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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씨소프트에 미치다

고졸사원이 엔씨소프트에 파견직으로 입사하다.

by 이준성공
PC방 아르바이트는 여러모로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면목역 근처에 PC방이 하나 있었는데 야간 알바가 갑자기 그만두게 되었다.

급하게 나를 투입해서 야간 알바를 하게 되었다.

주간 알바가 빡세냐 야간 알바가 빡세냐 둘 다 빡세다.


근데 나는 낮에 잠을 자는게 힘들었다.

낮에도 활동을 해야 하는 성격이다 보니까

취침 시간만 줄어서 점점 더 피폐해져갔다.


그래도 야근 알바 하다 보니 손님이 별로 없어서

일의 강도가 덜한 것도 있고 밤에 눈치 보는 사람 없이

편하게 일할 수 있어서 이런 점들은 좋았다.


새벽에 졸음을 없애기 위해서 음악을 자주 들었는데

그때 들었던 노래가 거북이의 비행기라는 노래하고

렉시의 애송이라는 노래였다.

32840.jpg


나와 함께 일하던 매니저 한 명 있었는데

그 사람은 센스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멀쩡한 것 같기도 하고 오타쿠 같기도 하고

좀처럼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내가 그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대부분의 업무시간을 리니지2를 하면서 보냈는데 캐릭터명이 "니벨룽겐의반지"였고

캐릭터 클래스는 여자 드워프였다. 당시 유행하던 노란색 미스릴 세트를 입고 이도류로 사냥했다.

사진을 찾을 수 없어서 아쉽지만..대충 이런 느낌

i1048317327.jpg 리니지2 미스릴 세


우연히 그가 받는 월급을 들었는데

200만 원 정도의 월급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가 찼다.

물론 지금은 회사 혹은 사업에 중요한 핵심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에게는

남들보다 2배 3배 돈을 주더라도 꼭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때 그 매니저는 PC를 수리하고 고스트 프로그램을 다룰 수 있다는 이유로

나보다 3배 가까운 돈을 받는게 이해되지 않았다.


몇 일 뒤 사장님께 월급을 올려 달라고 제안을 드렸다.

하지만 돌아오는 이야기는 차가웠다.

매니저는 PC방을 전체적으로 관리하는 업무를 하고 있고

"너는 아르바이트이기 때문에 급여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 말이 맞다. "나는 알바였다."


아르바이트는 평생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나만의 일을 찾아야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며칠간 더 고민한 끝에 사장님께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대학 진학을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를 제대로 해 본 적도 없고 공부를 제대로 할 줄도 모르는 내가

공부를 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행동이었다.

그 해에 수학능력시험을 보고 견적이 안 나온다는 것을 깨닫고 본격적으로 취업 준비를 했다.


면목동 우리 집 근처에 살던 SC형은 나와 Room-335라는 밴드도 함께 하고 추억이 많은 형이다.

SC형 아버님께서 가구 관련 사업을 하셨고 마침 일을 할 사람이 필요했다

내가 취업하기 전까지 형을 따라다니면서 가구 납품하는 일을 했다.

정해진 위치로 가서 가구를 싣고 몇 시간을 이동하여

가구를 조립하고 납품하는 일 자체가 상당히 체력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한 번은 초등학교에 신발장을 납품하는 현장을 갔는데

조립하는데 손가락이 너무 아파서 정말 탈주하고 싶었다.

하지만 도망갈 수도 없었다.


매일 일당을 받아서 술을 먹지 않고 차곡차곡 통장에 모았다.

언제 어떻게 쓸지 모르는 돈이니 잘 모아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같이 일했던 친구가 그날 번 돈을 그날 모두 소비하는 걸 보면서

이 일이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부터 월급을 받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참 신기하게도 지금 나는 가구 일을 하고 있고 월급을 받고 있다.


일당 일을 하면서 사이버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준비했다.

동생하고 같은 과로 함께 들어갔는데

그때는 내가 동생한테 큰 애정이 있었던 것 같다.

입학을 앞두고 학비를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매일 취업 사이트에서 나한테 맞는 일을 찾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러다 우연히 엔씨소프트에서 우편물을 관리하는 사람을

구인한다는 구인 광고를 보게 되었다.

내가 정말 좋아하고 사랑하는 리니지를 만드는 회사에서 사람을 뽑는다니

이건 기회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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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씨소프트에서 일할 수 있다면

우편물 배달뿐만 아니라 청소나 경비라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간절한 마음이 통했는지 아니면 내가 대학을 가지 못해서

오랫동안 일할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었는지

YS, JK 두 분의 형님은 나를 채용해 주셨다.


나는 사회생활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많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근 형은 사회생활에 대해서 a부터 z까지 세심하게 알려 주었다.

형이랑 나이 차이는 많이 나지는 않았지만

뭔가 그때 재근이 형은 남들보다 월등해 보였다.

그런 그 형님을 보고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벌써 20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그 갭은 좁혀지지 않았다.

우리 형님이 대단한 이유다. (내가 멍청한건가 ㅠ.ㅠ)


엔씨소프트에서 우편물을 배달하는 일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엔씨소프트에서 계속 일하고 싶어서

단순히 우편물 배달하는 일만 하지 않고 더 많은 일을 요구했다.


파견직원은 계약된 업무만 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나는 좀 더 많은 일이 하고 싶었다.

2년이 지나고 드디어 엔씨소프트의 계약직이 되었다.

그동안 적은 월급이었지만 학교를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월급을 받았는데

계약직이 되고 나서부터는 월급이 크게 올랐다.

파견 회사에 가는 수수료가 온전히 나에게 들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내가 할 수 있는 다양한 업무들을 맡겨 달라고 요청했다.

누군가는 일을 좀 덜 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은데

나는 어떻게 하면 더 할 수 있을지를 항상 고민했다.

누군가 일을 시킨다는 거는 그 일을 하기 싫다라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상대방을 믿는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상대방을 믿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일을 시키겠는가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한테만 일을 시키는 것이다.

그게 일이다.


한참 열심히 일을 하는 와중에 새로운 SH실장님이 오셨다.

실장님은 회사에 기획조정실에 계셨던 분인데

어떻게 보면 회사에서 가장 실세 중에 실수였던 분이었다.

어떠한 사건으로 인해 회사에서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적은 우리 부서로 오셨는데

그걸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산 위에서 내려다 보니 시간이 있다면
산 아래서 올려다 보는 시간도 필요하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다시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는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

나는 그분이 존경스러웠다.

나보다 12살 많은 분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30대 중반에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생각이 상당히 깊었고 사고가 유연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배운 많은 것들이

그 분의 생각과 철학에서 배운 영향이 크다.


지금은 연락을 드리지 않지만

한동안 꾸준히 연락을 드리고 인사를 드렸다.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도록 해 주신 분이니까


SH실장님과 나는 여러모로 비슷한 부분이 많았다.

음악을 좋아했고 술을 좋아했고 한 마디로 풍류를 즐길 줄 알았다.

항상 내가 하는 일에 도움을 주시고

내가 잘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시고 용기를 주셨다.

YS, JK 형님과 SH실장님까지 세 분이 나에게는 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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