 후회 없이 하는게 가장 중요한 것 같다.
내가 바꿀 수 없는 것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해내려고 노력하는 자세도 물론 중요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이 순간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삶도 나쁘지 않다.
내가 일을 하면서 남들보다 철저하고 완벽하게 할 수는 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하고 그것을 꾸준히 할 수 있다면
나 같은 사람도 세상에 의미 있는 쓰임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나의 부모님은
그 분들의 인생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하였고
그 결과가 어떻든 간에 그 모든 것은 운이고
그렇게 나에게 주어진 것은 바로 운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