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5월 24일 17화

16화 : 가지 말라는 말

두 사람 사이를 감싸는 공기는 여전히 조용했지만

by 낭만피셔

며칠이라는 시간은 짧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은 공기의 무게는 그보다 훨씬 무거웠다. 다시 찾은 <카페 바바블랙쉽>의 창가 자리는 햇살 아래 눈부셨지만, 그 빛마저 둘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유리벽을 투과하지 못하는 듯 어색하게 부유했다. 지난번 동아리 모임 이후 처음 단둘이 마주한 시간. 윤섭은 커피 잔 표면에 맺힌 물방울만 손끝으로 덧그리고 있었고, 지현은 찻잔을 든 채 창밖 거리의 풍경 속으로 시선을 던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까. 서로의 숨소리마저 크게 들리는 듯한 침묵은 얇은 얼음처럼 위태롭게 그들 사이에 깔려 있었다.


결국 먼저 얼음을 깬 것은 윤섭이었다. "…오늘 날씨 좋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조금 잠겨 있었다. 스스로도 어색함을 느꼈는지, 시선은 여전히 테이블 어딘가를 맴돌았다. 너무나 평범해서 오히려 이 상황의 비현실감을 더하는 말이었다.


"…그러네." 지현은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그녀의 머릿속은 여전히 낮에 보았던 그의 예민하고 날 선 반응으로 가득 차 있었다. 왜 그랬을까. 그 질문이 혀끝을 맴돌았지만 차마 묻지는 못했다.


"수업… 잘 들었고?" 그가 다시 물었다.


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지현은 차마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그의 눈을 보면, 며칠 전 자신을 향했던 그 혼란스러운 눈빛이 떠올라 또다시 마음이 복잡해질 것 같았다.


"어. 그냥 뭐…" 그녀는 마지못해 그를 보았다. 그의 눈빛 역시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역시 자신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이 숨 막히는 어색함을 견디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아주 약간의 위안이 되면서도, 동시에 더 큰 불편함으로 다가왔다.


그때, 구원처럼, 혹은 잔인한 방해처럼 지현의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가방 안에서 낮게 우는 소리. 그녀는 반사적으로 폰을 꺼냈다. 액정에 뜬 이름은 ‘경진’. 받기 전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윤섭의 기색을 살폈다. 그는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었지만, 단단하게 다물린 입술에서 애써 외면하려는 긴장감이 읽혔다. 그녀는 짧게 숨을 참고 조용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경진아. 왜?" 목소리가 생각보다 건조하게 나갔다.


"…응? 지금 어디라고?"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에 집중하려 애썼지만, 온 신경은 옆자리의 그에게 향해 있었다.


"…재현 선배랑 같이 있다고?"


그녀는 최대한 감정을 숨기려 했지만, 목소리가 살짝 높아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윤섭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움찔하는 것이 시야 끝에 걸렸다.


"아… 나는 지금 카페인데… 음… 꼭 지금 봐야 해? 급한 거 아니면 이따가…" 그녀는 말을 흐렸다.


그의 존재가 통화 내용보다 훨씬 더 크게 그녀를 압박했다.


"…알았어. 일단… 보고 다시 연락 줄게."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테이블 위로 방금 전보다 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심장이 아까보다 더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움직여야 했다. 그녀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윤섭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동자가 이미 그녀를 향해 있었다. 그 안에 담긴 것은 무엇일까. 불안? 질투? 아니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무관심? 그녀는 그의 가장 깊은 곳의 반응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최대한 가볍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그녀의 의도와 달리 조금 떨리고 있었다.


“경진이가 지금 바로 근처래. 재현 선배랑 같이 있는데, 잠깐 나 보고 싶다고 오라네.”


그녀는 그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마치 그의 영혼이라도 들여다보려는 듯이.


“어떡할까? …갈까?”


마지막 물음은 깃털처럼 가볍게 내려앉았지만, 윤섭에게는 천근의 무게로 다가왔다. 마시려던 커피잔을 든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녀의 시선이 그의 모든 변명과 회피를 꿰뚫는 것 같았다. 가야 할까, 말아야 할까를 묻는 게 아니었다. 이건, 그의 마음에 대한 마지막 확인이었다. 며칠 전 들었던 소문, 동아리 방에서 터뜨렸던 치졸한 분노. 그녀는 어쩌면 다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그의 진심을 묻고 있었다.


그는 마른 침을 삼켰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목이 바짝 타들어갔다. 여기서 또다시 망설인다면. 외면한다면. 정말 모든 것이, 이제 막 싹트기 시작한 이 위태로운 감정이 그대로 끝나버릴지도 모른다는, 혹은 그녀가 정말 저 선배에게 가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안 돼.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으리라. 그는 떨리는 숨을 가다듬고, 마침내 그녀의 눈을 다시 보았다. 흔들림 없는, 하지만 현재의 모든 절박함을 담은 듯한 깊은 눈빛이었다. 그는 아주 조용히, 하지만 그 어떤 외침보다 더 강한 울림으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지진과 같은 분명한 떨림이 실려 있었다.


“……안 갔으면 좋겠는데.”


그의 대답이 카페 안의 정적 속으로 낮게, 하지만 선명하게 가라앉았다.


지현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거의 티 나지 않을 정도로 커졌다가 이내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해졌다. 그의 진심이, 예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장을 두드리는 돌멩이처럼 그녀의 마음에 가닿아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놀람이나 당황이 아니었다.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무언가를 확인한 듯한, 혹은 예상치 못한 선물에 대한 작은 떨림 같은 것. 그녀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아주 희미한, 바람 같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복잡했던 마음속 안개가 조금은 걷히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다시 창밖을 보았다.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눈부신 햇살. 그녀의 뺨이 살짝 붉어진 것 같기도 했다. 그 미소와 침묵은, '네 마음 알아들었다'는 조용한 대답과도 같았다.


윤섭은 그런 그녀의 옆모습과,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 미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이 의미하는 바를 그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적어도 그의 서툰 진심이 거절당하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그의 가슴을 채웠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씁쓸한 아메리카노가 이상하게 달콤하게 느껴졌다. 그의 목울대가 작게 움직였다. 그는 더 이상 시선을 피하지 않고, 창밖을 보는 지현의 옆모습을, 그 안에 담긴 작은 변화를 가만히 응시했다.


두 사람 사이를 감싸는 공기는 여전히 조용했지만, 이제 그 침묵은 더 이상 어색함이나 불안이 아니었다. 서로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가닿은 진심이 만들어낸, 숨 막힐 듯한 설렘과 이제 막 다른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한 이야기의 기대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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