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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신학일기

배제하지 않고 포옹하려면

현대기독연구원_미로슬라브볼프_’배제와 포용‘ 한숨에 읽기

by 낭만민네이션

미로슬라브볼프_’배제와 포용‘ 한숨에 읽기

현대기독연구원의 김동춘 교수님께 배운지도 벌써 8년이나 지났다.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에서 뵙고나서 이후로 계속 스터디도 하고 예배도 드리고 ‘사회적 제자도 운동’을 함께 하기 위해서 함께 활동도 한다. 지금까지 수 많은 책을 읽었지만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늘은 지난 8주간 배웠던 미로슬라브볼프의 ‘배제와 포용’을 한번에 정리하는 시간이다.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오늘 오면서도 이건 일종의 ’훈련‘인데, 언제까지 훈련을 해야할까라는 소중한 자괴감을 가지고 신림동 국사봉을 올랐다.


볼프의 책을 다시 보면서 느꼈던 중요한 점은 가해자 뿐 아니라 피해자도 회개해야 한다는 것과 생각만으로는 포용할 수 없고 행동으로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포용할 수 있는 의지’라는 것은 행동으로 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행동이 더 중요하다.



0. 들어가기_배제와 폭력의 근원에 대한 신학적 진단


현대 사회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인 정체성과 타자성의 문제는 단순히 개인의 심리적 영역에 머물지 않고, 폭력과 억압의 근원으로 작용해왔다. 근대 유럽 문명이 자기 정체성을 확고히 하려는 과정에서 우월한 종교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타 문화를 식민화하고 파괴한 역사적 사실이 이를 명백히 증명한다. 볼프가 주목하듯이, 민족적·인종적 갈등의 비극은 결국 정체성과 타자성이라는 더 큰 문제의 일부로서 우리의 의식 속으로 깊이 스며들었다. 근대 이성의 논리는 타자를 자기 안으로 흡수하여 동화시키고자 하는 동일자의 논리를 낳았으며, 이는 배제와 억압의 반복적인 패턴을 만들어냈다. '문화적 청소'와 같은 극단적인 행태는 정체성과 타자성 문제를 신학적 성찰의 핵심 주제로 삼도록 강력하게 요구한다. 따라서 이 책은 인권이나 정의의 문제 외에도, 바로 이 정체성과 타자성의 자리를 명확히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이야말로 포용으로 나아가기 위한 첫걸음이라 할 수 있다.


볼프는 배제와 억압의 현실을 진단하기 위해 근대성 비판을 필수적인 과정으로 삼으며, 포스트모던 철학의 담론을 주된 소재로 끌어들인다. 특히 니체, 푸코, 데리다와 같은 철학자들의 사유는 서구의 이성 중심주의와 거대 서사의 붕괴를 명확히 보여주는 효율적인 도구가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강조하는 다양성과 차이, 그리고 주체의 해체는 동일자의 논리에 갇힌 근대성을 비판하는 데 유용하다. 또한 지그문트 바우만은 홀로코스트가 근대적 합리성과 관료체제가 지닌 구조적 가능성 속에서 발생했다는 충격적인 진단을 내놓으며 근대성이 가진 내재적 폭력성을 폭로한다. 이렇듯 볼프는 현대철학적 통찰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현실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정확하게 진단한다. 하지만 이 책은 철학적 분석에만 머무르지 않고, 신학적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철학적 도구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넘어서고자 한다. 이처럼 배제와 포용은 정치신학적 색채와 철학이론적 색채를 절묘하게 결합하여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이 여타 구조 비판서와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사회적 행위자(social agent)의 윤리적 선택과 책임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볼프는 배제가 사회의 구조적 조건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과 실천을 통해 강화된다는 입장을 취한다. 따라서 배제를 넘어 포용으로 가는 해답 역시 제도 개혁이나 구조 개혁의 문제가 아닌, 행위자의 윤리적 실천에서 찾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사회적 배열(구조)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그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주목하는 것이다. 용서, 자기 내어줌(self-giving), 위험을 감수한 관계 맺기와 같은 실천들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포용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선택해야 할 길이다. 이처럼 도덕적 책임은 행위자에게 있으며, 포용적 관계를 살아가려는 윤리적 선택이 구조적인 변화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본다. 볼프는 ‘포용하려는 의지’를 매우 강하게 강조하며, 신학적, 윤리적 대안 제시를 시도하는 실천적인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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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차이의 정치와 인정 투쟁


포스트모던 철학에서 핵심적으로 다루어지는 '차이의 정치(Politics of Difference)'는 성, 젠더, 인종, 문화 등 다양한 정체성이 사회적 관계에서 권력 불평등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다룬다. 이는 개별 인간에 대한 획일적인 보편성을 주장하는 근대적 사고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다. 차이의 정치는 단순히 차이를 인식하는 것을 넘어, 그 차이 자체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차이로 인해 발생한 불이익을 해소하려는 노력을 의미한다. 여기서 '정치'란 국가 안의 통상적인 의미가 아니라, 사회적 규범과 제도에 도전하고 변화시키려는 확장된 의미의 투쟁을 뜻한다. 찰스 테일러는 이 정치가 개인이나 집단의 독특한 정체성을 인정하라고 요구하며, 지금까지 무시되거나 동화되어 온 특성을 지적한다. 타자와 나를 구별시키는 특징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성이라는 이상에 대한 가장 심각한 범죄를 막는 길이다. 따라서 차이의 정치는 '차이의 인정으로서의 평등'을 추구하는 현대 신학적, 윤리적 과제이다.


차이의 정치는 두 가지 근본적인 확신에 기초한다. 첫째는 정체성이 필연적으로 개인이 태어나고 자란 사회적 특수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는 점이다. 개인은 부모, 또래 집단, 교사 등 공동체의 지도자와 자신을 동일시할 때, 단순히 인간으로서의 자신뿐 아니라 특정한 언어, 종교, 관습에 부여된 가치와 차이를 이해하는 방식까지 동일시하게 된다. 둘째 확신은 정체성이 일정 부분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받게 되는 인정에 의해 형성된다는 매우 중요한 통찰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을 인정하지 않거나 잘못 인정하는 것은 그에게 막대한 해를 끼치는 행위이며, 이는 곧 일종의 억압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러한 억압은 결국 그 사람을 거짓되고 왜곡된 존재 양식에 가두는 결과를 초래하여 그의 온전한 존재 방식을 방해한다. 그러므로 타자에 대한 정당한 인정은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포용으로 나아가기 위한 윤리적 전제가 된다. 볼프는 이처럼 인정 투쟁의 중요성을 철학적 논의를 통해 신학적 통찰로 연결시키고 있다.


문명화 과정과 문화적 동화는 지배 집단이 자신들의 규범을 보편적인 것으로 설정하고 피지배 집단의 정체성을 억압하거나 말살하는 기제가 되었다. 뒤르켐에 의하면, 사회적 집단이 통합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의 감정과 믿음을 공유하는 공통의 의식을 소유해야 한다. 그러나 이 사회적·문화적 통합 과정은 결국 개인의 자율성을 소외시키고 집단에 결합하도록 강요하는 동질성 강요로 귀결되었다. 문화적 동화는 본질적으로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전제하며, 동화되지 않는 타자에 대한 지배자의 시각을 내포하고 있어 폭력적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서방세계의 문화적 제국주의를 비판하며, 서구의 식민지에 대한 문화 보호가 사실은 제국주의 문화였다고 통찰한다. 사이드가 주장하듯이 모든 문화는 단일한 것이 아니라 혼혈이며, 다양하고, 복합적인 하이브리드성을 옹호해야 한다. 볼프는 이러한 문화적 동질성 강요가 타자의 정체성을 어떻게 억압 내지 말살하였는지 상세히 언급하며 포용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찰스 테일러의 '차이의 정치'

찰스 테일러의 ‘차이의 정치’는 타자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것이 곧 윤리적 책무이자 정치적 정의임을 선언하는 통찰력 있는 담론이다.

고유한 정체성을 향한 적극적인 인정 요구 : 이 정치는 인간에게 일률적으로 부여되는 보편적 평등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단언한다. 민족, 젠더, 문화 등 개별 집단이 지닌 독특한 특수성을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존중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 과거 지배적인 정체성에 의해 강요되었던 강제된 동화(assimilation)를 근본적으로 거부하며, 타자를 그들 자신만의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이 정치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된다.

인정 결여가 초래하는 존재론적 억압 : 테일러는 인간의 정체성이 타인에게서 받는 인정(Recognition)을 통해 형성된다는 핵심 통찰에 기반을 둔다. 따라서 타인에게 정당한 인정을 받지 못하거나 심지어 왜곡된 인정을 받는 것은 단순히 불쾌한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진정한 자아를 왜곡하고 축소된 존재 방식에 가두는 심각한 억압이 된다고 경고한다. 인정의 결여는 개인의 진정성(authenticity)을 훼손하는 불의이며, 이는 정치적 문제로 해결해야 할 본질적인 상처를 남긴다.

차이 존중을 통해 성취되는 진정한 평등 : 궁극적으로 '차이의 정치'는 모든 이를 동일한 규격 안에 넣으려 하는 획일적인 보편주의를 넘어선다. 이 정치는 차이 그 자체를 가치 있게 인정하고 존중함으로써 평등이 성취된다고 믿는다. 지배 문화에 흡수될 필요 없이, 각 집단이 가진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공적 영역에서 동등하게 존중받을 때, 비로소 차별 없는 공존이 가능하며, 이는 곧 다문화적 관점에서의 정의가 된다.



2. 주체 해체와 권력-지식 담론의 이해


구조주의는 인간을 자유로운 주체가 아닌, 사회적 구조 (언어, 무의식 등)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로 보며 주체나 자아보다 구조가 우선한다고 주장한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문화 역시 언어처럼 구조를 가진 기호 체계로 보고, 그 배후의 심층구조를 분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포스트구조주의는 이러한 보편적 구조가 흔들리는 지점에 주목하며, 구조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비판한다. 포스트구조주의는 더 나아가 주체를 더욱 근본적으로 해체하며, 개인의 자아와 주체는 언어, 담론, 권력 관계가 만들어낸 '효과(effect)'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자율적이고 중심적인 주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주체는 끊임없이 구성되고 변형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처럼 주체의 해체는 근대성이 낳은 오만한 동일자의 논리를 비판하는 데 있어 중요한 철학적 무기가 된다. 볼프는 이러한 주체 해체 담론을 통해 배제하는 주체의 허상을 신학적으로 재검토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한다.


미셸 푸코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중 하나로, 지식이 어떻게 권력과 결탁하여 인간을 규율하고 통제하는지를 역사적으로 추적했다. 푸코에게 권력(Power)은 국가와 같은 중앙집권적인 실체가 아니라, 사회 전체에 미세하게 퍼져 개인의 삶과 몸을 감시하고 형성하는 생산적인 관계망이다. 지식(Knowledge)은 순수한 진리가 아니라 권력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산물이며, 지식과 권력은 서로를 생산하는 권력/지식의 복합체를 이룬다. 이러한 권력 메커니즘은 파놉티콘과 같은 감시 시스템을 통해 작동하며, 개인이 스스로를 감시하고 규율하는 내면화된 통제를 낳는다. 볼프는 푸코의 이러한 통찰을 통해 사회적 배제가 단순히 악의적인 행위가 아니라, 지식과 권력 담론 속에서 합리화되고 제도화되는 과정을 이해한다. 따라서 배제를 넘어서는 포용은 단순히 개인의 선의가 아닌, 이러한 권력 담론의 구조를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사상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볼프에게 근대성의 이념 해체라는 중요한 영감을 제공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며 이성, 진보, 기독교적 도덕과 같은 절대적 기준(거대 서사)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분명히 했다. 니체의 관점주의(perspectivism)는 "사실은 없고 해석만 있다"는 주장으로, 객관적인 단 하나의 진리를 부정하고 모든 것은 각자의 관점에 따른 해석일 뿐임을 강조한다. 이 사상은 후대의 데리다의 해체주의와 깊이 연결된다. 또한 니체가 말한 권력에의 의지(Will to Power)는 지식이나 도덕이 순수한 진리가 아니라 누군가의 권력 의지가 만들어낸 산물임을 폭로한다. 이러한 니체의 통찰은 볼프가 배제와 억압의 도덕적 토대가 힘의 관계 속에서 구성되었음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볼프는 니체의 해체적 사유를 수용하여 근대적 주체의 오만을 무너뜨리고, 삼위일체적 사랑이라는 새로운 토대 위에서 포용 신학을 정립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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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근대적 합리성과 홀로코스트의 구조적 폭력성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그의 저작에서 홀로코스트를 유대인에 대한 비근대적 야만성의 폭발이 아니라, 근대적 합리성 자체가 지닌 구조적 가능성 속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분석했다. 바우만의 핵심 주장은 홀로코스트가 바로 근대성의 산물이라는 점인데, 이는 근대적 조건들의 조합으로 나타난 필연적인 결과라는 통찰을 제시한다. 구체적으로 관료주의적 합리성은 목표 달성을 위해 수단을 효율적으로 조직화하며, 기술적 효율성은 철도 시스템, 데이터 관리, 분업 구조 등을 통해 학살을 기술적으로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시스템은 개인들이 자신의 작은 작업만 수행하고 전체 폭력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도덕적 거리(moral distance)를 확보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홀로코스트는 근대성의 합리화, 관료화, 기술화가 어떻게 극단적인 폭력으로 전환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남아있다. 볼프는 이러한 바우만의 분석을 수용하며 근대성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시작하는 토대를 마련한다.


바우만에게 근대성은 혼돈을 통제하고
완벽한 질서를 만들려는
거대한 프로젝트였다.


이 질서 구축의 과정에서 근대는 '정상/비정상'이나 '가치 있는/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이분법적 범주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러한 범주에 들어맞지 않는 사람들은 문제적 존재로 분류되어 사회적으로 '타자화'된다. 바우만에게 '타자'란 나와 다른 사람이기 이전에, 질서를 유지하려는 근대적 사회가 억압하거나 제거하려는 존재를 뜻하는 것이다. 근대성이 '깨끗한 질서' 즉, 완벽한 동질성을 만들려고 할 때, 타자는 그 질서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타자를 제거하려는 충동은 근대적 합리성의 내재된 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홀로코스트는 이러한 근대적 정화의 충동이 가장 극단적으로 실행된 역사적 사건인 것이다. 이러한 통찰은 볼프가 배제와 포용의 문제를 단순히 종교적 편협함의 문제가 아닌, 근대적 이념의 구조적 문제로 보게 만드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바우만은 홀로코스트와 같은 타자화 논리가 과거에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한다고 경고한다. 근대적 합리성의 내재적 패턴이 반복될 위험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난민, 이민자, 혹은 경제적으로 '쓸모가 없다'고 규정된 인간들은 사회의 관리 대상이나 보안상 '위험요소'로 분류되어 잠재적인 제거의 대상으로 취급될 수 있다. 이러한 집단들에 대한 편견과 배제는 근대적 합리성이 만들어낸 타자화의 메커니즘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 깊숙이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볼프는 우리가 이러한 근대적 합리성의 내재된 위험을 직시하고, 단순한 선의를 넘어선 윤리적 실천을 통해 이를 끊어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홀로코스트는 곧 경고등이며, 그리스도인들이 포용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야 할 시대적 요청이 된다. 일상 속의 타자화를 극복하는 것이 포용 신학의 중요한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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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학적 기반_십자가와 삼위일체론


볼프의 포용 신학은 인간적인 관용이나 이성적 합의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 신학적 기반을 갖는다. 이 책의 신학적 기반은 바로 십자가와 삼위일체론에서 비롯된 자기 내어줌(self-giving)의 신학이다. 십자가는 자기를 비우고 타자를 위해 가장 극단적인 희생을 감수한 사건으로서, 배제의 논리를 완벽하게 전복시키는 포용의 원형을 제시한다. 십자가의 자기 내어줌은 타자를 나에게 흡수하여 동일화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타자성을 온전히 인정하며 자신의 안전지대를 벗어나는 모험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학적 통찰은 배제를 넘어 포용으로 가는 길에 반드시 요구되는 위험을 감수한 관계 맺기의 윤리적 토대를 제공한다. 즉, 그리스도인의 포용은 윤리적 책무 이전에,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 사랑의 본질을 모방하고 체현하는 신앙적 실천이다. 볼프는 이처럼 십자가의 수난을 포용 신학의 가장 강력한 증거이자 동력원으로 제시하고 있다.


볼프가 강조하는 또 다른 신학적 기초는 삼위일체론인데, 이는 차이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공동체적 상상력을 제공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는 세 위격이 차이를 유지하면서도 완벽한 관계와 사랑 속에서 하나됨을 이루는 관계의 원형을 보여준다. 이는 서구 형이상학이 추구했던 단일하고 중심적인 주체의 개념을 해체하고,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는 진정한 공동체의 모습을 신학적으로 구현한다. 삼위일체론은 자기 내어줌을 통해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하며, 상호 침투하는(페리코레시스) 역동적인 관계의 모범을 제시한다. 이러한 삼위일체적 공동체성은 교회가 지향해야 할 포용적 관계의 모델이 되며, 교회론적 상상력으로 이어진다. 교회는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를 본받아, 다양한 타자들을 동화시키려 하지 않고 그들의 고유한 차이를 인정하며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포용은 바로 이러한 삼위일체적 사랑의 현실적 증언이다.


볼프는 자신의 포용 신학을 정립하기 위해 단순히 철학적 분석이나 교리적 논의에만 의존하지 않고, 성경 내러티브를 소재로 삼아 해석학적 작업을 구사하고 있다. 이 책의 거의 모든 챕터마다 성경에 기록된 다양한 이야기들은 배제와 포용의 실제적인 문제를 조명하는 살아있는 예시와 증거로 활용된다. 성경의 이야기들은 억압받고 소외된 타자들에게 다가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나, 하나님의 보편적인 구원 경륜을 보여주는 내용들을 통해 포용의 신학적 근거를 풍성하게 제시한다. 이러한 해석학적 작업은 포용 신학을 추상적인 이론이 아닌,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실현해야 할 신앙적 명령으로 만든다. 성경 내러티브를 통해 우리는 배제와 포용의 문제가 구원사의 핵심과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볼프는 성경을 타자에 대한 시각을 교정하고 포용적 관계를 형성하는 실천적 교과서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그릴 수 있는 건 고갱의 내면에 ‘차이와 배제’가 기반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0. 나오기_포용하려는 의지와 윤리적 선택


볼프는 현대철학적 사유를 사회와 문화 분석을 위한 도구적 틀로 사용하며 근대성의 산물이 초래한 끔찍한 비극을 직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니체의 해체주의와 푸코의 권력 담론에 대한 이해는 배제와 억압이 어떻게 구조화되고 합리화되었는지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통찰을 제공한다. 또한 바우만의 분석을 통해 홀로코스트와 같은 극단적인 폭력이 근대적 합리성의 내재적 패턴임을 인정하고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볼프는 이러한 현대철학이 사회, 문화 분석을 위한 도구적 틀일 뿐이며, 그들이 제시하지 못하는 궁극적인 해답은 신학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의 본질적 문제를 해결하고 근원적인 포용으로 이끌 수 있는 힘은 십자가와 삼위일체의 신비 속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볼프의 작업은 현대철학의 통찰을 수용하되, 그 한계를 비판적으로 지적하고 넘어가는 신학적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볼프는 배제와 억압의 현실을 사회구조의 측면에서만 접근하는 것을 경계하고, 타자에 대한 배제를 단절하고 나에게 끌어들이는 노력(포용)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이 책의 결론은 바로 ‘포용하려는 의지’를 매우 강력하게 강조하는 데 있다. 포용은 제도의 개혁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윤리적 선택을 통해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할 능동적인 행위이다. 용서, 자기 내어줌, 위험을 감수한 관계 맺기와 같은 실천들은 배제하는 주체의 안전지대를 스스로 해체하고 타자에게 자신의 마음을 열어주는 행위자의 결단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윤리적 선택은 도덕적 책임을 행위자에게 부여하며, 포용적 관계를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볼프는 개인의 윤리적 선택과 실천의 중요성을 재확인하며, 포용을 가장 구체적인 삶의 영역에서 이루어야 할 과제로 제시한다.


볼프가 제시하는 포용의 신학적 길은 개인의 의지에 머무르지 않고,
공동체적(교회론적)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차이 속의 일치라는 관계적 모델을 본받아 교회는 다양한 타자들을 포용하고 그들의 차이를 존중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 공동체는 십자가가 보여준 자기 내어줌의 정신을 바탕으로, 약하고 소외된 타자를 위해 자신의 특권을 내려놓는 능동적인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배제와 포용의 주제에 대한 볼프의 해답은 결국 삼위일체적 사랑의 관계를 세상 속에서 증언하는 교회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포용하려는 의지는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라, 십자가와 삼위일체론이라는 가장 견고한 신학적 토대 위에서 나오는 지속적이고 헌신적인 윤리적 실천이다. 이러한 실천만이 폭력과 억압의 근원을 넘어선 진정한 포용의 시대를 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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