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성일 Jun 19. 2024

K컬처를 만든 3가지 정책

K컬처 정책에서 배우는 인생

정책은 터닝 포인트를 만든다     


한류와 K컬처의 성공 요인을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복합적인 산물이기 때문이다. 정부의 정책은 어땠을까. 결론적으로 ‘결정적이진 않았지만 매우 중요했다’가 아닐까. 공무원 출신에 문화정책을 담당했던 한 사람으로서 정책의 의미를 강조하고 싶은 마음은 크지만,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정책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큰 흐름을 바꾼 터닝 포인트를 새겨본다. 오늘의 한국문화를 이루는 데 디딤돌이 된 정책들. 개인적으로 운이 좋았다고 할까. 그 정책은 공직 생활 중 내가 맡았던 업무나 부서와도 인연이 깊었다. 뭔가 치고 나가는 시대의 분위기를 체감하면서, 즐겁고 활기차게 일했다는 생각이 든다. 국가에도 이로웠고, 개인에게도 행복감을 주었던 그 일들을 하나씩 살펴본다.  

        


문화와 산업의 유기적인 결합이 K컬처를 만들었다. ⓒ김성일



1. 문화담당 독립부처 출범으로 '문화' 마인드 제고     


새내기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지 불과 1년, 조직이 둘로 갈라진다는 소식은 충격적이고 당황스러웠다. 내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소속이 바뀔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문화를 담당하는 독립부처인 문화부가 출범하게 된 1990년은 문화정책의 획을 그을 만큼 의미가 특별하다. 권위주의 정부 시절, 문화는 정권의 이념적 도구와 수단 역할을 했고, 국정홍보 업무와 기형적인 결합 상태에 있었다.


기대와 우려 속에 홀로서기를 시작한 문화부에 초대 이어령 장관은 적임자였다. 기발한 아이디어와 순발력, 특유의 개인기와 추진력을 바탕으로 국정 전반과 문화부 내부에 새 바람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힘도 없고 존재감도 약한 문화 정책이 체계적인 방향과 틀을 갖추기 시작한 계기다.


'문화발전 10개년 계획'이 수립되고 '문화의 생활화와 대중화'라는 새로운 정책이 추진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시대를 앞서갈 정도로 혁신적이었다. 장관의 기상천외한 지시를 어떻게 실행할 것인지 상사들이 끙끙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일하는 맛이 났다. 나는 ‘생활문화’ 업무를 맡아 당시 공무원으로선 희한한 일에 빠져 여기저기 쏘다니곤 했다. 생활문화는 의식주 라이프스타일을 총괄하는 개념이라, 해야 할 업무 범위는 당최 구분도, 한계도 없을 정도로 게릴라 식이었다.


도시의 좁은 자투리 공간에 '쌈지공원'을 조성한다며 구석구석 현장을 답사하고, 그때엔 개념조차 없었던 '주방용 가위'를 개발하기 위해 식칼 제조업체도 수소문했다. 국토의 끝인 마라도(제주)와 명파리(고성) 등지의 청소년들에게 그림엽서를 만들어 보내면서 시인들(故人이 되신 김남조, 조병화 등)의 신작 시를 받으러 자택까지 방문한 일도 기억에 생생하다.



2. ‘산업’에 눈을 뜨게 한 문화산업과 관광     


1990년대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물결이 몰아치던 시기다. 특히 1994년은 문화산업국을 신설하고 관광업무를 새로 시작(건설교통부에서 인수)하면서, 문화부가 본격적으로 '산업 마인드'에 눈을 뜬 해다. 당시 문화의 가치와 파급효과를 한 방에 정리한 카피가 엄청난 화제를 일으켰다. 영화 <쥬라기공원> 1년 흥행수입이 한국 자동차 150만 대 수출 효과와 같다는, 놀랍고 충격적인 비교였다. 당시 나는 영화 담당 부서에 근무하면서 정통부, 산업부와 함께 영상산업을 지원하기 위한 보고에 참여한 실무자였다.


문화산업국을 신설할 당시 촌극 같은 일이 떠오른다. 업무 파트너로 친해진 산업 담당 주무부처에 문화‘산업’이라는 용어를 써도 되겠냐고 문의한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안되지만, 문화부 업무의 현주소가 어느 정도인지를 실감하게 한다. 문화는 그만큼 돈이나 산업, 경제와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 시절이다.


한국의 문화산업 개념은 1980년대 영화시장 개방과 함께 싹이 튼다. 할리우드 영화의 직접 배급, 한·미 영화협상 등 개방의 위기와 파고를 넘으며 국내 영화산업 또한 큰 변화의 소용돌이를 겪게 된다. 산업적 역량이 조금씩 갖춰지던 시절, 문화산업국 신설은 정부 차원에서 정책 지원체계를 구축하는 과정의 하나였다.


그때 저작권이나 통상협상과 관련된 일은 조직 내에서도 어렵고 힘든 기피성 업무에 가까웠지만, 점차 업무량이 늘며 중요성도 한층 부각됐다. 나는 영화 업무를 2년 여 맡으면서 생소했던 산업 감각과 국제 동향을 가까이서 배울 수 있었다. 이 또한 개인적으로도 관심분야의 확장과 경력 관리에 큰 도움이 됐다.



3. 일본 대중문화 개방과 문화산업 정책 드라이브     


1998년은 IMF 체제라는 절체절명의 시기였다. 우리 국민의 저력과 국가 위기관리가 빛을 발한 때, 김대중 대통령은 ‘문화대통령’이라고 불릴 정도로 문화에도 조예가 깊었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문화정책의 기조가 확립되고, 동시에 문화산업과 관광을 국가 핵심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한 정책 드라이브가 이뤄졌다. 문화적 산업적 자신감이 표출된 국운 회복 노력은 K컬처 발전의 토대 구축이라는 가시적인 정책성과로 이어졌다.


가장 과감하고 상징적인 정책은 1998년부터 단계적으로 추진한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다. “좋은 일본문화는 받아들이자.”라고 하면서 부정적인 국내 여론을 정면 돌파하는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결과적으로 국내 산업 피해는 크지 않아, 한국의 문화산업을 위기에서 기회로 바꾼 결단의 순간으로 기록됐다. 방어보다 ‘개방과 협력’이 훨씬 유용한 생존 법칙이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발전 전략이라는 걸 극적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또 하나, IMF 외환위기에 대응해 문화산업이 국가 성장동력으로 본격 육성됐다. 문화계의 숙원이던 정부예산 대비 문화예산 1% 공약도 사상 처음으로 달성됐다(2000년). 당시 나는 영국 연수 후 복귀해 문화산업 총괄 업무를 맡았는데, 8월인데도 무려 326억 원이라는 예산이 미집행 상태였다. 이후 5개월 간은 직장 생활 중 최고로 신나게 일하면서 돈도 원 없이(?) 쓴 시간으로 기억된다. 야근이나 주말 근무는 예사였어도, 힘든 만큼 보람도 큰 시절이었다.


이때 마련된 정부의 문화산업 지원제도와 시스템은 K컬처 발전의 확고한 기반이 되었음은 물론이고, 이후 많은 나라들의 벤치마킹 대상으로 떠올랐다. 개인적으로도 행운이 따랐다. 2010년에 내가 쓴 박사 논문 주제가 바로 문화산업과 콘텐츠 육성을 추진한 당시의 정책 추진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정책 담당자로서 외부에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역동적인 추진과정을 누구보다 생생하게 기록하고 증언할 수 있었다.



1990년대 문화정책의 변화는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만큼 빠르고 역동적이다. ⓒ김성일



한국의 문화정책 3단계     


한국의 문화정책은 크게 3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꼽은 구분과도 어느 정도 흐름을 같이한다. 특히 한류와 K컬처의 핵심을 차지하는 대중문화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규제 위주의 부정적 시각이 주류였다. 문화부 출범, 문화산업국 신설 등을 계기로 정책의 틀이 크게 변화하였고, 김대중정부 이후 문화산업과 관광이 국가의 핵심 성장동력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런 정책 흐름 속에서 한류는 태동하여 오늘날 세계적인 인기와 관심을 받는 K컬처로 우뚝 서게 됐다. 모든 일이 그렇듯 흐름은 연속적인 듯, 동시에 단속적이다. 정책도 마찬가지, 도도한 흐름과 맥락 속에서 한국의 문화정책은 발전했다. 문화와 산업 마인드가 다져진 토대 위에서 일본 대중문화 개방은 자신감 있게 이뤄질 수 있었다. 선배들의 땀과 성취는 그대로 후배들의 자산이 되고, 한 단계 도약하는 발판으로 작용한 것이다.


아울러 역사의 터닝포인트를 만들었던 순간을 새겨볼 필요도 크다. 혁신적인 정책을 선도적으로 추진한 지도자들의 혜안이 고비마다 결정적 역할을 다했기 때문이다. 이어령 장관이 애용한 표현을 든다면 시대의 '불쏘시개와 부지깽이' 같은 사람들, 그들의 한없는 열정과 헌신을 기억했으면 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산업화에서는 뒤졌지만 정보화에서는 앞서가자."라며 포용과 혁신의 지도력으로 한국이 ICT와 콘텐츠 강국으로 거듭나는 데 반석을 놓았다.



정부와 민간이 함께 가야 한다     


외국의 일부 언론은 초기 한류의 성공이 ‘쥬라기 공원 효과'에 따라 한국 정부가 추진한 강력한 정책의 결과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다수 한국학자의 평가는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고 생각한다. 어떤 성공은 정책의 덕을 봤지만, 어떤 성공은 자생적이었기 때문이다.


정부 역할은 물론 강력하다. 특히 한국적인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압축성장과 산업화 시대, 정부 주도의 정책 드라이브가 기적 같은 성장스토리를 써나갔기 때문이다. 유례가 드문 성공사례는 '한국적 발전모델'로 불렸다. 한류와 K컬처도 상당 부분은 한국 정부의 놀라운 추진력과 '패스트 팔로워 전략'을 성공요인으로 거론한다. K팝의 아이돌 육성과 경쟁시스템이 특유의 한국적 모델로 꼽히는 이유와 유사하다.     


정부는 위로부터 강력한 정책담론을 제기하면서 국가 발전을 이끌고, 그 파급효과는 민간과 사회 저변에 스며든다. 중요한 건 산업 내부의 발전동력 확보와 내적 역량 성숙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것, 민간의 힘과 저력이 핵심요인이라는 뜻이다. 결국엔 정부와 민간이 함께 가는 긴밀한 협업구조를 형성해야 한다. 유기적인 협력과 동반 발전은 지속가능한 K컬처에도 긴요하기 때문이다.


정책의 역사를 돌아보며 지금 우리에게 어떤 정부가 필요한지를 생각한다. 좋은 정부는 국가에도 개인에게도 행운이자 행복이 아닐까.








* 표지 사진: pixabay



#한류 #K컬처 #K팝 #문화부독립 #이어령 #생활문화 #일본대중문화 #김대중 #문화대통령 #쥬라기공원 #패스트팔로워 #문화산업국 #생활문화 #문화예산1% #IMF #지원하되간섭하지않는다

이전 24화 무거움은 가라, B급의 매력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