潛龍勿用 陽在下也 見龍在田 德施普也 終日乾乾 反復道也 或躍在淵 進无咎也 飛龍在天 大人造也 亢龍有悔 盈不可久也 用九 天德不可爲首也
잠룡물용 양재하야 현룡재전 덕시보야 종일건건 반복도야 혹약재연 진무구야 비룡재천 대인조야 항룡유회 영불가구야 용구 천덕불가위수야
-'잠룡물용'은 양이 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현룡재전'은 덕을 널리 베푼다는 것이다. '종일건건'은 도를 꾸준히 실천한다는 것이다. '혹약재연'은 나아가도 허물이 없다는 것이다. '비룡재천'은 대인이 성취한다는 것이다. '항룡유회'는 가득 차면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용구'는 하늘의 덕이란 머리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상전>이 괘상을 풀이한 것이라면 <소상전>은 각 효사爻辭를 풀이한 것입니다.
주역 64괘 384효의 가장 첫 번째 효가 중천건괘의 초구입니다. 맨 아래에 잠겨 있는 양이기에 '잠룡'이라는 의미가 나온다는 것이죠.
'현룡재전 덕시보야'는 <문언전> 2절의 내용을 참고할 때 의미가 보다 선명히 드러납니다. '용덕이정중자야龍德而正中者也, 용의 덕으로 바르게 중을 얻은 사람이다', '덕박이화德博而化, 덕을 넓게 하여 감화시킨다'와 '군덕야君德也, 임금의 덕이다'에서 대인이란 덕을 갖춘 사람이자 덕을 펼치는 사람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효사와 <소상전>의 풀이가 직관적이어서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천덕불가위수야'에서 우리는 자격을 갖추지 못하고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함부로 자신을 드러내거나 과시하는 일은 하늘의 뜻과 어긋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퍼스널 브랜딩과 같은 용어에 너무 솔깃해서는 안 됩니다. 드러날 때가 되면 드러날 것이요, 드러나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는 대로 살면 그뿐입니다. 억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억지에는 반드시 부작용이 생기는 법이니까요.
<<논어>> 9편 <자한>편에서 공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後生可畏 焉知來者之不如今也 四十五十而無聞焉 斯亦不足畏也已 후생가외 언지래자지불여금야 사십오십이무문언 사역부족외야이 / 젊은 사람들은 두려워할 만하다. 어떻게 장래의 그들이 지금의 우리보다 못할 것이라고 하겠는가? 하지만 사오십이 되어도 들리는 것이 없다면 두려워할 것이 없다." 무슨 뜻일까요?
20대 초반에 이미 세계적인 거물 CEO가 된 사람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시대의 트렌드 상 앞으로도 젊은이들의 이른 성공 사례는 많이 쏟아져 나올 것이 틀림없습니다. 창의성과 창의성을 실체화할 수 있는 IT 기술 능력에서 기성세대는 가면 갈수록 젊은이들의 상대가 되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나이와 경험이 더 이상 사회적 성공의 주된 요인이 되지 못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큰 조직일수록 여전히 상명하복의 위계 질서가 강력하게 살아 있어 사회 초년생들의 숨통을 조입니다.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잠재력을 꽃피울 수 있도록 지원하는 문화가 사회 전반에 자리잡을 때 우리도 나이와 직급 같은 서열이 개인과 조직의 창의성을 질식시키는 폐단을 끊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젊음이 벼슬인 걸까요? 어디를 가나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청년'이라는 단어를 앞에 건 사업체들이 눈에 띕니다. 젊음 고유의 속성인 패기, 의식이 고착화된 기성세대와는 다른 도전정신, 싱싱한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정 등을 함축한 긍정적 속성의 단어이기 때문에 너도나도 사용하는 것일 테지요. 하지만 청년들은 알아야 합니다. 젊음은 한때이며, 세상이 소비하기에 좋은 '젊은 성공' 사례는 실상 극히 드물다는 것, 생각보다 금방 나이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공자야 학문 분야로 후생을 압축했을 것이기에 장래가 촉망되었던 후학이 나이가 들어서도 특별한 학문적 성과를 내지 못하면 그만큼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거나 재능이 모자랐음을 반증하는 것이므로 두려워할 만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사오십과 평균 수명 백세를 논하는 현 시대의 그것은 차이가 큽니다. 소수만이 교육을 받고 학문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그 시절과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자기 분야의 전문가로 거듭날 수 있는 지금은 차원이 다릅니다. 굳이 사무엘 울만의 '청춘' 개념을 인용하지 않아도 더 이상 나이는 젊음을 구분하는 잣대가 되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사오십 중년은 여전히 젊은 몸과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사오십에도 세상이 알아주는 성취를 이루지 못하거나 이름을 내지 못한 사람을 별 볼일 없는 것처럼 인식해도 좋은 근거로 저 구절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반대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두려움의 존재인 지금의 '청년'들도 곧 남다를 것 없는 사오십에 이를 수 있음을 염두에 두는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결코 나쁜 것도, 잘못된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든 젊은 시절에 자신을 알리기 위해 무리하게 기획하고 과도하게 드러내지 않도록 삼가야 합니다. 억지로, 무리해서 무엇인가를 시도하다보면 일종의 '뻥튀기'가 개입되기 마련입니다. 유명세 이면에 이익에 대한 도모가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다보면 나의 본질과는 다른 이상한 존재가 사람들 앞에 나와 있는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자신의 정체성과 이익을 맞바꾸면 삶 전체가 뒤틀리는 불행을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사오십이 아니라 육칠십에 드러나도 좋다는 생각으로 인생을 긴 호흡으로 살아야 합니다. 항룡유회가 들려주는 전성기의 의미를 <소상전>의 '천덕불가위수야'에서 다시 한번 되새기면 좋을 것입니다. 때가 되면 비가 오고 눈이 내리 듯 덕을 쌓은 사람이 자연스럽게 알려지는 것이야말로 하늘이 바라는 방식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