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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양 Oct 10. 2017

[한글날 특집] 나랏말싸미 사맛디 아니하여

어느 날 한 외국인이 피클을 담갔다.

그 외국인이 바로 나다.


독일에서, 그것도 현지인들로 구성된 디자인 회사에서 디자이너 인턴을 하고 왔다고 하면 다들 독일어를 잘 하냐고 묻는다. 자백하자면, 이제와서는 꽤 듣고 읽지만 (말하고 쓰는 건 여즉 잘 못한다) 베를린 시에 거주지 등록 (Anmeldung)까지 마친 뒤에도 한 달간은 A, B, C, D 조차 읽지 못하는 말 그대로의 문맹이었다.


내가 가게 될 회사는 업무 공용어가 영어였다. 독일어를 하지 못해도 일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는 확답을 받았다는 이유로 나는 정말 까막눈 그 자체로 독일로 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터무니없지만, 그 무렵에는 영어로 일하는 것부터가 너무 무섭고 버거운 일이었기 때문에-그리고 독일어 못해도 사는데 지장 없대서(생각해보면 그 말을 한 사람은 독일인이었다) (니가 보기엔 괜찮은 것 같았나봐) (아니던데) - 독일어는 배울 생각도 못 했다.


아무것도 읽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도시의 풍경은 놀랍게도 일말의 해방감을 선사한다. 읽어낼 수 없는 문자는 차라리 그림이다. 모든 것이 그저 예쁘고 생경스러웠다.


그러나 그랬기 때문에 가능했던 비극적인 에피소드들이 있다. (골계미가 있었다 정도로 미화하겠다) 내 독일인 친구들이 이구동성 '다양의 가장 웃긴 에피소드'로 손꼽는 (심지어 동영상을 갖고 싶다는 요청이 쇄도했다) (내 불행을 이렇게나 즐긴다고?) (악랄하군) (우린 정말 친구였을까...) (지인) 피클 에피소드를 소개하려고 한다. 


이건 집 근처 마트를 갓 다녀온 다양의 베를린 집 찬장 속 모습이다. 한국에서 도착한 직후였기 때문에 무려 아이스 맥심 커피와 라면, 참치 캔까지 보인다. 정체 모를 깡통 음식은 전에 살던 자가 남기고 간 것인데, 집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먹지 않다가 나 역시 다음 세입자에게 선물(로 받아들일까 과연) 해 주었다. 내 직전 세입자는 인도 사람이었던 것으로 추정하는데 그 이유는 인도인 요리 연구가 친구마저 놀랄 만큼 신기한 인도 향신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저 평범한 사진 속에 오늘의 악당이 숨어 있다. 다시 한번 사진을 보자. 누가 악당인지 알겠는가?

내 원수의 흉악한 모습이다. 이 악당으로 말할 것 같으면 LPG 비오 막(유기농 마켓)에서 거금을 주고 사온 설탕으로, 유기농 마켓인 만큼 설탕 치고 꽤 비쌌다. 내가 왜 이것을 샀겠는가? 그건 이 악당이 얼굴에 '비오 베간(유기농! 비건(채식주의자)!)라고 대문짝만 하게 써붙여 놓은 데다가 NEU (NEW, 최신의 독일어)라고 빨갛게 강조까지 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자가 온몸에 키위를! 그려 넣었기 때문이었다!


'과일... 설탕... 과일에서 추출한(정말 멍청하다) 건강한 설탕인가... 과일이 많이 그려져 있네... 설탕에서 과일 맛이 나나? (정말 어리석다) (굳이 과거의 나를 가르치려 들자면 설탕에서 과일맛이 나는 게 아니라 원래 달콤한 과일에서 설탕 맛이 난다) (과당이라고 혹시 들어봤니?) 이런 신기한 설탕도 파는구나... 역시 독일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이런 신기한 설탕도 파는구나... 역시 독일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이런 신기한 설탕도 파는구나... 역시 독일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이런 신기한 설탕도 파는구나... 역시 독일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이런 신기한 설탕도 파는구나... 역시 독일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이런 신기한 설탕도 파는구나... 역시 독일


최소한 이 부분은 틀린 내용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은 좀 웃프다.


아무튼 난 저걸 잘 먹고살았다. 제육볶음이나 떡볶이, 가츠동 따위를 해먹을 때까지만 해도 저 자와 사이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몇 개 없어서 소중히 여겼던 지퍼백에 한번 더 밀봉해 주었을 만큼.


그리고 저 자의 몰상식한 패악이 벌어진 것은 2015년 10월 13일의 일이다. 


여기서 하나 더 짚고 넘어가자면 난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고, 자신의 요리실력에 자부심이 있다. 때는 바야흐로 내가 파스타에 곁들여 먹기 위해 갖은 야채를 송송 썰어 야채 피클을 담근 날이었다. 위 사진을 다시 보면 악당의 뒤로 계란과 양파가 보이는데, 저것들을 이용해서 

갖은 야채를 넣고 팔팔 끓인 맛간장에 삶은 계란을 담가 만든 아름다운 달걀 장조림(아지타마고)

그리고 뒤로 보이는 매콤하고 아삭한 야채 피클이었다. 없는 형편에 고추, 당근, 마늘, 양파, 오이를 하나씩만 사서 소중히 담근 피클이었다.

약간 뜨거운 상태였던 식초를 붓고 식히기 위해 저렇게 아름답게 (다시 봐도 정말 아름답다... 기하학적인 느낌이 바우하우스를 연상케 한다) 창틀에 올려 두었다. 밤새 식힌 다음 아침에 알리오 올리오에 곁들여 먹겠노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내가 정말 꼭 말하고 싶은 것은, 저걸 만들었을 때 내가 갑작스럽게 바뀐 날씨를 견디지 못하고 지독한 감기 몸살에 걸렸었다는 사실이다. 아픈 몸을 이끌고 먹어보겠다고- 먹겠노라고- 손을 떨고 코를 훌쩍이며 담근 소중한 피클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저걸 먹을 희망으로 평소보다 두어 시간 일찍 자기까지 했었다. 자면서 '내일 피클의 충격적인(어떤 식으로든 충격을 받긴 했다) 맛을 묘사하는 인스타 포스팅을 할 생각을 하자 너무 설렌다'라고 생각했던 게 기억난다.



인간은 무언가를 성취했을 때보다 성취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을 때가 더 행복하다.


라고 내가 말했다.


다음날 피클을 집어 들면서 무언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콧물이 아니다


나의 매콤하고 새콤하고 아삭아삭해야 마땅할 소중한 야채 피클이 (가진 야채의 전부를 털어 넣은) 콧물에 절어 있었다............................... 저 날의 쇼크는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든 야채라도 건져 먹으려 시도했지만 콧물.......... (요즘 같으면 식용 액괴를 일부러 만들었다고 우겼을 수도 있다)로부터 구제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은 저 교활한 악당 설탕이 Gelier- Zucker 였기 때문이었다.


Gelierzucker ist eine Mischung aus Zucker und Geliermitteln zur schnellen Zubereitung von KonfitürenGelees und Marmeladen. Das Fruchtgut kann dabei durch Zugabe und einfaches Erhitzen relativ schnell zu einem Endprodukt verarbeitet werden. Sehr reife oder süße Früchte, die wenig Pektin enthalten, und deshalb von sich aus schlecht gelieren, können mit Gelierzucker dennoch zum Gelieren gebracht werden.


젤라틴 은  , 젤리 및 잼의 신속한 준비를 위해 설탕과 겔화 제를 혼합한 것입니다. 따라서, 과일 재료는 첨가 및 간단한 가열에 의해 최종 제품에 비교적 신속하게 가공될 수 있다. 작은 펙틴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익은 과일이나 달콤한 과일 은 스스로 겔화되기 때문에 겔화 설탕으로 겔화될 수 있습니다.

(출처는 독일 위키피디아 : https://de.wikipedia.org/wiki/Gelierzucker 이 악당에 대해서 직접 번역할 생각 따윈 전혀 없어서 그냥 구글 번역기 돌렸다)


저 악당은 젤리나 잼, 마멀레이드를 만들기 위해 젤라틴인지를 설탕과 섞은 것이었다. 지금 악당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니 

반으로 잘린 키위... 가 아니라... 빵에 발라져 있는 키위... 다진 것.... 키위 마멀레이드....


아무튼 내가 이 일련의 에피소드를 겪으며 느낀 것은 글을 모르면 이렇게... 온몸으로 삶을 겪어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와중에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도 빵+키위 잼이라는 것을 캐치하지 못한 나의 아둔함도 원망스럽다. 그렇지만 도대체 누가 설탕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포장에 갑자기 빵과 잼이 등장할 거라고 생각하냐고...


이런 에피소드는 몇 가지 더 있는데 예컨대 buttermilch (버터 맛이 많이 나는 더 부드럽고 진한 우유라고 생각하고 사서 병에 입대고 마셨음. 위액이 역류한 줄 알았다) 에피소드라던가... 지금 혼자 이런 에피소드들을 하나하나 기록하고 있는데 (겸손한 삶의 자세에 큰 도움이 된다) 언젠가 이 무수한 실수담이 충분히 모이면 완성되면... 책으로 엮을 것이다. 아무튼 이런 것을 겪으면서 말과 글을 안다는 것, 읽고 쓰고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의 소중함을 느꼈다.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 와로 서로 사맛디 아니할쌔
이런 전차로 어린 백성이 니르고자 홀빼이셔도
마침내 제 떠들 시러 펴디 못할 노미 하니라.
내 이랄 위하야 어엿 비 넘겨 새로 스믈여듧 자랄 맹가노니
사람마다 희여 수비니겨 날로 쑤메 뼌한킈 하고져 할따라미니라.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아니하여서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위하여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씀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다.(훈민정음 서문) 

(선택영역만 중앙정렬 하고 싶은데 안되는군)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어린 백셩 다양을 가엾게 여겨 주신 세종대왕님,

덕분에 쉽게 익혀 날마다 씀에 편안합니다. 귀히 여기고 곱게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젤리 설탕은 반성해라. 너는 작은 다양에게 큰 해를 끼쳤다. 콧물에 익사한 가엾은 채소들은 무슨 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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