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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일 May 22. 2024

술 마시고 증명사진 찍는 사람

K컬처와 세계의 문화현상 4 <네덜란드>

자신의 가장 멋진 순간     


현역을 마치고 나니 증명사진 찍을 일이 거의 없다. 코로나 시국을 3년여 거치면서 여권 기한이 만료되는 줄 몰랐다. 해외 나갈 일이 생기면서 아내와 서둘러 여권 사진을 찍었다. 지난해 가을의 일이다. 집에서 가까운 신촌역 인근의 사진관. 이번에 여권 사진을 찍으면 오래 쓸 것 같은데, 얼굴은 괜찮은지, 머리와 옷매무새까지 신경이 쓰인다. 사진을 찍고 나니 사진사가 컴퓨터를 이용해 ‘작품'을 만들어 준다. 순식간에 10여 년 전 청춘 시절로 돌아간 듯한 사진, 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갈수록 지갑 가지고 다닐 일이 줄었다. 집을 나서도 스마트폰 하나면 웬만한 결제 처리를 할 수 있어 번거롭게 돈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근데 운전할 때는 운전면허증이 꼭 필요하다. 최근에 IC운전면허증을 발급받아 모바일 신분증을 만들면서 이마저도 자유로워졌다. 마침 인생 최고의 멋진(?) 여권 사진이 있지 않던가. 외출할 때 스마트폰만 챙기면 해결되니까 이제는 정말 지갑이 필요 없는 시대라는 걸 실감한다.


   

미술의 역사를 공부하며     


3월부터 평생학습관에서 <서양미술사>를 배우고 있다. 처음 시작한 미술사 공부, 20주 강의라 상당히 깊이 있는 내용에 갈수록 흥미로워진다. 어릴 적부터 미술에 관심이 있었는데, 본격적으로 마주할 기회는 없었다. 지난해 ‘어반 스케치’로 그림을 접한 이후 이제부터 하나씩 해볼 생각이다.


미술사를 돌아보면서 내가 가장 관심을 가진 시기는 1600년대 네덜란드. 당시 3대 화가로 불리는 렘브란트, 페르메이르(베르메르), 프란츠 할스 등이 활약했다. 수많은 화가와 그림 중에서도 오랫동안 나의 뇌리를 사로잡은 건 프란츠 할스의 <유쾌한 술꾼>이다. 할스(1580~1666)는 네덜란드의 위대한 초상화가이자 풍속화가로 꼽힌다.        



<유쾌한 술꾼(The Merry Drinker)>, 1650. 불콰한 얼굴로 뭔가 말하려는 듯한 표정에 친근감이 든다.



활기찬 나라, 유쾌한 사람들     


챙 넓은 모자를 쓰고 불콰한 얼굴로 술잔을 들고 있는 사람. 나를 향해 한 손을 들어 알은체하면서 "한잔하실까요?"라며 권하는 듯한 그림이다. 수백 년 전 그림 속의 인물이 자신의 민낯을 내보이며 친근하게 말을 건다. 가슴 한편이 따뜻해지면서 기분이 좋아진다. 시공간을 넘어 사람과 사람, 시대와 시대가 연결되는 순간이다. 예술의 힘이 아닐까.


서양미술의 주인공은 오랫동안 신이었고, 신이 권위를 부여한 왕과 국가로 이어졌다.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마침내 인간과 개인이 서서히 무대 위에 오른다. 스페인에서 독립한 17세기 네덜란드는 상업의 발달과 종교 개혁을 거치며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맞는다. 고전과 기독교를 신봉한 이탈리아의 화풍이 진지하다면 북유럽의 전통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국운이 상승한 네덜란드의 국가적 자부심은 그들의 삶에 대한 발견, 인간적 시선과 자신감으로 표출된다. 렘브란트의 <야경>, 페르메이르의 <우유를 따르는 여인> 등 많은 작품이 우리 주변의 일상과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다.


할스의 <유쾌한 술꾼>은 이런 흐름의 끝판왕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다. 당시 ‘그림’이란 매체는 ‘최고의 멋진 순간‘을 보여주는 것. 1839년 사진이 나오기 전에 주로 기록과 보존, 기념을 위한 목적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한잔 거나하게 걸친 후 증명사진을 찍는 사람,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그만큼 남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는 의미다. 자존감이 높지 않다면 가능했을까.


아쉽게도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할스에 대해서 알려진 내용이 많지 않다고 한다. 사람과 어울리길 좋아하는 흥겨운 성격에 애주가였던 할스. 화가 자신이 활력이 넘치는 당시 네덜란드의 사회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소년 어부> 또한 사람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애정이 느껴진다. 우리 주변의 가족이나 가까운 이웃 동네의 소년 같은 느낌이 물씬 풍긴다. 그림을 보는 순간, 문득 "오늘도 고생 많았다."고 말을 건네고 싶어진다.



<소년 어부(The Fisher Boy)>, 1630-32. "오늘 고생했다."고 말을 건네고 싶어지는 그림이다.




놀이가 된 사진과 그림     


지금 사진은 기록과 기념만이 아니라 '놀이와 보여주기'가 중요해졌다. 인스타 감성과 '인생 네 컷' 사진 찍기가 유행하는 시대 아닌가. 진지하고 근엄한 표정이 아니라 멋지고 유쾌한 사람들, 인생 네 컷의 사진은 재미와 유머, 개성과 장난기가 넘친다.    

  

매달 만나는 세 친구가 있다. 산행을 하고 식사하며 가볍게 한잔하는 게 우리의 관행이 됐다. 평소에 거의 술을 마시지 않는 나도 이 친구들 만날 때만은 예외적이다. 지난달에는 1차 후 우연히 거리의 무인 사진관에 들러 네 컷 사진을 찍었다. 이리저리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참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60대 자유인들의 표정이 아직 살아 있다, 고 사진을 본 아내가 말한다. 아직 살아 있다니(?) 다행이다.


17세기 네덜란드 사람들, 특히 프란츠 할스는 시대를 얼마나 앞서간 걸까. 발랄한 놀이 감각이 담긴 한 장의 유쾌한 그림, 우리보다 훨씬 앞서서 인생 사진을 찍은 그들이 놀랍고 존경스럽다. 일상의 인물과 풍경을 인간적인 시선으로 묘사한 프란츠 할스의 화풍은 인상파 화가인 마네와 고흐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전해진다.



국력과 자존감은 함께 간다     


국운이 상승하면 국가적 자부심과 자존감이 높아진다. 네덜란드의 전성기는 문화예술에서 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해 ‘황금시대(Golden Age)’라 불린다. 인생의 가장 멋진 순간, 역사상 가장 빛나는 시대는 그렇게 네덜란드에 찾아왔다.   


K컬처 또한 대한민국의 국운 상승과 함께한다. 압축적인 산업화와 고난의 민주화를 거쳐 한국은 기적적으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 한국인의 놀라운 역량과 성취는 여느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가파르다. K컬처가 전 세계에서 관심과 주목을 받는 이유다. 이제는 K컬처의 지속가능한 매력을 구체화해야 되는 시점이다.


오늘은 우리의 민낯을 드러내며 마음껏 웃어보자. 행복한 시간, 자존감이 살아나는 하루가 되지 않을까.






*표지 사진은 암스테르담의 국립 박물관.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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