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 불빛들이 그녀의 얼굴을 비췄다
경진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은 퇴근 시간이 살짝 지난 덕분인지 비교적 한산했다. 지현은 창가 쪽 빈자리에 몸을 기대앉았다. 빠르게 지나가는 창밖의 불빛들이 그녀의 얼굴 위로 명멸했다. 귀에는 습관처럼 이어폰을 꽂았지만, 음악은 재생하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다른 소리들로 가득 차 있었다.
경진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언제까지 그렇게 겁만 내고 있을 거야? 언젠가는 용기 내야지.’ ‘진짜 좋은 사람… 그렇게 쉽게 오는 거 아니다?’ 친구의 직설적이면서도 따뜻한 조언은 그녀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12년 만에 나타난 신윤섭. 그를 향한 자신의 복잡한 마음. 그리고 여전히 발목을 잡는 과거의 상처.
그녀는 천천히 핸드백을 열어 스마트폰을 꺼냈다. 화면을 켜자 보이는 인스타그램 아이콘.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DM 창으로 들어갔다. 어젯밤 윤섭이 보낸 메시지가 화면에 그대로 떠 있었다.
지현아, 나 윤섭이야. 잘 지내?
오늘 회사 후배가 ‘멋진 하루’ 얘기하는 거 듣는데 문득 네 생각이 나더라.
우리 옛날에 그 영화 좋아했잖아.
...시간 괜찮으면 언제 커피라도 한잔 할까?
지현은 화면을 잠시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서툰 진심이 느껴지는 듯했다. ‘멋진 하루’를 핑계 삼아, 아주 조심스럽게 건네는 말. 그녀는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어떤 감정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다시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두려움은 여전했지만, 그 아래 숨겨져 있던 다른 감정들. 어쩌면 그리움, 그리고 아주 작은 설렘.
그녀는 결심한 듯,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 스마트폰 화면 위 가상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액정 화면에 짧은 문장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어떤 말이 좋을까. 너무 반가워하는 것처럼 보여도 안 되고, 너무 무심해 보여도 안 될 것 같았다. 고민 끝에, 그녀는 간결하게 두 문장을 완성했다.
오랜만이다.
커피… 괜찮아.
그녀는 자신이 쓴 짧은 글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더 길게 써야 할까. 아니, 이게 좋았다. 담백하고, 솔직하게. 그녀는 '전송' 버튼 위에서 손가락이 잠깐 멈추는 것을 느꼈다. 심호흡을 한번 하고, 조용히 버튼을 눌렀다.
‘띵’. 짧고 선명한 전송음이 울렸다.
DM이 전송되었다. 지현은 천천히 휴대폰 화면을 끄고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빠르게 지나가는 창밖 불빛들이 그녀의 얼굴을 비췄다. 그 얼굴에는 후련함인지, 새로운 걱정의 시작인지 알 수 없는 미묘한 미소와 긴장감, 그리고 약간의 해방감 같은 것이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마침내, 12년 동안 닫아두었던 문을 아주 조금, 열어보기로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