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후회 없는 인생을 위하여

by 오종호

https://search.shopping.naver.com/book/catalog/51628541624?cat_id=50005643&frm=PBOKMOD&query=%EC%9D%B4%EA%B2%83%EC%9D%B4+%EC%82%AC%EC%A3%BC%EB%AA%85%EB%A6%AC%ED%95%99%EC%9D%B4%EB%8B%A4&NaPm=ct%3Dm427q61c%7Cci%3D0074652986bb5d62e92a21355cad8c5f7b37fefa%7Ctr%3Dboknx%7Csn%3D95694%7Chk%3D39c22f5e594657be9c6b77f19f239433539fcf95


에너지, 그 오묘한 존재


사주 여덟 글자는 한 인간에 대한 광활한 정보의 보고다. 하늘로부터 부여 받은 운명의 범주, 사회와 가정 환경, 성격과 기질, 심리상태, 적성과 진로, 직업성, 인간관계, 성패의 시점, 부귀의 정도, 건강과 질병 등 사주팔자가 아우르지 않는 인간사는 없다. 다만 인간이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할 뿐이며, 지식의 심화와 통찰의 깊이에 따라 파악되는 정보의 양과 가치가 달라진다.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느냐가 인간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 사실상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관점에 대해 몸서리를 칠 정도의 거부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 이해한다. 눈에 보이지 않고 몸으로 느껴지지도 않으며 의미도 알지 못하는 무형 에너지의 모음이 한 사람의 출생 시점에 의해 정해진 채 그의 인생 전반에 걸쳐 현실의 삶에 개입한다니, 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예전의 나 역시 정확히 그들과 같은 인식 위에 서 있던 사람들 중의 하나였으니 그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이해할 뿐만 아니라 존중한다. 그들에겐 그들의 몸으로 감각되는 그들만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명리학의 본질을 깨우치기 이전에 내가 신조로 삼았던 가치관을 대변하는 영화 대사가 있다.


모피어스: Do you believe in fate, NEO? (운명을 믿나, 네오?)

네오: No. (아니오.)

모피어스: Why not? (왜 믿지 않지?)

네오: Because I don't like the idea I'm not controlling my life. (내가 내 인생을 통제하지 않고 있다는 견해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화 <매트릭스>의 이 대목에서 네오가 한 답변은 당시 나의 가치관과 정확히 일치했다. 나는 나 자신을 철저히 내 인생의 유일무이한 주인으로 여겼고, 내가 마음먹고 노력하는 한 그 어떤 것도 내 자유의지의 자발적 실천을 가로막지 못할 것으로 확신했다. 나는 세상의 기준에 부합하는 나의 이른 성공에 대해 단 한시도 의구심을 품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남보다 불리한 여건에서 남보다 부족한 시간을 악착같이 쪼개 실력을 키우고 잠재력을 끌어 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나의 20대에 바치는 절대적인 응원이자 나의 좌절과 방황, 영혼의 고통에 대한 담담한 위로이기도 했다. 내 삶의 편린을 슬쩍 엿본 사람들이 감히 평가할 수 없는, 매 순간을 오롯이 감당하며 살아남아야 했던 나 자신에 대한 무한한 신뢰이기도 했다.


눈앞에 다가왔던 성공이 찰나의 순간에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꿈꿨던 특별한 삶이 다시 평범한 현실로 회귀했을 때, 떠나간 신기루를 낚아채고자 직장을 박차고 나와 무리하게 사업을 감행했던 이후의 부침 있는 삶 속에서 나는 인생을 달라지게 하는 한끗 차이를 만드는 보이지 않는 힘을 막연히 감지했다. 내 마음을 채우고 있었던 네오의 신념 체계에 균열이 생긴 시기였다. 돌아보면, 내가 타고난 에너지들과 운에서 들어온 에너지들의 조합이 내 안의 욕망을 들끓게 하고 나의 심신이 그 폭발적인 에너지들의 힘에 의해 철저히 종속되었던 시절에 다름 아니었다.



에너지의 노예


믿든 믿지 않든 인간은 에너지들이 빚은 덩어리다. 육체 뿐만 아니라 정신도 마찬가지다. 정신은 육체라는 가시적인 물질 안에 담기는 비가시적 물질이다. 정신과 육체를 구분해서 인식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무형과 유형의 차이만 있다. 그 역시 인간의 기준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무형과 유형의 에너지들이 서로 소통하며 상호작용한다는 것이다. 육체가 죽으면 정신도 죽고, 정신이 죽으면 육체도 죽는다. 이 에너지들의 상호작용이 인간으로 하여금 특정한 심리 상태에 빠져들게 하기도 하고, 평소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무리한 선택을 하게도 만든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에너지의 노예다.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천성, 천부적 재능과 같은 표현이 존재하는 이유 역시 에너지가 부린 마법 때문이다. 오늘날의 첨단 과학기술의 산물들을 옛 사람들이 목격한다면 마법이나 기적과 같은 단어를 먼저 부르짖었을 것이다. 상상도 시대적 인식이라는 바탕 위에서 작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스마트폰이 과학과 기술의 산물로 수용되기 어려운 까닭은 그것이 과학과 기술에 대한 그들의 상상력 한계 너머에 있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광대한 우주공간을 뚫고 어느 날 지구의 하늘에 UFO들이 떠 있는 영화 같은 일이 벌어지면 우리의 입에서는 과학이나 기술이라는 단어 대신에 "믿을 수 없어", "믿기지 않아", "오 마이 갓" 등의 감정적 표현들이 저절로 튀어나올 것이다.


에너지의 노예라는 점에서 모든 인간은 공평하지만 노예의 등급에도 차별성이 있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수용해야 한다. 우선 노예라는 단어에 너무 민감해 할 필요는 없다. 우리 은하계의 이 태양계에 편입된 이래 공전과 자전 운동을 멈추지 않은 지구를 생각해 보면 간단하다. 지구는 철저히 종속된 인자라는 점에서 우주의 노예다. 하물며 평생 지구의 틀에 갇힌 채 살아가는 인간이 우주적 질서를 규정하는 에너지의 노예가 아닐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중요한 점은 에너지는 인간을 노예로 삼았지만 노예근성을 극복할 수 있는 자유의지까지 제공했다는 점이다. 곧 자유의지의 정도가 에너지로부터의 피지배성을 감소시키고 더 나아가 에너지의 활용을 가능하게 한다.



기획된 세계, 설계된 인간


그럼에도 우주의 에너지는 인간에게 차별적으로 적용된다. 시선을 우리 주변으로 한 번만 돌려 봐도 이 차별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나무가 뿌리내린 토양이 저마다 다르듯이 인간이 마주하게 되는 가정과 사회의 환경 역시 저마다 다르다. 우발적으로 이 세계에 던져진 것이라는 우리의 인식은 그래서 상식적이고 합리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명리학 공부가 진전될수록 그 어떤 것도 우연적이지 않다는 인식에 눈을 뜨게 된다. 이 세계가 거대한 초超 양자컴퓨터 속에서 구동되는 여러 겹의 입체적 게임 프로그램과 같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전생 역시 게임의 이전 퀘스트(quest)들로 비유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과거의 퀘스트들을 클리어한 내용에 따라 차등적으로 적용된 보상체계에 의거하여 이동을 거듭하며 현재의 퀘스트를 수행하고 있는 것과 같다.


얼핏 황당하게 보이는 이런 관점은 사실 엄연히 현대 물리학의 한 부류를 차지하고 있다. 닉 보스트롬은 모의실험 가설(Simulation Hypothesis)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실체가 아니라 시뮬레이션 속 가상세계라고 주장했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나 <13층> 속 세계처럼 말이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세상이 상위의 문명에 의해 의도적으로 창조된 비현실일 수 있는 근거로 그가 제시하는 바를 요약하면 AI기술의 발전이 극에 이른 어느 문명이 오락이나 연구 등의 목적으로 수많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실행할 가능성이 있는데, 그렇게 실행된 시뮬레이션 안의 개체들은 자신들이 시뮬레이션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할 뿐이라는 것이다. 현 지구 최고의 혁신가인 일론 머스크는 우리 세상이 현실일 확률을 수십억 분의 1 정도로 본다면서 닉 보스트롬의 가설을 지지했다.


나는 이러한 세계관이 적어도 오늘날 존재하는 수많은 종교의 관념보다는 현실적이라고 판단한다. 그래도 도저히 수긍할 수 없다면 과거의 위대한 철학자 중 한 명을 호출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플라톤은 '동굴의 우화(Allegory of the Cave)'를 통해 인간이 동굴에서 실체의 그림자를 실체로 믿으며 살고 있는 존재일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가 생각하는 실체는 동굴 밖에 이데아라는 이름으로 실재하고 있었다. 이데아의 세계를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모든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숙명적으로 동굴을 벗어날 수 없었던 플라톤에게 육체의 사멸이 곧 영혼의 종말이라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플라톤은 육체와 영혼의 결합을 일시적인 것으로 보았다. 영혼의 여정은 영원한 것으로 그에게 육체란 그 여정을 잠시 함께하는 그릇과 같은 것에 불과했다. 플라톤은 육체를 바꾸며 지상에서 다회성의 삶을 사는 영혼이 '체험 삶의 현장'에서 얼마나 많은 포인트를 쌓느냐에 따라 다음 생의 질이 결정된다고 보았다. 포인트의 축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다름 아닌 영원한 진리의 이데아에 대한 인식이었다. 가장 고상한 수준에 도달한 소수의 영혼들만이 더 이상의 윤회를 멈추고 완전한 세계 이데아의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었다.


플라톤의 사유에 대한 과학적 증거는 없다. 그렇다고 플라톤이 미친 놈 취급 받는 경우도 없다. 플라톤의 가설이 참일 수도 있다는 실마리는 명리학에서 발견된다. 삶이 연속된 다회차의 미션과 같은 것이라는 암시가 사주팔자에 잘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회적으로 소모되는 존재가 아닐 수 있다는 가정은 우리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의 삶이 지속적으로 이어진다면 어떤 보상도 어떤 단죄도 결코 늦을 수 없다. 모든 행위에는 반드시 그에 대한 평가가 뒤따른다. "어차피 한 번 뿐인 삶"을 운운하며 소유와 향유의 쾌락에 젖는 대신 우리는 하늘이 기대하는 우리 자신의 완성형을 향해 정성스러운 노력을 기울일 수 있을 것이다.



후회 없는 삶을 살게 해 주는 명리학의 지혜, 4가지 준칙


나는 나의 기획인 '운명과 인생 사이'를 통해 후회 없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명리학이 우리에게 건네는 소중한 지혜를 '인연, 학습, 자각, 단절'의 4가지 준칙 안에서 소개하고자 한다.


이 세상 어떤 인연도 무의미하게 오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인연이 보람과 행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슬픔과 분노로 마무리 된 인연이 새롭게 이어지기도 하고 한 평생을 우정과 사랑으로 지속해 온 인연이 하루아침의 배반으로 풍비박산나기도 한다. 하늘이 맺어 준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며 가꿔야 한다. 좋지 않은 인연을 가려 시간과 에너지를 불필요하게 낭비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끊임없는 반성과 성찰로 지나간 인연에서 배워야 하고 배운 바를 선한 방향으로 실천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사람에게서 배우고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것을 넘어 하늘이 탁월한 인간들을 통해 인류에게 선사한 지식과 사유 방법을 익혀야 한다. 자기 만의 식견으로 사람과 세상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사회는 혼탁해진다. 특히 방송과 유튜브 등 단편적인 정보만이 더해진 안목은 더 위험하다. 외모, 재력, 직업, 명예 등 속물적인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특징짓는 일이 많아진 것은 우리의 안목이 그만큼 낮은 수준으로 내려온 탓이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점검하고 공동체와 더불어 사는 인간다운 인간으로 변화하게 하는 데 있어 명리학보다 명쾌하고 실천적인 학문을 나는 알지 못한다.


독서량이 독서의 주요한 척도가 된 시대, 독서를 책이 아닌 도서 리뷰 동영상이나 오디오 파일로 하는 시대에 고리타분하게 느껴지는 동양철학서를 느리게 읽는 것이나 지난한 습득과 체화의 과정을 요하는 명리학을 공부하는 것은 실속 없는 짓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의미가 뚜렷하게 잡히지 않아 공허해진 삶에서 표류하는 자아의 참모습을 확인하고 삶의 진정한 목적을 깨닫는 것의 가치를 몰라서 하는 생각이다. 장담컨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누군지 모르고 이 세상에 왜 왔는 지 알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한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내가 했던 것과는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과 같은 후회는 보통 인생의 종착역 근처에서 행해진다. 나 자신은 물론 인간과 세계의 본질에 대해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인식체계를 수립하게 되면 큰 깨달음이 밀려온다. 그것은 많은 사람에게 아마도 산사에서 평생 수행하며 맞닥뜨리게 될 구도적 깨달음 못지 않은 깊이로 전해질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떠나 살 수 없는 일상적 공간인 속세에서 얻는 깨달음의 가치는 남은 인생에서 두고두고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인간관계든 일이든 욕망이든 우리에겐 내려놓아야 할 순간이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더 이어가고 싶어도, 더 달려가고 싶어도, 더 이루고 싶어도, 더는 안 된다고 하늘이 말할 때 들을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귀가 아니라 마음에 깃든 지혜다. 에너지의 작용력을 모르면 멈출 수 없다.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멈추고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다. 끊어지지 않는 것, 끊어 낼 수 없는 것을 끊어 버리고 멈추는 퇴退를 지킬 때 다시 새로운 진進의 계기가 찾아온다. 많은 사람이 진에 얽매이고 사로잡혀 원치 않는 퇴에 직면하고 만다. 우주는 회전 궤도를 따라 끊임없이 직진운동을 한다. 은하도 지구도 진의 운동성을 따른다. 지구 위에 올라타 있는 우리에게도 진은 미덕처럼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다. 그래서 진은 쉽고 퇴는 어려운 법이다. 퇴할 수 있는 힘은 절絶의 단호함에 있고 절의 단호함은 명리적 깨달음을 통해 자연스럽게 전수된다.


최대한 일상의 언어로 가능한 한 가볍게, 이 4가지 준칙들을 쉽게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글을 써 나갈 예정이다. 인연이 되는 분들께 명리학의 지혜와 만나는 작은 안내서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