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5월 24일 20화

19화 : 경진의 조언

쨍, 맑은 소리가 울렸다

by 낭만피셔

퇴근 후, 지현은 경진과 번화가의 조용한 카페 창가 자리에 마주 앉았다. 하루 종일 그녀를 괴롭혔던 윤섭의 메시지는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무겁게 자리 잡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커피잔과 반쯤 먹은 케이크 조각이 놓여 있었다. 창밖은 이미 어둠이 내렸고, 차가운 도시의 불빛과 대비되는 카페 안의 따뜻한 조명이 아늑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현의 마음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여졌다.


“…경진아. 나… 오늘 아침에…”


경진은 케이크를 포크로 찍다가 지현의 망설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윤섭이한테 연락 왔어.”


경진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포크를 내려놓고 흥미롭다는 듯 지현을 바라보았다.


“와, 드디어? 진짜로? 뭐라고 왔는데? DM?”


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망설이다 휴대폰을 꺼내 윤섭에게 온 DM 화면을 슬쩍 보여주었다. 경진은 화면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지현이 폰을 다시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


“어제 회사에서 ‘멋진 하루’ 얘기 듣다가 내 생각났다나 봐. 커피나 한잔 하자고.”


경진이 장난스럽게 지현의 팔을 툭 쳤다.


“야, 그럼 뭐해! 당장 답장해서 약속 잡았어야지! 뭘 망설여!”


지현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좀 갑작스럽기도 하고… 아직 답장 못 했어.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오늘 하루 종일 그녀를 괴롭혔던 생각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분명 연락을 기다렸던 것도 같은데, 막상 그의 이름이 화면에 뜨자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먼저 들었다. 마음은 자꾸만 12년 전 그에게로 기울어지려 하는데, 과거의 상처가 무거운 닻처럼 그녀의 발목을 붙잡는 기분이었다.


경진은 못 말린다는 듯 혀를 찼다.


“진짜 너 계속 이러면 내가 걔 인스타 찾아가서 대신 답장한다? ‘우리 지현이가 그날 카페에서부터 눈 빠지게 너 기다렸다고~’ 막 이런 톤으로다가!”


지현이 피식 웃었다.


“야! 미쳤냐…”


친구의 농담에 잠깐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


하지만 경진은 이내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한 눈빛으로 지현을 보았다.


“근데 솔직히 말해봐. 너 윤섭이 보고 싶었던 거 맞잖아. 오늘 하루 종일 네 표정 보니까 딱 알겠더만. 일도 제대로 못 했지?”


지현은 친구의 직설적인 말에 시선을 피하지 못하고 잠시 멈칫했다. 그녀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을 들킨 기분이었다.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보고 싶긴 했지.”


그녀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연락 와서 놀란 만큼… 솔직히 좋기도 했고. 그냥… 아직 좀 겁이 나서 그래. 이성훈 일도 그렇고…”


파혼의 기억이 다시 심장을 차갑게 식혔다.


“또다시 믿었다가 상처받을까 봐.”


경진은 그런 지현의 마음을 읽은 듯, 잠시 침묵하다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 네 마음 알아. 아는데… 지현아. 그래도 평생 혼자 살 거 아니면, 언제까지 그렇게 겁만 내고 있을 건데? 언젠가는 용기 내야지. 상처 무서워서 연애 안 하면, 그냥 쭉 혼자인 거야.”


경진은 잠시 숨을 골랐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너 그동안 만났던 남자들 중에… 나는 신윤섭 걔가 제일 괜찮았어, 옛날부터. 서툴러도 진심은 있었잖아.”


그녀는 카페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저번에 카페에서 너네 둘 그러는 거 보는데 내가 다 숨 막히더라! 12년 만에 서로 앞에 두고 말 한마디 못 하고!”


지현은 친구의 날 선 말들에 움찔했지만,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고개를 숙이고 커피 잔만 내려다보았다. 윤섭이 괜찮았다고? 진심이었다고? 하지만… 그가 가방을 떨어뜨리며 당황하던 모습은 왜 자꾸 떠오르는 걸까.


“…모르겠어. 근데… 걔도 엄청 긴장한 거 같긴 했어. 그래서… 이상하게 마음이 좀 놓였달까.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 싶어서 그랬나 봐.”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경진은 잠시 말이 없다가, 끄덕였다.


“그래. 그런 느낌, 쉬운 거 아니지.”


그녀는 잔을 들었다.


“휴… 아무튼. 네가 결정해. 계속 겁나서 이대로 또 놓칠 건지, 아니면 그 아쉬운 마음 붙잡고 이번엔 조금 용기 내볼 건지. 진짜 좋은 사람… 그렇게 쉽게 오는 거 아니다?”


경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단호했다.


지현은 친구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 담긴 걱정과 응원을 읽었다. 그녀는 천천히 자신의 잔을 들어 경진의 잔에 가볍게 부딪혔다. 쨍, 맑은 소리가 울렸다. 눈을 감았다 뜨며, 희미하지만 조용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두려움은 남아있었지만, 친구의 말처럼 작은 용기를 내보기로 마음먹은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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