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칸 반도의 화약고 - 2
얼마 전 영화 ‘대부’를 다시 보았다. 오래도록 최고의 명작으로 꼽히는 영화이니 새삼스레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서 필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나게 하는 영화였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장의사 보나세라는 마피아 보스, 비토 코를레오네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다. 딸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거다. 하지만 비토는 보나세라의 요구를 단번에 들어주지 않는다. 보나세라가 그간 자신을 존중하지 않았고, 필요한 때가 돼서야 찾아왔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 장면에서 비토의 캐릭터가 잘 드러난다. 그는 단순히 힘을 휘두르는 인물이 아니라 상대를 존중할 줄 알고 인간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면서 자네가 내 친구로 왔다면 놈들은 당장 마땅한 죗값을 돌려받았을 것이고, 자네처럼 정직한 자에게 적이 있다면 곧 나의 적이 되었을 거라고 말한다. 그러자 보나세라가 비토의 손에 입을 맞추며 친구가 되어 달라고 간청한다. 비토에게 중요한 것은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거래가 아니라 신뢰를 기반으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가 "언젠가 내게 도움을 줄 때가 올 것이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인간관계가 상호 의존적이라는 것을 상징한다.
비토 같은 성격을 지닌 인물은 어디에나 꼭 있다. 동네의 거의 모든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타고난 친화력 덕분에 누구와도 쉽게 호형호제할 수 있는, 능수능란한 대인 관계 능력을 지녔다. 거기에 더해 지역의 공권력과도 가까운 사이여서, 동네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문제로 경찰에 잡혀간 사람을 쉽게 빼내기도 한다. 그들은 법의 테두리를 넘나들면서, 자기 영향력을 통해 남들이 할 수 없는 일을 조용히 처리하기도 한다. 발전한 사회일수록 시스템으로 작동한다지만, 이런 사람들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사람이 사는 세상이어서 그렇다.
생각해 보면 삶은 많은 사건과 사고로 가득 차 있다. 어느 날 비토 같은 사람을 찾아가 부탁해야하는 상황이 찾아올 수도 있다. 그런 일이 나에게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해서는 안 된다. 그런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고, 나에게도 일어났다.
나를 그토록 (굴욕적으로) 무섭게 했던 코소보 소총 사건 직후의 일이다. 죽을 뻔한 위기에서 벗어난 우리는 호텔로 돌아왔다. 저녁 식사 시간에 다시 모이기로 하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손과 발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일단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야 했다. 침대에 누워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 소요 사태 때 촬영한 영상을 편집하고 있었다. 그때 옆 방에 있던 기자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감독님 잠깐 나갔다 와야 할 것 같아요. 코디네이터가 코소보 경찰에게 잡혀 있답니다.”
내 귀를 의심했다. 이게 무슨 황당한 일인가. 그 난리통에서 벗어난지 얼마나 됐다고. 누구보다 코디네이터는 다른 사람에게 해코지를 할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 발칸 지역으로 출장 갈 때마다 여러 번 같이 일을 했고, 베오그라드 대학에서 박사과정 중인 착실하고 심성이 바른 사람이었다. 그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경찰에게 잡혔는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나는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신분증과 기자증을 챙겨서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도착해보니 코디의 얼굴이 핏기 없이 파리해 보였다. 일부러 야비한 맛을 섞은 말투로 되묻는 경찰 앞에서 야단맞은 아이처럼 풀이 죽어 있었다.
“죄송합니다”
우리를 보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전말을 물어보니 산책 중에 거리 사진을 찍은 게 전부라고 했다. (그는 평소에도 풍경과 음식 사진 찍는 것을 즐겼다.)나는 경찰이 그에게 스파이 혐의를 씌우려 하다는 의심이 들었다. 코소보에선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만큼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우리가 머물렀던 2023년 9월에는 세르비아계 무장단체 약 30명이 코소보 북부의 세르비아계 마을인 반슈카 근처에서 도로를 봉쇄하고 코소보 경찰과 교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관 한 명이 사망하고 여러 명이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세르비아계와 알바니아계의 갈등은 내전으로 번질 양산을 보였고, 이를 중재하기 위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평화유지군을 파병한 상태였다.
“당신들 민주주의 국가의 경찰 아냐? 영장도 없이 이렇게 사람을 체포한다고? 우리는 저널리스트라고!”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해 보려던 기자의 도발이 경찰을 자극했다. 그도 코디네이터와 함께 체포될 처지에 놓였다. 나는 현장을 빠져나와 누구라도 붙잡고 도와달라고 해야 할 상황이었다. 운전기사가 있었지만, 그는 세르비아 출신인 관계로 문제를 더 키울 소지가 있었다. 나는 생면부지, 낯선 도시에서 하루를 잘 마쳤다고 생각했던 시점에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는 듯한 피로감을 느꼈다. 사정을 이야기할 곳이라곤 호텔밖에 없었다. 사실 호텔이라고 하기엔 시골의 작은 모텔 정도의 규모였다.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리셉션에 앉아 있던 젊은 직원은 그의 아버지를 불러왔다. 아버지가 이 호텔의 주인이었다. 부리부리한 눈에 깊게 팬 주름, 얼굴 근육이 뻣뻣하게 굳어서 약간은 일그러진 듯한 표정. 한눈에 봐도 강해 보이는 외모였다. 그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아들을 불러 나에게 전할 말을 통역하라고 시켰다.
“너의 친구들이 어디로 잡혀갔는지 알았다. 나랑 같이 경찰서로 가자!”
연식이 오래된 그의 벤츠를 얻어 타고 경찰서 앞에 도착했다. 붉은빛이 서쪽 하늘에 물들고 있었지만, 무장한 기동대는 아직 할 일이 남은 듯 바쁘게 움직였다. 이따금 지나가는 궤도형 장갑차의 소음이 공기 중에 무겁게 울렸다. 호텔 주인은 정문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누구를 부르지도, 찾아가려 하지도 않고 그저 서 있었다. 뭐 하고 있는 건지 궁금했다.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으니, 답답한 시간만 흘러갔다.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서서 콧구멍을 딱딱하게 부풀렸다 풀었다를 반복하며 할금할금 눈치만 살폈다.
그런데 살벌하기만 하던 경찰서 분위기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호텔 주인을 알아본 경찰들이 지남철에 쇠붙이 붙듯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다가와서는 악수를 청하고, 안부를 물었으며, 계급이 높아 보이는 나이 든 경찰은 긴 대화를 나눴다. 그들의 말로 나누는 대화를 알아들을 수 없으니 나는 머릿속으로 이런 상상을 했다.
“아이고 혱님 안녕하셨는가잉?”
“오랜만이제 아우! 나야 잘 지냈제. 자넨 가족들 다 건강하당가? 애들 공부는 잘 하고잉?”
“혜잉님 덕분에 우리 집은 아무일 없이 잘 지내고 있소잉.”
“큰아들놈 요새는 싸움질 안혀?”
“예 혱님이 잘 챙겨주신 덕분에 좀 사람다워졌는디요.”
“그라제 그라제.”
“그런디 혱님 여그에는 무신 일로 오셨소?”
“어떤 시방놈이 우리 호텔 손님들을 여그로 잡아왔다고 해서 내가 따지러 왔제.”
“아니 어떤 시방놈이 그라요…”
“손님 양반들 좋은 일 하시는 분들이니까 얼릉 풀어주쇼!”
“예 혱님, 당장 조치하겠소잉.”
호텔 주인이 담배를 입에 물자, 누군가 재빠르게 담뱃불을 붙였다. 우리 일행을 체포한 그 경찰이었다. 호텔 주인 앞에선 한없이 공손해 보였다. 호텔 주인이 나를 불렀다. 그가 손짓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기자와 코디네이터가 계단을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내가 필요해서 그를 찾아간 것은 맞고, 상대를 존중하느냐 마느냐를 묻고 따질 정도의 관계가 쌓인 것은 아니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친구인지 구분할 필요도, 마땅한 죗값을 물어야 할 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단지 호텔 주인과 투숙객의 관계일 뿐인데, 그는 곤경에 빠진 우리를 성심껏 도와줬다. 나이 지긋하고 여기저기 발이 넓은 그가, 이 지역의 실세인 것은 분명했다. 그가 도덕적으로 타당한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혼란한 이 도시에 그의 힘이 나쁘게 쓰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어쨌든, 동료들을 스파이 누명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만으로도 그의 오른손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오 나의 갓 파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