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이 지난간 자리에 남은 것 - 3
우리는 기레기라는 말을 언제부터 사용했을까? 인터넷에 검색해 봐도 누가, 언제 처음 사용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명확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대략 2010년대 초반부터 쓰기 시작했다는데, 내가 이 단어를 알게 된 것은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였다. 그 당시 언론이 저지른 행태에 대해선 여기서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기레기’의 정반대에 있는 말이 ‘기자다운 기자’라고 했을 때, 사회가 보편적으로 기대하는 ’기자‘는 무엇인지, 고민해 볼 필요는 있다. 직업을 가르키는 명사 뒤에 ‘-다운’을 결합하여, 앞에 가져다 놓으면, 그 직업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수식어 중 최상의 형용사가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선생님다운 선생님’, ‘의사다운 의사, ’대통령다운 대통령‘ 등 모두가 공통으로(거의 본능적으로) 해당 직업의 역할을 완벽히 이해하고, 기대하는 바도 암묵적으로 합의가 되어있기 때문에, 수식의 의도가 헷갈리지 않고 전달된다. 하지만 기자의 경우는 복잡하다. ‘기레기’라는 인식이 팽배해지면서 사람들이 ‘기자’에게 기대하는 역할을 파악하기 어려워졌다.
나는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기자’의 역할을 실천해 보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기자에 대한 불신이 너무 컸다. 뉴스에서 재난 혹은 사고 소식을 접할 때마다 사람들의 분노는 들끓었다. 양치기에게 속은 마을 사람들이 늑대가 양을 잡아먹든 말든 외면했던 것처럼, 믿지 않았다. 그리고 불신은 불감을 낳았다. 슬픔 당한 자를 위해 함께 울어줄 여유 따윈 없었다. 가시를 세우고 주변을 경계했다. 그러다가 위협이 감지되면 날카롭고 뾰족한 것이 몸 밖으로 튀어나와 아무나 찌르고, 할퀴고 다녔다. 그래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대한민국 사회는 집단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잠을 자고 있는데 스마트폰 벨이 쉴 새 없이 울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베갯머리를 더듬거렸다. 스마트폰 블루라이트가 밤하늘에 쏘아 올린 섬광처럼 어두운 방을 밝혔다. 그 때문에 옆에서 자던 아내도 덩달아 깼다. 시큰거리는 눈을 비비며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4시. 약간의 요의를 느끼긴 했지만, 맨살에 닿아 착 감기는 이불 속의 안온함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여보 무슨 일이야? 누가 이른 새벽부터 전화하는 거야?” 아내가 물었다.
나는 일부러 전화 받는 걸 뭉개고 있었다. 이 전화를 받으면 내일 아침에는 집이 아닌 다른 곳에 가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아내까지 깨운 마당에 전화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감독님! 지금 바로 부다페스트로 가야 합니다. 유람선이 침몰했는데 한국인이 많이 탑승했대요.”
2019년 5월 29일,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가로질러 흐르는 다뉴브강에서 한국인 관광객 33명과 승무원 2명을 태우고 야경 투어를 나선 유람선이 후방에서 속도를 높여 따라오던 대형 유람선과 충돌해 침몰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유람선에 탑승했던 35명 중 7명만 구조되고, 나머지 28명은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 수색, 구조 작업은 헝가리 당국과 한국 정부의 공조로 진행됐다. 사고 당시 비가 내리고 있었고, 유속이 평소보다 빨라 사고 가능성이 높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다뉴브강의 수위가 높아져 수색 작업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 때문에 구조와 수색 작업은 사고 발생 후 한달이 지나도록 계속됐다.
세월호 참사를 그대로 재연한 듯한 사고였다. 아물어가던 상처에 다시 통증이 느껴졌다.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언론사가 부다페스트로 기자를 보냈다. 사고 현장 주변엔 생방송을 기다리는 뉴스팀들이 줄을 지어 카메라를 세웠다. ‘기레기’라는 부끄러운 별명을 얻은 한국의 언론은 조심스럽게 사고에 다가가려고 했다. 세월호 때와 같은 허위 보도는 사라졌고, 구조 상황의 어려움을 전하는 보도에 집중했다. 하지만 카메라 뒤에서의 태도가 문제였다. 카메라 앞에서 담담하게 사고 소식을 전하던 서른 살 전후의 젊은 기자들은 카메라가 꺼지자, 삼삼오오 떼를 지어 수다를 떨고, 음식을 먹고, 서로의 옷매를 평가했다. 소속 언론사가 다른데도 서로를 선배, 후배로 칭하며, 친목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입맛이 개운치 않았다. 매일 반복되는 현장 상황이 지루하고, 장기간의 해외 출장이 힘들어서 그랬겠지만, 스물여덟 명이 안타깝게 수장된 참사 현장을 앞에 두고도 그랬어야 했나 묻고 싶었다. 메말라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20년 차 기자가 나에게 말했다.
“감독님은 유럽에 계셔서 잘 모르겠지만, 한국에선 더 가관입니다. 요즘 젊은 기자들은요, 돈 많은 부모 만나서 좋은 대학 들어가고,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어요. 요즘은 옛날처럼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가 아니잖아요. 그러니 무슨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겠습니까? 나도 기자지만 기레기라는 말 들어도 할 말 없죠.”
자조 섞인 그의 말을 들으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개를 끄덕이는 게 전부였다. 대화의 여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보다 더 묵직한 인간적인 슬픔이 밀려왔다. 침몰한 유람선에 탑승했던 유일한 미성년자의 시신이 수습됐다는 소식이었다. 객실 입구에서 50대 여성과 6세 아이를 발견했는데 구조요원이 발견할 당시 할머니가 손주를 품에 안고 있었다고 했다. 그 소식을 듣고 온몸에 조용히 소름이 돋았다.
그날 밤 술을 많이 마셨다. 빨리 이 길고 지난한 현장을 떠나고 싶었다. 나는 답답한 마음을 진정시키려 산책하러 나갔다. 동료 기자가 따라나섰다.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우리의 감정엔 아랑곳하지 않고 부다페스트의 야경은 속절없이 아름다웠다. 걷다 보니 불을 밝힌 유람선이 다뉴브강의 수면 위를 미끄러져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어느새 또 현장이었다. 강변으로 밤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희생자를 추모하는 촛불을 밝혔다. 6살 아이를 위한 선물, 곰 인형이 놓여져 있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리려는 것을 간신히 목구멍으로 삼켰다. 그리고 옆을 봤는데 동료 기자가 흐느껴 울고 있었다. 그러자 나도 무장해제가 되어 울기 시작했다. 우리는 한참을 울기만 했다. 시커멓게 일렁이는 수면 위로 작은 불빛이 튀어 올랐다가 다시 어둠 속으로 날아가 사라졌다.
우리의 눈물이 메마른 감성을 조금이나마 적셔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