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날은 이렇게 운동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니 창밖이 온통 하얗게 변해 있었다. 아침 일찍 큰아이와 보스턴을 다녀오는 길에 눈이 그칠 줄 알았는데 눈발이 점점 굵어졌다. 좋아하는 빵집에서 사 온 에그샐러드 샌드위치, 햄앤버터 샌드위치, 크롸상을 점심으로 먹고 온 식구가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렸다. 배는 적당히 부르고, 밖에는 눈이 펑펑 내리고, JVKE 노래가 흘러나오니 책 읽기 딱 좋은 날이었다.
책상 겸 식탁에 둘러앉은 나, 남편, 큰아이는 뭔가 몰두할 게 있는데 여섯 살 작은 아이는 어딘가 불편한 구석이다. 식구들과 눈싸움하며 놀고 싶다고 조르기 시작했다. 아침 9시부터 아빠와 눈을 치우고, 눈싸움하고, 눈사람을 만들고, 썰매를 탔지만, 눈이 멈추지 않으니 '또'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온 식구가 스키복으로 환복하고 뒷 마당으로 달려갔다. 우리 집에는 눈오리 대신 축구공을 만드는 집게가 있었고, 아이들은 축구공을 닮은 눈 폭탄을 잔뜩 만들어놓고 나와 남편을 향해 던지기 시작했다. 눈싸움이 시작되었다. 손으로 눈을 뭉쳐보려 했지만, 생각보다 눈은 펄펄 날리기만 해 동그랗게 뭉쳐지지 않았다. 아이들을 향해 뭉친 눈을 몇 번 던지다가 눈 치우는 삽을 들고 이리저리 눈을 치웠다.
이런 모습을 보던 남편이 웃으며 한마디 던진다.
"눈밭에서 놀라고 했더니 왜 일을 해? 와서 같이 놀자."
눈 치우는 삽을 한쪽에 세워두고 다시 아이들 쪽을 향해 걸어가며 생각하니 어릴 때 눈밭에서 뛰어놀았던 기억이 없다. 나는 눈이 거의 오지 않는 도시에서 나고 자랐고, 눈이 오면 온 도시가 멈추곤 했다. 스키장에도 흥미가 없었다. 십 년 전 남편과 스키장을 갔던 날이 내 생애 첫 스키장 방문이었다. 중급자 코스에서 다리를 A자 모양으로 하고 내려오며 이게 내 인생의 마지막 스키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경사를 내려갈 때 속도감이 공포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2년 전 미국 동부로 이사한 후, 눈밭에서 제대로 노는 법을 배우고 있는 사람은 아이들이 아니라 나다. 눈밭에서 놀아본 기억이 없는 나에게 눈밭에서 노는 것은 이런 상상을 먼저 하게 했다.
1. 젖은 양말과 장갑이 발가락과 손가락을 꽁꽁 얼게 만든다.
2. 너무 추운 나머지 온몸에 힘이 들어가고 긴장한 탓에 지나친 피로감을 느낀다.
3. 두껍고 무거운 옷을 입고 움직이느라 노는 게 아닌 노동을 한 듯 기운이 사라진다.
두시간 가량 아이들과 눈싸움을 하고, 눈썰매를 타며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던 불편한 상상들을 하나씩 지울 수 있었다.
방수가 되는 신발과 장갑은 생각보다 성능이 꽤 좋았다. 수족냉증이 있지만 나의 손끝 발끝은 그리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지 않았고, 덕분에 노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눈이 오면 날씨가 포근해진다더니 정말이었다. 칼바람도 잦아들고, 공기가 부드럽게 느껴졌다.
아이들 눈썰매를 끌어주고, 아이들이 끌어주는 눈썰매를 타고, 눈싸움하느라 눈밭에서 뒹굴면서 아이들과 똑같이 재미있게 놀았다. 내 표정이 밝아서였을까, 함께 눈썰매를 끌고 오르막을 걸어 올라오던 작은 아이가 나에게 말을 건넸다.
엄마, 지금 운동하듯이 노는 거지? 눈 올 때 노니까 정말 재밌지?
아이들은 내가 운동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눈에서 노는 것을 운동한다고 생각하면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마치 내 마음을 들여다본 것처럼.
"응, 너무 재밌어. 눈썰매 타기가 이렇게 신날 줄 정말 몰랐어."
아이들과 오르막길을 수도 없이 올라 눈썰매를 타고 내려왔다. 눈밭에 털썩 주저앉아 놀기에 익숙해질 때쯤 해가 졌다. 젖은 옷들과 털모자, 장갑을 빨래 건조대에 널어놓고, 서둘러 노란 배추를 송송 썰어 어묵탕을 끓이고 우동면을 삶아 저녁을 했다.
아침에 보스턴에 나갔을 때 눈을 맞으며 달리는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눈비가 내리는 날 운동화를 어떻게 관리할까? 젖은 운동화를 제대로 말리지 않으면 냄새가 날 텐데, 운동화를 여러 켤레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가 보다, 요즘처럼 눈비가 자주 오는 때에 운동화 세탁을 하고 건조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닐 텐데 하는 생각들이 팝콘처럼 튀어 올랐다.
눈비 속에서 달리기하는 사람들을 보며 '뭔가 하려면 전후로 해야 할 일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밥 한 끼를 해 먹으려고 해도 재료 준비, 요리, 설거지, 주방 정리까지. 그렇게 정성을 들인 식사를 30분 만에 끝내는 게 왠지 섭섭하기도 하다.
이런 준비 과정이 불편하고 힘들다면 도전할 수 있는 일은 자연히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 눈비를 뚫고 달리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만약 내일 신고 나갈 운동화가 없다면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다. 운동화를 빨 여력이 없거나 대신 빨아줄 사람이 없다면, 해가 좋은 날에만 뛰어도 충분하다. 중요한 건 주어진 순간을 충만한 기쁨으로 즐기는 것이다.
눈이 와서, 아이의 일정을 소화하느라 요가원에 갈 시간이 없어서 운동할 수 없다고 생각한 날이었다. 아이들 덕분에, 눈 덕분에 눈밭에서 실컷 뛰어놀았다.
잠들기 전 아이가 한마디 건넸다.
"엄마, 오늘은 최고로 멋진 날이야."
가만히 웃던 아이가 '가르릉 가르릉' 코까지 골며 잠dl 들었다. 아이의 이부자리를 매만지고 방을 나서던 나도 덩달아 고요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