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백한 주역. <2.중지곤괘重地坤卦>-단전과 대상전

by 오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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彖曰 至哉 坤元 萬物資生 乃順承天 坤厚載物 德合无疆 含弘光大 品物咸亨 牝馬 地類 行地无疆 柔順利貞 君子攸行 先迷失道 後順得常 西南得朋 乃與類行 東北喪朋 乃終有慶 安貞之吉 應地无疆

단왈 지재 곤원 만물자생 내순승천 곤후재물 덕합무강 함홍광대 품물함형 빈마 지류 행지무강 유순이정 군자유행 선미실도 후순득상 서남득붕 내여유행 동북상붕 내종유경 안정지길 응지무강


-<단전>에 말했다. 지극하도다, 땅의 기운이여! 만물은 곤원에서 비롯하여 태어나니 곧 순하게 하늘과 이어진다. 곤은 두텁게 만물을 싣는데, 덕이 끝없이 합하여 넓고 밝고 크게 품으니 온갖 사물이 다 형통하다. 빈마가 땅에서 무리를 지어 끝없이 행하는 것처럼, 유순하고 이정함이 군자가 행하는 바이다. 처음에 헤맬 때는 도를 얻지 못해도 나중에 순리를 따르면 항상 일정한 도를 얻게 될 것이다. 서남에서 벗을 얻으면 더불어 함께 나아갈 것이요, 동북에서 벗을 잃어도 마침내 경사가 있게 될 것이다. 끝이 편안하여 길하게 되니 한없이 땅의 섭리에 응하는 덕분이다.



중지곤괘의 <단전>은 중천건괘의 <단전>과 비교하면서 공부하면 도움이 됩니다. '대재 건원'과 '지재 곤원', '만물자시'와 '만물자생', '내통천'과 '내순승천', 이렇게 계속 대구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의미를 파악하는데 훨씬 수월해집니다.


만물은 하늘의 기운으로 시작되지만(始) 땅의 기운으로 태어납니다(生). 천지는 짝을 이루어 만물을 피워내는 것입니다. 하늘의 기운을 받더라도 생명체들이 태어날 수 있는 기운으로 땅이 소화해내지 못하면 생명체들 입장에서는 무의미한 땅입니다. 지구와 여타 태양계 내 행성들 간의 차이입니다. 물론 하늘에게는 다 그럴만한 뜻이 있을 것입니다. 생명을 기를 수 없는 무한의 암흑공간을 펼쳐 놓고 척박한 땅들을 빚어 놓은 이유 말입니다.


땅의 미덕은 두터움에 있습니다. 땅이 박하면(薄) 만물을 기를 수 없습니다. 만물을 품어 성장시키는 땅의 덕이 하늘을 그대로 닮아 후하니 품물이 형통하지 않을 턱이 없습니다. 빈마 곧 하늘의 이치는 고고하게 홀로 있지 않고 땅에 동화됩니다. 땅과 땅 위의 품물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늘의 이치를 저마다의 가슴 안에 품은 만물은 순리대로 살아가지요. 인간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인간 중에서도 천지의 이치를 알고 덕을 갖춘 군자만이 부드럽고 순하게 이로움을 펼치며 바르게 실천합니다.


괘사에 '선미후득'이 있었지요. 처음부터 진리를 깨우치는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다 배움과 깨우침의 지난한 과정이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천지의 이치와 섭리를 유순이정하게 따르려는 자세를 잊지 않고 끊임없이 실천하는 것입니다. '상常'은 명사로 쓰일 때 주로 '항상함'이라는 뜻으로 번역되는데 뉘앙스는 이해할 수 있을지언정 오늘날의 우리가 거의 쓰지 않는 표현이기에 어색합니다. 앞의 '선미실도'와 함께 보면 상이 도의 의미로 사용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설괘전> 7장에 '간지야艮止也'라고 했습니다. 간괘는 그치는 것입니다. 또한 5장에 '간동북지괘야 만물지소성종이소성시야 고왈성언호간 艮東北之卦也 萬物之所成終而所成始也 故曰成言乎艮 / 간은 동북방의 괘로, 만물이 마침을 이루는 곳이고 또 시작을 이루는 곳이기 때문에, 간에서 이룬다고 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서남득붕 동북상붕'의 참 의미란 서남의 음의 무리를 벗어나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동북의 양의 무리로 향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깨우침을 얻은 군자는 양의 세계로 나아가서 이로움을 펼쳐야 하지요. 그곳에서 새로운 시작이 열리는 것입니다.


하늘의 진리란 역동적인 궁극의 음의 성질을 띠는 것임을 앞에서 보았습니다. 역동성은 양의 성질을 띤 말(馬)에서 나옵니다. 곧 빈마는 음양의 속성을 모두 품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빈마라는 궁극의 음의 진리가 양의 세계로 확장해 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것이 음양의 조화요, 하늘이 꾀하는 질서와 균형의 핵심입니다.




象曰 地勢坤 君子以 厚德載物

상왈 지세곤 군자이 후덕재물


-<대상전>에 말했다. 땅의 형세가 순하니 군자는 이를 본받아 두터운 덕으로 만물을 싣는다.



중지곤괘의 <대상전>도 중천건괘의 그것과 대응합니다. 어려운 표현이 없지요.


<설괘전> 7장에 '곤순야坤順也'라고 했습니다. 땅은 순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과 땅을 생각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건괘와 곤괘의 모양에서도 분명히 드러나듯이 하늘은 양이고 땅은 음입니다. 낮은 양이고 밤은 음이며, 남자는 양이고 여자는 음이지요. 그런데 이것은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양 속에 음이 섞여 있고, 음 속에 양이 섞여 있지요. 온전한 양으로 구성된 남자도, 완전한 음으로 구성된 여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중천건괘의 극양과 중지곤괘의 극음이 함의하고 있는 것은 언제든 변화의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언제나 매순간 변화를 예비하고 있습니다. 특히 하나의 성질이 극에 달할수록 변화를 추동하는 힘 역시 계속 자라나게 됩니다. 하지夏至의 의미는 연중 낮의 길이가 가장 길다는 것임과 동시에 이제부터 밤의 길이가 점점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현상보다 더 중요한 것이 변화입니다. 낮이 가장 길다는 것보다 밤이 점점 길어진다는 사실이 앞으로 다가올 내일을 더 선명히 말해 줍니다. 주역이라는 텍스트를 공부하면서 우리는 '역易'이라는 글자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 멀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역은 곧 쉬운 것(易)입니다. 변화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해가 달로, 달이 해로 바뀌듯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자기만의 아집에 사로잡힌 채 '나답게'를 부르짓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스스로 변화하지 않으면 강제로 변화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타의적인 변화는 반드시 고통을 수반합니다. 여기에서 타他는 타인, 조직, 사회만이 아니라 하늘을 포함합니다. '나답게'의 환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나'를 아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는 실체를 자기라고 착각하고 그 허상의 이미지에 점점 고착되는 것이 '나답게'가 초래하는 위험입니다.


내가 끊임없이 변變하고 동動하는 존재임을 자각하면 내가 추구할 것은 '자연답게', '하늘답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변동하는 이유는 화化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연이 되고 하늘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화化에는 '거듭남'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가짜 나를 죽이고 진짜 나를 만나려면 변화를 시도해야 하며 그것의 방향을 하늘의 뜻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정도의 거듭남이 이루어집니다. 그 거듭남을 저는 인간이 달성할 수 있는 '아름다움'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름답다'는 '알음' 곧 '앎을 추구하는 성질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본시 그러한 것인 하늘의 이치를 닮으려는 실천적 앎입니다. 앞에서 진리란 역동적인 성질을 띤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 역시 역동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땅이란 그 역동성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현장입니다. 우리 눈앞에 매순간 전개되는 자연의 변화에서 우리는 진리를 자연스럽게 따르는 존재의 아름다움을 실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의 아름다움이야 말로 진정한 나로 향해 가게 하는 '我름다움'으로서의 '我다움'일 것입니다.


<설괘전> 11장에 '곤위대여坤爲大輿'라고 했습니다. 큰 수레입니다. 만물을 싣는 큰 수레와 같은 땅의 순한 형세를 본받아 두터운 덕으로 사람과 사물을 포용하려는 것은 군자의 자연스러움이며 아름다움일 것입니다.


주역의 각 괘 모양은 그 자체로 다양한 물상들을 만들어냅니다. 곤괘(☷)는 안이 비어 있으니 만물을 싣는 수레의 상이 자연스레 나오는 것입니다. 주역을 공부할 때마다 진정한 천재, 깨달은 자의 통찰이 몸속을 파고드는 느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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