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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환 Oct 27. 2024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

재난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 - 2

재난 현장에 가면 인간의 바닥을 보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바닥’은 중의적인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불의의 사고를 당해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 느끼는 ‘바닥’이다. 손때 묻은 세간살이를 하나라도 건져보려고 페허간 된 집터를 파헤치던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가졌던 것 중에 혹시 모를, 남아있는 것을 찾기 위해 손과 발에 흙을 묻혀가며 바닥을 기어다녔다. 그는 망연자실한 가운데 생각했을 것이다. 내 인생에 이보다 못한 바닥은 없을 거라고.

또 다른 하나는, 잃은 자의 남은 것마저 빼앗으려는 사람에게서 드러나는 ‘바닥’이다.

전쟁터보다 더 처참한 광경으로 변해버린 골목길에서, 광택 나는 세단을 몰고 다니며 동영상을 촬영하는 사람을 목격한 적이 있다. 타이어가 굴러가면서 튀는 파편들이 가까스로 서 있는 벽을 쳐서 무너뜨릴까 위태롭게 바라봤다. 그들은 재난이나 위기를 조회수와 수익을 위한 콘텐츠로 사용하는 데에 망설임이 없어 보였다. 그런 사람의 근본이 드러나는 상황을 묘사할 때 ‘바닥이 드러난다’라고 표현한다. 현장에서 촬영하는 내내 ‘바닥’이 뇌리를 맴돌았다.


산비탈 마을에서의 촬영을 마치고 마라케시의 구시가지, ‘메디나’로 향했다. 그곳은 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도시답게 다양한 문명과 문화가 혼합된 도시였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축물이 유명해 ‘붉은 도시’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유네스코는 그 독특함을 보존하기 위해 도시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그러나 도시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지진을 피해 갈 순 없었다. 붉은 건축물 곳곳에 훼손된 흔적을 남겼다. 집을 잃은 사람들은 가족들과 함께 힘겨운 노숙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상가 처마 밑에서 텐트도 없이 담요 몇 장에 의지해 밤을 보냈다. 나는 그들을 지나 좁고 복잡한 골목길을 따라가 보았다. 향신료, 가죽 제품을 판매하는 상점들과 장인이 직접 만드는 수공예품 공방들이 밀집되어 있었다. 상점들은 다시 영업을 시작했고, 관광객들도 빠르게 늘어났다. 하지만 사람들이 다니는 길은 여전히 위태로웠다. 추가 붕괴를 막기 위해 벽과 벽 사이에 통나무를 괴어둔 곳이 곳곳에서 보였다.


제마 엘 프나 광장에 장이 섰다. 마라케시는 자기 명성에 걸맞게,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음악가가 사람들을 모으고 이야기꾼이 뱀을 부리며 시선을 사로잡았다. 흥겨운 아라비안 리듬에 맞춰 춤을 추는 무희들이 흥을 돋웠다. 군침을 당기는 고기 냄새가 사방에서 피어오르자, 어디 숨었다가 나타난 사람들인지 모를 인파가 몰려들었다. 과일 주스와 달팽이 수프를 파는 노점상 앞에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언제 이 도시에 재난이 덮쳤었는지 착각이 들 정도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상인과 관광객이 어우러지는 모습이 나는 불편했다. 아무리 활기가 이곳의 일상이라지만, 조금만 고개를 돌려보면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이 보일 텐데. 그냥 회피하기로 한 것일까?

한쪽에선 먹고 자고 싸는 문제 때문에 예민해져서 고성이 오가는 일이 많았다. 결국 화장실 앞에서 싸움판이 벌어졌다. 화장실 사용 시간에 대한 생각이 달라서 벌어진 일이었는데, 절박한 생리적 욕구와 다른 사람을 배려해야 하는 이성이 충돌해서 일어난 싸움이었다.

그렇게 아귀다툼을 벌이는 사이, 다른 한쪽에선 휴대용 카메라로 그 모습을 촬영하기에 바빴다. 누구 하나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주변에 사람이 많아도 각자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도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방관자였다. 소통하지 못하는 권력 때문에 구조의 골든 타임도 놓치더니 아이들이 무너진 폐허 더미 위에서 위험하게 뛰어놀고, 사방에 사체가 썩어 악취가 진동하는데도 기본적인 안전 통제도 못하는 나라, 그리고 단 며칠조차 고개를 숙여 희생자를 추모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참담한 심정이었다. 나는 서둘러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 차 창밖의 부서진 도시 위로 내 얼굴이 겹쳐 보였다. 문득 그러면 나는 방관자가 아니었던가 자문했다. 참담한 심정을 느낄 때까지 내가 한 것이라곤 보고 듣고 생각하고 판단해서 정죄한 것이었다. 비디오 저널리즘이라는 허울을 뒤집어쓴 방관자! ‘당신을 도와주러 왔다.’는 말 뒤에 숨겨진 진짜 의미는 ‘(나를 위한)좋은 영상 만들 수 있도록 협조하라‘는 부드러운 협박이었을지 모른다. 따지고 보면 이 험한 곳까지 내 돈을 들여서 온 것도 아니고 촬영의 대가로 돈을 벌어가면서 감히 돕는다는 말하다니. 항상 그랬다. 그들과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치고 뷰파인더 뒤에 서서, 오만하게 관망했다.

위선자는 다름 아닌 나였다. 이렇게 나의 ‘바닥’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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