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한 후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과 자주 어울린다. 자연스레 이런저런 대화가 오간다. 가장 신세 좋은 남자는 누구일까? 누군가 ‘마덕사 주지’라고 말한다. 예전에 그런 술자리 건배사가 있었다고 한다. ‘마누라 덕에 사는 남자’를 칭하는 말이다. 공주의 유명 사찰 마곡사와 이웃한 절도 아니고, 특정 종교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마누라 덕에 팔자 좋게 사는 남자, 부러울 따름이다.
‘마카’ 쓰는 남자도 인기다. 안데스산맥이 원산지인 보양식품 ‘마카’ 열매를 말하는 게 아니다. ‘마누라 카드’ 들고 다니며 긁는 남자다. 돈 걱정 없이 사는 남자 아닌가. 은퇴한 남자에게 5가지가 필요하다는 유머도 들린다. 아내, 마누라, 집사람, 애들 엄마, 와이프라고 한다. 한편으론 남자들의 처지가 안쓰럽기도 하다.
중년 이후 부부의 권력관계 변화
퇴직 후 크게 바뀌는 것 중 하나가 부부관계다. 직장생활을 오래 한 남자의 경우, 변화는 극적이다. 관계망은 심하게 축소되고 생활의 중심은 밖에서 안으로 향하게 마련이다. 그간 출퇴근 생활로 바빴던 퇴직자들은 이제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하지만 아내의 생각은 정반대다. 육아와 가사, 남편 뒷바라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시야가 안에서 밖으로 향하는 것이다.
삶의 중심축이 바뀌면서 부부의 관력 관계에도 큰 변화가 따른다. 중년으로 갈수록 주도권은 남편에게서 아내에게로 넘어가는 게 일반적이다. 퇴직 후라면 상황은 더욱 가속화한다. 인생 후반부 노후 생활을 평화롭게 지속하려면 부부관계가 새롭게 설정돼야 하는 이유다. 어떻게 하면 부부가 슬기롭게 이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3가지 측면에서 살펴본다.
(1) 자신과 상대를 파악한다
모든 문제 해결의 출발은 나 자신과 상대를 아는 일이다. 나와 상대가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를 다시 한번 살펴봐야 한다. 각자의 성격과 취향, 라이프스타일은 인생 후반부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중요하다. 예를 들어 거주지를 결정하는 데는 도시형인지 전원형인지를 따져 봐야 하고, 여행할 때는 모험과 액티비티를 즐기는지, 휴식이나 연박 체류를 원하는지 선호 스타일을 비교해 본다.
나와 아내는 같은 듯 다르다. 둘 다 안전과 안정 추구형이라는 점은 비슷하지만 나는 조금 더 변화와 이벤트를 선호하는 편이다. 아내는 뭔가에 한번 꽂히면 깊이 빠져드는 ‘몰입형’인 데 반해, 나는 새로운 일을 궁리하고 꾸미는 걸 좋아하는 ‘계획형’이다. 아내는 시를 좋아하면서도 글을 쓸 때는 이야기와 디테일에 강하다. 수다계 달인의 경지라고 할까. 반면에 나는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진행하는 걸 즐긴다. 에세이를 쓰면서도 3가지, 5가지... 식으로 쓴다. 지금 이 글처럼.
(2) 서로 만족할 만한 관계를 설정한다
서로의 취향과 스타일을 알았다면, 적절한 거리와 균형, 관계와 역할의 정립을 고려한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따로 또 같이’를 추구하는 것이다. 함께할 것과 따로 할 것을 나누는 게 우선이다. 집안일은 당연히 큰 비중을 두고 서로 나눠야 한다. ‘따로’의 원칙에서 중요한 건 시간과 공간의 적절한 관리다. 꼭 같이할 때가 아니라면 시간의 재량을 상대에게 부여하고, 동시에 공간의 분리도 보장하는 것이다.
시간문제에서는 하루 세 끼니를 어떻게 처리하는지가 의외로 중요하다. ‘삼식이 인생’(하루 세끼를 집에서 먹는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피하는 게 상책이다. 아내에게 자유가 필요한 시간에 자신도 외부에서 한 끼를 해결하면 된다. 공간 문제에선 집과 놀이터의 분리가 중요하다. 집은 기본적으로 가족과 공유하는 휴식 공간이다. 일터와 놀이터는 집 밖에서 찾는 게 좋다. 가장 바람직한 건 외부에 나만의 아지트를 만드는 것이다.
아내는 ‘집순이’다. 친숙한 공간에서 안정감을 느끼며 원하는 데 몰두하는 스타일이다. 나는 웬만하면 아침 식사 후 ‘삼식이’를 피해 집을 나선다. 대개 홍대 앞이나 남산의 도서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도서관은 나의 아지트, 놀멍쉬멍하면서 공부와 밥, 커피까지 해결하는 최적의 놀이터다. 인생 후반부에는 혼자 노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아지트를 오가면서 나 같은 퇴직자들과 자주 스친다. 혼자든, 아내와 함께든 나는 오늘도 잘 놀고 있다.
(3) 날마다 공감하고 수시로 표현한다
나이 들면서 필요한 것 중에 ‘감사력’과 ‘표현력’이 있다. 특히 중장년 남자들에게는 크게 부족한 부분이다. 나 같은 남자들의 단톡방은 대개 리액션 없이 조용하다. 답답할 때가 많다. 오랫동안 집단 속에서 튀지 않은 채 살아온 탓이 아닐까 싶다. 뭔가에 공감하거나 마음을 나누는 데도 서투르다. 대놓고 속마음을 드러내는 일은 대체로 자제한다. 살아온 관성의 법칙이 얼마나 무서운지 실감한다.
인생 후반부는 달라져야 한다. 심신이 점점 약해지는 노후엔 일상의 위로와 공감이 큰 힘이 되기 때문이다. 가까이 있는 가족은 최고의 안전망이고 최후의 피난처 역할을 한다. 배우자와 가족은 먼 길을 함께 가는 인생 여행자로 소중하게 대해야 한다.
좋은 일, 고마운 일이 있으면 나는 아내와 주위 사람에게 수시로 마음을 표현하려 한다. 사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내 변화가 놀라울 때가 있다. 나이가 들고 세상을 알수록 사람의 마음이 고맙고 소중하다는 걸 실감한다. 60이 넘어서야 조금씩 철이 드는 것 같다. 뭔가 내 마음을 나누면 절로 기분까지 달라지니 이중으로 좋은 일이다.
최고의 인생 친구를 소중하게
미래에셋 은퇴연구소는 노후의 5대 리스크를 말한다. 자립하지 못한 성인 자녀, 중대 질병, 금융 사기, 창업 파산, 황혼이혼이다. 나이 들어 혼자되면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 빈곤이나 고독사의 위험도 따른다. 그만큼 배우자와의 원만한 관계는 인생 후반부에 중요하다. 부부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지혜로운 대처가 필요하다.
인생을 살면서 많은 친구를 만난다. 그중에서도 배우자는 마지막까지 함께 가는 최고의 동반자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할 일이다. 사실은 삶의 모든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