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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씨 Jun 07. 2018

잘못 걸린 전화입니다.

전화번호를 확인하세요.

#1


"저기... 나야.... 수진이"


"...?"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 그냥 아무 말하지 말고 들어줄래?"


"네..?"


"나.. 정말 오래 힘들었거든. 성수 네가 지연이랑 요즘 자주 만나고 있는 거 애들한테 얘기 들었어. 잘은 모르겠지만 너도 지연이 싫어하지 않는 거 나도 알고 있고..."


"..... 저.."


"아... 참... 이런 말 진짜 민망해서 못하겠다. 그래도 그냥 말할래... 나... 그동안 너 계속 좋아하고 있었어."


"저기..."


"너 무슨 말하려는 줄 알아. 황당하겠지. 하지만... 사람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자로 재듯 예상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나도... 정말 이렇게 될 줄 몰랐어. 내 마음 이해 못해도 할 수 없지만... 그냥 받아 주면 안 될까?"


"저..."


"지금 바로 대답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한 번만... 잠깐이라도 생각해보고 전화해 줄래? 나... 그냥 오늘 하루라도 '기대'라는 걸 해보고 싶거든. 물론 내일부터는 모든 게 다시 확실해지겠지만 말이야..."


"..."


"나... 끊을게... 잘 자고..."


"저.... 저기요! 잠깐만."


".... 어?"


"저기 죄송하지만… 전화 잘 못 거셨...는데요?"


순간 흐르는 어색한 침묵.


"... 이거 성수 전화 아닌가요?"


"네... 이거 010-XXXX-XXXX 거든요?"


젠장... 이럴 때는 뭐라고 해야 되는 거지. 얼굴도 보이지 않는 상황인데 왠지 절대 나타나지 말아야 할 곳에 발을 디뎌버린 어색함이라니.


"죄송합니다. 아까 말을 못 하게 하셔서..... 중요한 전화 같은데..."


잠시 흐르던 정적을 비집고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후..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전화번호를 잘못 눌렀나 봐요..."


"네..."


"오히려 잘 된 거 같네..."


"네?"


"하지 말아야 할 말인데 그래도 꼭 하고 싶은 말을 대신 들어주셨네요.."


"....."


"미안합니다.. 그럼.."


딸깍... 한동안 어색한 공기가 흐르던 내 방엔 익숙한 정적이 흐르기 시작했지만 수화기를 들고 있던 내 손은 한참 동안 고정되어 있었다.

힘내라고라도 말해줬어야 했을까? 그런 말을 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생판 모르는 남자의 격려 따위가 무슨 도움이 되었겠냐만...

어두운 골목 뒤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아이를 그냥 내버려두고 발길을 옮길 때의 그 씁쓸함이 입안에 묻어나 난 괜히 가슴이 쓰렸다.


#2


자정. 그녀의 고백은 제대로 도착했을까? 혹은 수취인 불명으로 분류되어 오랜 응어리로 그녀의 가슴에 남아 조용히 지워져 갔을까?


세상에 바보들이 참 많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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