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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 Jan 01. 2022

7년차 콘텐츠 마케터는 더 솔직해지기로 했다

2022년 목표, 없었는데요 있었습니다

사는 게 어디 생각처럼 되나. 하루하루 열심히 보내면 되지. 2022년 목표도 딱히 세워두지 않았었다. 그런데 2021년 12월 31일 저녁, 갑자기 이거다! 싶은 게 생겼다. 한 손에 케이크를 들고 털래털래 집에 가던 길이었다. 아마도 1월 1일을 72시간 남기고 일어난 몇 가지 일들 때문이다.


72시간 전 요즘 재밌는 일이 없네 싶었다.

48시간 전 전 직장 팀장님과 오랜만에 몇 마디 나눴다.

24시간 전 <규칙 없음>을 180페이지까지 읽었다.

7시간 전 D님께 케이크를 선물받았다.



2021년이 마무리되며 큰 프로젝트 하나가 끝났다. 스쿼드 멤버들이 고생한 만큼 큰 성과가 났다. D님이 와인을 한 병씩 선물했다. 술 안 마시는 나에게는 일부러 케이크를 챙겨주셨다. 내 돈 주고 사 먹을 일 없었을 고급 케이크였다.


퇴근길 만원 지하철 안에서 케이크를 사수하며 생각했다. 이런 걸 받아도 되나. 다른 팀원들이 잘해서 성공한 거지, 나는 조금 거들었을 뿐인데. 내가 그 스쿼드에 없으면 안 될 사람이었을까.


사실 요즘 계속 생각 중이었다. 내가 이 회사에 정말 필요한 사람인가. 내가 재밌게 잘할 수 있는 일이 이 회사에서 중요한 일일까.


곧 7년차 콘텐츠 마케터가 된다. 콘텐츠 마케터야 어디든 필요하다지만, 나는 마케팅을 잘하는 사람이기보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이다. 어그로로 시선을 사로잡고 매출을 올리는 광고는 잘 못 만든다. 낯선 사람 대하는 걸 힘들어해서 대면 이벤트도 싫어한다. 대신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풀어내는 것, 물 흐르듯 읽히는 글을 쓰는 건 잘한다. 운 좋게 '글 쓰는 마케터'로 하고 싶은 일만 하며 6년을 살았는데, 앞으로도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하며 계속 성장할 수 있을까?


요즘 <규칙 없음>을 재밌게 읽고 있다. 넷플릭스는 업계 최고의 인재를 데려와 최고 수준 연봉을 맞춰 준다고 한다. 물론 어마어마하게 받겠지만, 업계의 시장 상황에 변화가 없다면 연봉 인상도 없다고 한다. 글 쓰는 마케터라는 시장도 있나? 있다 치면 그 시장의 최고 수준 연봉은 어느 정도지?


이런 답 없는 고민을 할 때마다 짱짱 멋진 마케터 최측근은 콘텐츠 마케팅의 모든 분야에 글이 필요하다며 힘을 준다. 그동안 글이 필요한 일은 거의 다 해보지 않았냐고도 했다. 그랬나 내가? 내친김에 내가 무슨 일을 해왔는지 쭉 늘어보았다.


회사 홈페이지 기획 및 작성

제품 상세페이지 작성

블로그 기획 및 제작, 블로그 콘텐츠 작성

검색 엔진 최적화

검색광고, 디스플레이 광고

SNS 게시물, 카드뉴스 기획 및 작성

회사 웹툰 연재

리플렛, 브로셔, 각종 콜레터럴 작성

IT 서비스 유저 가이드 작성

보도자료 작성

CRM(카카오톡, 문자, 이메일) 작성

고객 대상 기획 콘텐츠(리포트) 작성

뉴스레터 운영

채용공고 작성


혼자 한 사이드 프로젝트도 있지만 대부분은 회사의 기획자, 개발자, 디자이너 등과 협업한 것들이다. 할 수 있는 일의 종류야 어느 직무에서건 몇 년씩 일하다 보면 계속 늘어난다. 할 수 있는 일보다 더 중요한 건 내가 이 중에서 어떤 걸 계속 잘하고 싶은지 아닐까.


나는 회사를 멋지게 알릴 수 있는 콘텐츠를 계속 만들고 싶다. 홈페이지, 상세페이지, 블로그, 콜레터럴, 뉴스레터 뭐든 좋다. CRM도 단순 광고보다 고객을 향해 진심을 담아 맥락 있는 메시지를 보낼 때 뿌듯했다. 우리 회사가 가진 멋진 점들을 잘 보여줄 수 있는, 그러면서도 재밌게 읽을 만한 글을 쓰는 걸 잘하고 싶다.


얼마 전 안부인사를 주고받은 전 직장 팀장님내가 쓴 브런치 글을 잘 읽었다고 했다. 하고 싶은 일을 잘하고 있는 것 같다고. 내가 그랬나? 그 글을 다시 읽어보았다. 어 그러네, 그때 정말 잘 지냈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상황이 달라진 건 없었다. 내 마음만 그때와 다르게 의심하고 있었다. 내가 이 회사에서 원하는 일을 실컷 할 수 있을까? 더 성장하며 더 높은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내가 잘하는 일이 이 회사에 정말 필요한 일일까?


예전에는 글 쓰는 마케터로 계속 살아가려면 프리랜서가 되어야 하나 싶었다. 회사를 다니다 보면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하는 게 어려울 것 같아서. 근데 잠깐만 생각해 봐도 그건 아니었다. 나는 글로서 회사의 멋진 철학, 멋진 동료, 멋진 서비스를 소개하고 싶은 건데. 프리랜서는 회사에 소속감을 느낄 수도, 동화되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내가 하고 싶은 프로젝트를 먼저 제안할 수도 없을 거고. 그러니 일을 재밌게 하려면 내 능력이 필요한 회사를 잘 골라 다녀야 한다. 그 관점에서 항상 생각한다. 지금 내가 다니는 회사가 최선일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인데 비싼 케이크를 받아도 되나, D님께 미안했다. 그리고 곧 미안한 이유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게 됐다. 회사가 나랑 맞는지 고민하는 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고작 케이크 하나로 미안할 만큼 심각한 고민 중이면서 D님에게는 한 마디도 안 한 게 문제였다.


넷플릭스에서는 긍정적인 의도를 담아 자신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피드백 문화를 관철한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가능한 문화일까 싶긴 하지만, 사실 <규칙 없음>은 D님이 재밌게 읽고 여러 번 인용하는 책이기도 하다. D님께 직접 물어보면 되는 거였다. 2주 전 면담에선 앞으로 재밌는 일 많을 거라고 했으면서 왜 재밌는 기획에서부터 나를 부르지 않냐고, 내가 재밌게 잘할 일이 정말 계속 생길 거냐고, 내가 회사에 필요한 사람이냐고.


나는 앞으로도 회사의 멋진 가치를 담는 콘텐츠를 만드는 데 집중하고 싶다. 하지만 내가 만들고 싶은 콘텐츠를 필요로 하는 회사는 많지 않다. 그래서 더더욱 적극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과 나의 고민을 알려야 한다. 그래야 나도 회사도 서로 앞으로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고, 방향에 따라 우리가 함께하든 그러지 않든 서로 응원할 수 있으니까.


여기가 다섯 번째 직장이니 이직을 제법 한 편이다. 그런데도 ‘여기서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아 걱정이다’ 라는 말은 매번 옮길 회사를 정하고 나서야 했다. 내가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회사 입장에선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니까. 싫으면 나가라며 권고사직당하지 않을까, 어느 회사든 적어도 1년은 다녀야지, 업무 자체가 범용성이 높지 않은 스스로에게 페널티를 늘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생각을 바꿔보려고 한다. 모든 커리어를 내가 좋아하는, 자랑하고픈 멋진 것들로 채우면 내 능력이 필요한 회사에선 나를 더 찾을 거다. 한 회사를 얼마나 오래 다녔는지보다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을 했는지가 더 중요하니까. 이렇게 생각하니 지금 내 자리도 긍정적인 시선으로 다시 보게 된다. 여기서 할 수 있는 멋진 일은 뭐가 있을까. 멋진 일을 잘할 수 있는 환경을 여기서 만들 수 있을까. 환경의 문제인가, 내 역량의 문제인가. 생산적인 고민이 시작되었다.


‘하고 싶은 일만 하니 내 가치는 높지 않을지 몰라’, 이런 쭈구리 생각을 바꾸게 된 건 7년차가 되었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일들이 제법 생겨서 어디서든 먹고살 수는 있을 것 같다. 제법 뻔뻔해졌다. 아직 한참 멀었지만, 이게 배짱인가?


내년, 아니 올해 목표는 더 솔직해지는 거다. 참는다는 선택지는 가장 뒤에 둘 거다. 회사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나와 내 일을 더 자주 돌아볼 거다. 글도 더 자주 쓸 거다.


그리고 하나 더. 내가 잘할 수 있는 일로 어떻게 회사 성장에 기여할 수 있을지 더 깊이 고민할 거다. 내가 못하는 일을 잘하는 팀원들이 많으니까. 내 말버릇은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하세요’인데, 앞으로는 그걸 넘어 ‘도움이 필요한데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도 많이 말해봐야지.


2021년은 마지막 3일간 얻은 깨달음으로 빛났다. 그리고 D님이 선물한 케이크는 올해 먹은 케이크 중 최고로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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