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슬라브볼프_배제와 포용 4장
미로슬라브볼프의 '배제와 포용' 강독회에 참여하고 있다. 읽을 때마다 무릎을 치면서 또는 뒤통수를 어루만지면서 감동도 받고 삶을 돌이키기도 한다. 지난시간에 포용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실제로 '용서'를 전투적으로 해본 경험도 있었다. 3장에서 볼프는 가해자가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회개' 뿐만 아니라 피해자들에게도 '부당한 것처럼'보이는 '회개'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가해자가 행한 죄악 때문에 피해자는 '피해자'라는 정체성에 의해서 분노와 혐오를 자연스럽게 자신의 내면에 키우게 되고, 이것을 벗어날 필요 없이 '정당방위'로 가해자에게 퍼부어도 된다. 그러니깐 가해자에게 보복을 한다고 해도, 가해자 때문에 만들어진 마음 속 분노와 혐오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의'를 실현한다고 해서 '사랑'이 회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은 새롭게 창조되어야 하고, 그 사랑은 결국 삼위일체에게서 나와서 십자가에서 완성된다.
가해자 뿐 아니라 피해자도
회개를 해야한다니?
회개의 원래 뜻은 '가던 뜻을 돌이키다'이다. 가던 길을 돌이켜서 자신이 원래 하려던 것을 하지 않는 것. 그러니깐 가해자가 없었으면 분노도, 혐오도, 미움도 없었다면 가해자가 보복을 당하고 나서 자연스럽게 분노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원래 자신으로 돌아와서 하나님으로 돌아가려면 자신에게 피해를 준 사람이 만들어 준 '반응적인 악'을 돌이켜야 한다. 인간은 항상 반응하고 대화하고 행동한다. 그러니 수용이든 대응이든 무시든지 간에 원래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다시 돌아가야 한다. 어떤 일이 있던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이 지점이 깨달음이 깊게 다가오는 시간이면서도, 절대고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다. 불가능하다. 그러나 포용해야 하고, 더 나아가서 '죄인을 용서'해야 한다. 그것은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고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다.
겨우 3장을 넘어왔는데 오늘은 성정체성이다. 오늘 내용의 핵심은 남성성이나 여성성이 모두 인간이 만든 문화에서 나와서 하나님께 투사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원래 남자와 여자를 사회적으로 의미지어서 남자는 우세하고 여자는 그것에 순종하는 방식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인간사회를 하나님에 투사해서 다시 하나님이 그랬다고 우기는 것이라는 것. 그러니깐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인간을 만들고 그 인간과 대화하지 남자와 여자를 나누어서 인격성을 차별적으로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타락이후 인간이 만든 문화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젠더의 문제이다. 젠더는 오히려 하나님의 인격과 연결되는 부분이 없다. 그럼 어떻게 봐야할까? 이런 고민을 하는 부분이 바로 4장 성정체성이다. 자 그럼 구체적으로 들어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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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는 창세기 2장에서 여자가 남자의 갈빗대에서 창조되었다는 이야기가 역사적으로 여성에 대한 위계적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오용되어 왔음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즉, 여자가 나중에 창조되었거나(순서의 문제), 남성의 몸에서 나왔다(출처의 문제)는 이유로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하거나 종속적인 존재로 해석하는 가부장적 논리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창조의 본래 의도를 왜곡하며, 성적 배제의 신학적 근거로 작용해왔다. 볼프는 이 갈빗대 기사가 사실은 동등성과 상호 의존성을 강조하는 포용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재해석한다. 여성이 남성의 "갈빗대"(옆구리)에서 나왔다는 것은 여성이 남성의 머리 위나 발아래가 아닌,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며 본질적으로 동일한 인간 본성을 공유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갈비댓도 하나님이 만들었다
여자는 남성에게 돕는 배필(ezer kenegdo)로 주어졌는데, 이 '돕는 배필'이라는 표현은 결코 열등한 조력자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도 사용되는 강력한 조력자를 의미한다. 갈빗대에서 여자가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남성 혼자서는 온전한 인간 존재를 이룰 수 없다는 신학적 진실을 드러낸다. 남성과 여성은 서로 상호 의존적이며, 상대방을 필요로 하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 속에서 비로소 충만함을 얻는다. 따라서 남성이 여성을 배제하고 지배하려 드는 것은 결국 자신의 불완전함을 감추려는 시도일 뿐이며, 둘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창조의 본래 명령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이 부분이 가능하려면 먼저 3장에서 다른 '포용'이 가능해야하고, 상대방을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 이것이 되어 있는 상황이라면 여성을 남성에 빗대어서 표현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으로 부터 다시 여성을, 타자를 보게 된다. 그러나 니체와 포이어바흐와 같은 철학자들은 '하나님을 배제'했기 때문에 공간을 만드는 것도 힘들다. 결국 자아로 가득찬 사람들의 '권리 싸움'이 되어 버린다.
니체(Friedrich Nietzsche) 비판
볼프는 니체를 비판하며 '나 자신이 되려는 의지'와 '폭력'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지적하고 있다.
비판 핵심: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통해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고, 약자를 경멸하며 강자의 논리를 옹호한다.
볼프의 주장: 볼프는 니체적인 방식, 즉 타자를 복종시키거나 제거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자아가 되려는 시도가 바로 폭력과 배제의 근원이라고 본다.
포용적 대안: 볼프는 진정한 자아(나 자신)는 타자를 포용하고 타자에게 자리를 내어줄 때 비로소 온전해진다고 주장한다. 내가 나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타자가 내 안의 일부가 되어야 하며, 이는 상호 환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 비판: 신적 정체성의 인간 투사 문제이다.
볼프는 포이어바흐의 종교 비판을 언급하며, 신적 언어에 나타난 젠더 개념의 문제점을 논하고 있다.
비판 핵심: 포이어바흐는 신(神)에 대한 개념이 인간 자신의 이상화된 본성을 투사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신적 정체성에 사용되는 젠더 언어(예: 하나님 아버지)가 전적으로 인간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임을 시사한다.
볼프의 수용과 한계 지적: 볼프는 신을 남성(아버지)으로 표현하는 것이 인간의 인식 능력과 성으로 구별된 몸(sexed body)의 구체성에서 유래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인간적 언어가 신적 실제를 모두 포괄할 수 없으며, 하나님은 젠더를 초월한 공통된 인간성의 모범이시라는 점을 강조한다.
궁극적 초월성: 볼프는 성 정체성의 근거를 초월적인 신에게서 찾을 수 없으며, 성 정체성은 성으로 구별된 몸의 구체성과 그들 사이의 사회적 상호작용의 역사에서 형성된다고 보고, 신이 젠더의 모범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칼 바르트(Karl Barth) 비판: 성별의 위계적 이해 문제이다.
볼프가 4장에서 가장 중요하게 비판하는 신학자 중 한 명은 칼 바르트이다. 볼프는 바르트의 삼위일체론 해석이 남성 중심적 위계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비판 핵심: 바르트는 삼위일체 중 성부(아버지)가 성자(아들)를 낳는 관계를 남자가 여자를 앞서는 관계의 신적 모범으로 해석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는 삼위일체를 일원적 모델에 가깝게 이해함으로써 여성의 남성 종속을 신학적으로 뒷받침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볼프의 대안: 복합적 삼위일체: 볼프는 바르트의 이러한 해석이 남녀 관계의 상호적이고 대칭적인 관계를 설명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고 본다. 대신, 그는 성부, 성자, 성령의 친교(Perichoresis) 개념에 집중하여, 삼위일체 위격들 간의 상호 내어줌과 동등한 사랑이 남녀 관계의 진정한 모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평등과 상호성에 기초한 젠더 신학: 볼프는 칼 바르트 대신 요제프 라칭거(베네딕토 16세)와 위르겐 몰트만 등의 사상을 참고하여 복합적이고 상호적인 성 정체성 관념을 개발함으로써, 위계적 해석을 거부하고 평등과 환대에 기초한 젠더 신학을 확립하고자 한다.
볼프는 젠더 정체성의 근원을 신적 영역에서 찾아 불변의 위계를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그는 포이어바흐의 종교 비판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언어(신적 젠더 언어)는 인간 자신의 젠더 경험을 신에게 투사한 것임을 지적한다. 이러한 인간적인 투사 때문에 하나님의 젠더 표현이 곧 인간 관계의 위계적 모범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볼프의 주장이다. 볼프는 하나님은 젠더를 초월한 존재임을 분명히 하며, 신적 정체성이 남녀의 지배-종속 관계를 정당화하는 신학적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선언한다. 대신, 인간의 젠더 정체성은 성으로 구별된 몸(sexed body)의 구체성과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되는 인간적인 현상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젠더 역할은 고정불변의 신적 명령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해석될 수 있는 역사적 영역에 속한다. 신학의 역할은 젠더 자체를 규정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젠더 관계에서 발생하는 배제와 억압의 형태를 비판하고 포용의 윤리를 확립하는 데 있다. 볼프는 젠더의 차이가 지배의 도구가 될 때 신학이 이를 거부하고, 대신 상호 환대와 사랑에 기반한 관계를 촉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젠더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지만, 죄의 영향 아래에서는 억압의 도구로 변질될 수 있음을 경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젠더를 초월한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인간이 자기 자손과 맺는 구체적으로 부성적인 관계에 상응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인간 아버지는 아버지로서의 자신의 책임을 하나님 아버지로 부터 절대로 읽어낼 수가 없다. 아버지가 하나님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어쩌다 아버지가 되어 자신의 딸과 아들,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와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된 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책임이다. 한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인간 어머니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관하 아무것도 배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 아버지로부터 남성성의 무엇을 배우는 것을 배울 수 없다. 젠더는 신적이지 않다. 인간적이지만 그 인간적인 젠더를 하나님으로 투사해서 성경적이라는 방식으로 여성성과 남성성을 구조화하는 것에 대해서 볼프는 경계한다.
시린 존스는 이리가레이가 남성 중심적인 남근 중심주의를 해체하고 여성 주체성을 확립하려 한 시도를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이리가레이가 여성의 몸과 성을 '두 입술', '유동성' 등으로 묘사하며 **남성과 대립되는 여성 고유의 '본질(essence)'을 규정하려 한 점에 대해 비판적 우려를 표한다. 존스는 이러한 젠더 본질주의가 해방의 의도와는 달리, 역사적으로 여성에게 감정적, 비합리적인 특성을 부여하여 결국 여성을 공적 영역에서 배제하고 억압하는 논리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해방과 정의를 추구하는 페미니즘 신학은 엄격한 이분법을 만드는 본질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존스는 이리가레이의 논리를 해체적 전략으로 활용하기 위해 '전략적 본질주의(Strategic Essentialism)'라는 개념으로 재구성하여 수용한다. 이리가레이가 제시한 여성 주체 구조는 영원한 본질이 아니라, 억압적인 남성 중심 담론에 대항하여 여성들이 자율성과 주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임시적이고 전술적인 도구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존스는 이러한 전략을 통해 개혁주의 신학 교리까지 확장하여, 여성의 서사와 경험이 기존 신학에서 소외된 부분을 비판하고 모든 이에게 공통된, 해방된 인간 본성을 회복하는 디딤돌로 삼고자 한다. 궁극적으로 이리가레이의 주체성은 젠더를 해방시키는 과정의 필수적인 단계가 되는 것이다.
요제프 라칭거는 말한다. "이제 그리스도로서 예수의 존재가 전적으로 개방된 존재, 누군가로부터 나오셔서 누군가를 향하는 존재, 어느 곳에서도 자신에게 집착하거나 자신의 힘으로 서 있으려 하지 않는 존재임이 분명해졌다. 그와 동시에 이 존재가 본체가 아니라 순전한 관계이며, 순전한 관계로서 순수한 일이파는 점 역시 분명하다"라고. 성자의 존재를 정의하는 '전적 개방성'의 두 가지 상호 연관된 양상은 볼프에게 매우 중요하다. 성자는 전적개방성을 가지고 전적으로 자기를 내어주면서, 자아 안에 타자가 전적으로 들어올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래서 성부와 일치를 이루신 그리스도는 우리와도 일치를 이루신다.
볼프는 성 정체성의 가장 깊은 신학적 모델을 삼위일체에서 찾으면서, 이 분야에서 영향력이 컸던 칼 바르트의 해석에 대해 비판적인 거리를 둔다. 바르트가 성부-성자 관계를 남성-여성 관계의 위계적 모범으로 해석함으로써, 남성의 주도권과 여성의 종속을 신학적으로 뒷받침할 위험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볼프는 이러한 일원적이고 위계적인 해석은 진정한 포용의 모델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볼프는 삼위일체의 세 위격(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 완전히 내어주고(자기 비움, Kenosis) 받아들이는(포용) 관계인 친교(Perichoresis)에 포용적 정체성의 핵심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친교는 동등한 사랑과 상호 존중에 기초하며, 위격들 간에 지배나 종속 관계가 전혀 없음을 보여준다. 친교는 서로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깊이 연합하는 완전한 환대의 모델인 것이다. 인간의 정체성, 특히 남녀 관계는 이 삼위일체적 친교를 본받아야 한다. 남성과 여성은 서로에게 기꺼이 자리를 내어주고 환대하며, 상대방의 고유한 정체성을 침해하지 않고 동등하게 사랑해야 한다. 이는 타자를 복종시켜 내가 되려는 니체적 자아(배제)와는 완전히 대립되는 개념이다. 포용적 정체성은 타자를 내 안으로 포함시키고 타자와 함께 내가 되는 관계 지향적인 정체성이다.
요제프라칭거의 논리
라칭거의 신학은 '진리'와 '인격'에 대한 고전적 이해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으며, 삼위일체를 통해 남녀 관계의 상보성(Complementarity)을 강조한다.
인격(Person)과 관계: 라칭거는 삼위일체론에서 각 위격(Person)이 관계(Relation) 자체로 정의된다고 강조한다. 즉, 아버지됨, 아들됨, 성령의 관계성 없이는 개별 인격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인간에게 적용되어, 인간의 정체성 역시 고립된 개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남녀의 상보성 모델: 라칭거는 남성과 여성이 각각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의 특정 측면을 반영한다고 본다. 남녀는 서로 대칭적이며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창조되었고, 둘이 합쳐져야 인간 존재의 완전한 충만함이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이 상보성은 위계적(hierarchical)이지 않고 차이를 가진 평등(equality in difference)의 개념에 가깝다.
볼프의 활용: 미로슬라브 볼프는 라칭거의 이러한 '관계적 인격론'을 수용하여, 남녀 관계가 상호 존중과 내어줌을 바탕으로 한 포용적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신학적 근거로 활용한다. 이는 일방적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거부하는 데 유용하다.
위르겐몰트만의 삼위일체의 논리
삼위일체의 친교(Perichoresis): 몰트만은 삼위일체 위격들 간의 관계를 친교(Perichoresis, 상호 내주)라는 개념으로 강력하게 설명한다. 이는 각 위격이 서로 완전히 내어주고(자기 비움, Kenosis) 받아들이는(포용) 역동적인 상호 침투의 관계를 뜻한다. 몰트만에게 친교는 지배 없는 완전한 연합의 모델이다.
성 정체성의 공동체적 모델: 몰트만은 삼위일체를 인간 공동체의 모델로 제시한다. 즉,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비롯한 모든 인간 공동체는 삼위일체의 친교처럼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지배 없이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볼프의 활용: 볼프는 몰트만의 '친교적 삼위일체론'을 가장 강력한 포용의 신학적 근거로 삼는다. 특히 칼 바르트의 일부 위계적 해석을 비판하면서, 몰트만의 친교 개념을 통해 남녀의 완전한 동등성과 상호 환대의 윤리를 확립하고 있다. 몰트만의 논리는 성 정체성의 차이를 배제의 도구가 아닌 사랑과 연합의 근거로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볼프는 지금까지 성 정체성에 관해서 2가지를 주장한다. 첫 번째는 성 정체성의 내용이 성으로 구별되는 몸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특정한 문화적 맥락에서 남성과 여성사이의 사회적 교환을 통해서 정해진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하나님에 대한 묘사는 남성이나 여성이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관한 모범을 절대로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대신에 삼위일체 위격 사이의 관계가 남성성과 여성성의 내용이 사회적 과정 속에서 어떻게 정해져야 하는가에 관한 모형이 되어야 한다고 제한한다. 그것은 삼위일체를 통해서 서로 대화하고 존중하는 관계론적 이해를 통해서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구성이 달라져야 한다는 '위에서 부터 아래로' 투사되는 방식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 정체성은 인류에게 상호 보완적인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가져다주는 축복이지만, 동시에 역사적으로 억압과 폭력을 낳는 배제의 근원이 되어온 역설적인 영역이다. 볼프는 이 역설을 극복하고 차이를 긍정적인 힘으로 변환시키기 위해 포용의 실천이 절실하다고 주장한다. 포용은 성별 차이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환대하는 것이다. 포용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특히 권력을 가진 쪽(남성)의 윤리적 결단이 요구된다. 남성은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Kenosis)을 본받아 자신이 누려온 권위와 특권을 기꺼이 내려놓고 여성의 주체적인 공간을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상호 환대(Mutual Hospitality)는 남성이 여성의 관점과 경험을 자신의 세계관 안으로 진정으로 통합하고, 여성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행위이다.
성 정체성의 영역에서 일어난
폭력과 억압의 깊은 상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치유된다.
십자가는 억압받는 자의 고통에 하나님이 연대하고 계심을 보여주며 피해자에게 위로를 준다. 동시에 가해자에게는 진정한 회개를, 피해자에게는 용서를 촉구한다. 이 용서를 통해 과거의 기억은 '치유된 기억(Healed Memory)'으로 변환되고, 남녀가 사랑과 평등에 기반한 화해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다. 볼프는 주장한다. 여성성과 남성성의 이상적인 기준을 세우기 전에 성으로 구별된 몸을 각각 근거로 삼고, 신적 위격의 정체성과 관계에 대한 비전에 통제받는 상태에서 젠더에 대한 사회적 구성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여성성이나 남성성이 어떤 본질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을 모형으로 남성과 여성이 특정한 문화적 배경 속에서 여성성과 남성성을 규정해 나가야 한다고 볼프는 주장한다.
그럼 여기서 다른 관점에서는 어떻게 보고 있는지 살펴보자. 먼저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이다. 버틀러는의 저서 '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은 기존의 젠더(Gender)와 섹스(Sex)에 대한 이해에 혁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개념들 중에서도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젠더 수행성'이었다. 수행성이라는 단어는 사실 영미철학에서 말하는 '과정철학'의 결과이다. 또한 실용주의에서 말하는 '경험하면서 배운다'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부분에 대해서 나는 젠더의 영미철학화되어 있다고 보고 싶다. 과정을 통해서 젠더가 만들어진다고 하는 관점은 다분히 미국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젠더의 수행성(Performativity)
버틀러는 젠더가 우리가 가진 내면의 본질이나 자연스러운 속성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련의 행위, 몸짓, 말투, 그리고 제스처를 통해 만들어지는 수행(performance)이라는 혁명적인 주장을 한다.
수행성은 배우가 무대 위에서 역할을 연기하듯, 우리가 사회적 규범에 맞춰 '남성' 또는 '여성'처럼 보이도록 몸을 움직이고 표현하는 반복적인 과정을 의미한다.
이러한 반복적인 수행이 마치 젠더라는 것이 실재하는 본질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 뿐이라는 것이 핵심이다. 즉, 행위가 젠더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 자체가 젠더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섹스/젠더/욕망의 구분 해체
이론적으로 섹스(Sex)생물학적 사실(염색체, 생식기 등)을, 젠더(Gender)는 사회문화적 역할을, 욕망(Desire)은 성적 지향을 나타내는 것으로 구분되었다.
버틀러는 이러한 구분 자체가 젠더 이분법을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적 구성물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생물학적인 섹스 역시 순수한 자연적 사실이 아니라,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담론과 권력의 투사를 통해 이미 해석되고 구성된 개념이라고 본다. 즉, 섹스 또한 젠더만큼이나 구성된 것이며, 이들의 구분을 해체함으로써 이성애 중심적인 젠더 시스템의 토대를 흔드는 것이다.
젠더의 패러디와 전복
젠더의 수행성이 반복을 통해 젠더의 환영(illusion)을 만들어낸다면, 이 반복을 비틀거나 과장함으로써 젠더 규범을 전복하고 비판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버틀러는 특히 드래그(Drag)와 같은 젠더의 패러디적 행위(남성 의상을 과장되게 입은 여성, 여성 의상을 과장되게 입은 남성 등)에 주목한다.
드래그는 젠더가 단지 옷이나 분장 같은 복사본에 불과하며, 그 밑에는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이러한 패러디는 젠더 규범의 인공성과 취약성을 드러내고, 새로운 젠더적 가능성을 열어주는 실천적인 잠재력을 가진다고 본다.
다른 한편 프랑스철학에서는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이리가레이(Luce Irigaray)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로서, 주로 성차(sexual difference)와 여성성(femininity)에 대한 핵심 이론을 발전시켰다. 이리가레이의 이론은 프랑스의 베르그송과 들뢰즈의 사고여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된다. 생철학 혹은 몸의 철학의 이해를 통해서 젠더라고하는 사회성보다 오히려 '몸'을 통한 여성의 독특성과 고유성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볼프는 이리가레이가 접근하는 '몸'을 통한 젠더적 영역을 확보하려는 주장에도 반대한다. 그런 방식으로 남성성이나 여성성을 정하는 것에 대해서 한발짝 물러서 있는 것이다.
성차(Sexual Difference)의 윤리와 형이상학
이리가레이 철학의 중심에는 성차의 개념이 있다. 그녀는 성차가 단순한 생물학적 사실이나 사회적 역할의 차이가 아니라, 문명과 존재론적 차원을 규정하는 근본적인 형이상학적 차이임을 강조한다.
남근 중심주의 비판: 서구 철학과 언어는 남근 중심적(phallocentric)이며 동일자의 논리를 따르고 있다. 즉, 모든 것을 남성적인 기준으로 측정하고, 여성을 남성의 "결여(lack)"나 "반대(opposite)"로만 규정해왔다.
두 주체(Two Subjects)의 필요성: 이리가레이는 남성 주체와 여성 주체가 각각 온전히 인정받는 두 개의 주체(two subjects)가 존재하는 사회, 즉 성차의 윤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여성은 남성 주체의 거울이 아닌, 그 자체로 독립된 존재론적 지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상징계: 이러한 성차의 윤리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여성의 경험과 몸을 반영하는 새로운 상징 질서와 언어가 확립되어야 한다.
여성의 언어와 몸: 두 입술(Two Lips)
이리가레이는 여성의 몸과 성을 남성 중심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여성 고유의 방식으로 정의하려 시도했다.
여성 성기의 자기 접촉성(Autocontact): 그녀는 여성의 성기(vulva)가 '두 입술(two lips)'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접촉하고 있는 상태, 즉 자기 접촉적(auto-contact)인 성(sexuality)을 가진다고 설명한다.
복수성(Plurality)과 유동성(Fluidity): 이 자기 접촉성은 여성에게 복수적이고 다성적인(plural) 정체성, 그리고 유동적이고 비-단일적인(non-unitary) 에로티시즘을 부여한다. 이는 남성의 단일적이고 고정된 성기(phallus)와 대조된다.
여성적 글쓰기(Écriture Féminine): 이러한 여성의 몸과 성의 특성은 여성적 언어 또는 글쓰기로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언어는 남성 언어의 직선적이고 논리적인 구조를 벗어나, 흐름, 비선형성, 복수성을 특징으로 한다.
어머니/딸 관계의 형이상학적 회복
이리가레이는 어머니와 딸 사이의 관계가 서구 문명에서 억압되었으며, 이를 회복하는 것이 여성 주체의 확립에 필수적이라고 본다.
모계의 억압: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남성 중심적 문화는 딸이 어머니를 경멸하고 단절하도록 요구해왔다. 이로 인해 여성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여성적 계보(feminine genealogy)를 상실했다.
여신 숭배와 모성 회복: 이리가레이는 고대 문화에서 숭배되던 여신(Goddess)의 상징을 회복하여, 어머니를 생명을 주고 창조적인 힘의 원천으로 재조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어머니의 몸을 단순한 생물학적 기능이 아닌, 문화적, 상징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격상하는 것이다.
성차의 수직적 구조: 어머니와 딸의 관계는 여성 간의 수직적인 성차를 확립한다. 딸은 어머니를 통해 자신의 여성적 계보와 문화를 물려받고, 어머니의 몸을 긍정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독립된 여성 주체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
볼프의 포용은 여성의 경험과 주체성을 급진적으로 사유한 루스 이리가레이의 이론에 신학적으로 응답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이리가레이가 남근 중심적 동일자의 논리를 비판하고 두 주체가 인정되는 성차의 윤리를 주장했듯이, 볼프 역시 남성 중심적 배제를 철저히 비판하고 여성에게 공간(자리)을 내어주는 윤리적 실천을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영역을 얻어내는 방식의 이리가레이의 방식은 따르지 않는다. 진정한 포용은 단순히 남녀의 동등한 역할 분배를 넘어선다. 이는 남성이 자신의 권위와 특권을 기꺼이 내려놓고 여성의 고유한 정체성(성차)과 경험을 환대하며, 이리가레이가 강조했던 모계적 계보와 여성적 언어의 가치까지도 존중하고 통합하려는 상호적인 사랑과 자기 비움의 실천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볼프는 남녀 관계의 성적 배제를 극복하기 위해 삼위일체적 포용 신학을 윤리적 근거로 확립하고 있다. 그는 니체처럼 타자의 배제를 통해 자아를 세우는 방식이나, 포이어바흐적 투사에 기댄 신적 위계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거부한다. 대신, 요제프 라칭거와 위르겐 몰트만의 논리를 수용하여, 남녀 관계의 모델을 지배 없는 상호 내어줌(친교, Perichoresis)에 기초한 동등하고 상호적인 환대 공동체로 제시하고 있다. 성 정체성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서 동등하게 출발하지만, 죄와 자기중심성으로 인해 억압과 폭력의 도구가 되었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자기 비움(케노시스)과 용서의 실천을 통해서만 '치유된 기억'을 가진 포용의 관계로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이 볼프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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