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5월 24일 19화

18화 : 과거는 언제나 돌아온다

어떤 것도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다

by 낭만피셔

아침의 충격과 혼란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출근길 내내 머릿속을 헤집던 윤섭의 메시지는, 지현이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켠 후에도 검은 잉크처럼 그녀의 의식 위에 번져나갔다. 오늘은 중요한 번역 마감이 있는 날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일에 집중해야 했다. 그녀는 애써 심호흡을 하고, 어젯밤 작업하던 파일을 열었다. 화면 가득 빽빽한 불어 단어들이 눈앞을 어지럽혔다.


타닥타닥. 키보드 소리가 잠시 경쾌하게 이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멈췄다. 지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방금 자신이 번역한 문장을 다시 읽었다. 어색했다. 단어 선택이 잘못된 것 같기도 하고, 문장 자체가 매끄럽지 못했다. 평소라면 금방 알아차리고 수정했을 텐데. 그녀는 짜증스럽게 백스페이스 키를 눌러 문장을 지웠다. 다시 집중하려 애썼지만, 눈앞의 불어 단어들 위로 자꾸만 윤섭의 이름과 그의 메시지가 아른거렸다. '잘 지내?'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커피라도 한잔 할까?’ 그 가벼운 제안이 왜 이렇게 무겁게 느껴지는 걸까.

그녀는 다시 한번 정신을 가다듬고 다음 문장 번역을 시작했다. 모니터 화면에 떠 있는 불어 원문.


Le passé revient toujours d'une manière ou d'une autre.

(과거는 늘 어떤 방식으로든 돌아온다.)


지현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그대로 멈췄다. 과거는 늘 어떤 방식으로든 돌아온다. 마치 지금의 자신처럼. 12년 동안 괜찮다고, 다 잊었다고 스스로를 속이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예고 없이, 그의 이름 세 글자와 짧은 메시지 하나로 속수무책으로 흔들리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멍하니 문장을 응시하다, 결국 번역을 이어가지 못하고 마우스를 내려놓았다. 가슴 한구석이 답답하게 죄어왔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책상 한쪽에 놓인 스마트폰으로 향했다. 아침에 확인한 후, 다시 열어보지 않으려 애썼지만, 자꾸만 손이 갔다. 혹시 그 사이에 그가 메시지를 취소하지는 않았을까? 아니면 ‘잘못 보냈다’는 연락이라도 오지 않았을까? 그녀는 결국 폰을 집어 들어 화면을 켰다. 인스타그램 DM 창.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가 보낸 메시지는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녀는 그의 프로필 사진을 눌러보았다. 낯선 듯 익숙한 얼굴. 12년 전의 앳된 모습은 사라졌지만, 눈빛 어딘가에는 그 시절의 그가 남아있는 것 같기도 했다. 다시 봐도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화면을 꺼서 폰을 다시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집중하려고 할수록 그의 생각만 더 선명해졌다. 그녀는 결국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기대앉아 눈을 감았다. 머릿속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답장을 해야 할까. 한다면 뭐라고 해야 할까. 만나는 게 맞을까.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12년 전의 우리는 지금 여기에 없는데. 우리는 너무 많이 변했는데. 과거의 좋았던 기억과 파혼의 상처, 그리고 현재의 두려움과 아주 작은 기대감이 어지럽게 뒤섞여 실타래처럼 얽혀들었다. 어떤 것도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다.


시간만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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