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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일 May 15. 2024

기억에 사무치는 음식

K푸드와 세계의 음식문화

영혼을 흔드는 음식   

  

누구에게나 그런 음식이 있다. '기억의 방'에 언제까지나 여운처럼 머무는... 내겐 어떤 음식일까, 곰곰 생각해 본다. 역시 어릴 적 엄마가 해주신 음식이다. 학식이 없던 시절, 엄마의 도시락은 늘 깔끔하고 정성스러운 반찬으로 채워졌다. 그중에서도 '달걀말이'가 오래 기억에 남는다. 엄마의 달걀말이는 김을 넣어 말아서 비주얼부터 남달랐다. 먹음직스러운 노란 달걀지단 속의 김이  입맛을 돋웠다. 급우들의 부러운 눈길은 자주 내 도시락에 쏠렸다.


30대 후반 영국에서 연수하던 시절, 어머니가 보내주신 김치도 잊히지 않는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머나먼 객지의 장남을 얼마나 걱정하셨을까. 종종 보내주시던 김치는 고향의 맛과 정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한 번은 배달사고로 김치가 2주 넘어서야 도착했다. 거의 묵은지가 다 된 바람에 신 냄새가 기숙사 공유주방에 가득해진 난감한 상황이었다. 퍼뜩 정신이 든 나는 가까스로 '생존 요리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1년이 지날 즈음엔 '겉절이 김치'를 담가 먹을 정도가 됐다. 어머니의 김치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조금이나마 몸으로 배우는 시간이었다.



이국의 식탁에 머무는 사람의 향기


여름 방학에 한국인 친구와 영국의 북부 스코틀랜드를 자동차로 여행했다. ‘하이랜드’라고 불리는 고원지대는 길 따라 인적이나 '차적(車跡)'이 드물 정도로 스산한 풍경이 끝없이 이어진다. 황량한 산과 깊은 계곡 사이를 지나 어느 한적한 시골마을에 도착했다. B&B(Bed & Breakfast)의 이층 방에 짐을 풀었는데, 아이들 사진이 벽에 걸려 있었다. 아마도 이제는 장성해서 도회지로 나간 아이들의 방을 여행자들에게 내준 것이었다. 사람 사는 모습은 세상 어디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노부부가 차려준 ‘잉글리시 브렉퍼스트(영국식 조식)’를 먹었다. 소박하지만 정성스럽게, 제법 헤비한 음식들이 여행자의 허기와 향수를 달래준다. 집을 떠난 노부부의 자녀들도 어릴 적 부모님과 둘러앉아 이 식사를 나눴을 것이다. 문득 고국에 두고 온 가족이 생각났다. 세 살배기 아들은 잘 있을까.



영국식 아침식사 이미지. ⓒpexels



음식에는 사람 사는 찐 모습이 담긴다      


의식주 생활문화 중에서도 음식에는 인간의 가장 강렬한 체험이 들어있다. 오감을 자극하고 강한 중독성이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쉽게 접하고 진입 장벽이랄 게 딱히 없다. 또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은 어떤 음식에나 역사와 문화가 담긴다는 점이다. 그곳의 자연과 물산, 거기 사는 사람들의 입맛과 취향이 반영된다. 어떤 지역의 문화적 경험 형성에 음식이 최고의 역할을 하는 이유다.


최근 K컬처 인기 덕분에 K푸드에 대한 관심과 열기도 뜨겁다. 한국을 찾는 외국인의 한국 선택 시 고려 요인으로는 '음식과 미식 탐방'이 단연 1위다. 한식은 국가별 음식 이미지에서 새롭고 독특하게 자리매김했다. 어떤 키워드일까. '젊고 신선한, 색다르고 이색적인, 최근에 유행하는...' 떡볶이나 김밥 같은 간편 음식부터 고급 한정식까지 한국 음식은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최근 뉴욕타임스(NYT)가 선정한 ‘2024년 뉴욕 최고의 레스토랑 100곳’에는 한식당이 무려 7곳이나 선정됐다.



대항해시대가 바꾼 인류의 음식문화. ⓒ김성일


 

음식은 문명 교류의 매개체     


세계의 음식문화사는 15세기 대항해시대를 거치면서 송두리째 변화했다. 요리는 문명 간의 거대한 교류의 장이 된 것이다. 신대륙 아메리카가 식량 창고 역할을 한 덕분에, 유럽의 구대륙은 기아와 빈곤을 해결하며 세계사의 주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 식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부분 식재료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온 것이다. 반대로 구대륙은 무엇을 전달했을까. 쌀이나 커피, 공업제품들, 특히 유럽인들의 감염병은 신대륙 원주민의 인구 감소에 치명적인 요인이 됐다.


오늘날 서구인들이 애용하는 최고의 식재료인 감자와 토마토는 이렇듯 아메리카 출신이다. 감자는 ‘신이 내린 선물’로 불리며 아일랜드를 비롯한 유럽인들의 기아 해결과 인구 증가, 경제 활력 회복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토마토 또한 이탈리아와 지중해 식단의 황제 같은 지위를 차지하며, 세계인이 사랑하는 슈퍼푸드로 각광받고 있다.



세계의 음식, 세계인의 솔푸드     


흔히 ‘솔푸드’(soul food)는 영혼을 흔들 정도로, 잊을 수 없는 음식을 말한다. 미국 남부지방에 거주하던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의 음식이 그 기원이다. 팍팍하고 고단한 삶을 위로하는 음식, 생존의 고비를 넘으며 가족과 함께 일상의 애환을 나누던 음식이다. KFC의 ‘프라이드치킨’이 이 음식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한다.      


음식은 국경을 넘어 ‘현지화’하면서 진화한다. 그 지역에서 나오는 재료와 사는 사람들의 입맛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1984년 종로점이 오픈하면서 한국에 상륙한 KFC는 초기에 쓰디쓴 실패를 맛봤다. 매뉴얼대로 ‘단짠’ 맛을 고집했기 때문인데, 차츰 한국인 입맛에 맞게 변화하면서 치킨의 대명사 지위를 누렸다.   


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한국 음식은 한국식 치킨과 라면이다. 하지만 이들은 원래 한국음식이 아니고, 미국과 일본에서 출발한 것이다. 한국식의 양념치킨, 매운 불닭볶음면처럼 우리의 입맛과 기호를 반영해 재탄생한 것이다. 삼양라면 불닭볶음면의 경우 수출이 전체 매출의 80%를 차지하는데, 지역별 맞춤 공략을 통해 세계화에 성공했다. 미국에선 까르보나라, 중국에선 마라, 태국에선 똠얌 등의 소스를 추가하는 방식이다. 음식은 이처럼 국경을 넘나들면서 세계인이 사랑하는 문화가 됐다.



교류와 혼종이 다양성으로


세계의 음식을 보면 문명 간 교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하게 된다. 철저한 오리지널보다는 다양한 변종과 파생, 현지화를 거쳐 새롭고도 독특한 음식문화를 꽃피웠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다른 걸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열린 자세다. 음식에 문턱이 없는 것처럼, 문화의 국경과 경계도 갈수록 흐릿해지고 있다.


K컬처 또한 이런 흐름 속에서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문화적 현상으로 떠올랐다. 문화란 교류와 혼종 속에서 피어나고 지속하는 것이다. 다 함께 가는 게 중요한 시대다.    




며칠 전 아침 식탁 모습. 토마토와 파프리카, 현대 딸기는 아메리카, 치즈는 유럽, 바나나는 동남아가 원산지다. ⓒ김성일





* 표지 사진은 어머니의 김치가 있는 밥상. ⓒ김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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