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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를린플레이크 Jan 16. 2021

독일 호수로의 겨울 여행

검은 숲에 숨어있는 호수, 인어가 사는 뭄멜제

베를린에 오고 나서 보낸 첫 겨울(2019)은 생각보다 견딜 만했다. 해가 많이 안 나서 그렇지, 영하로 내려간 날도 별로 없고 포근하게 느껴지는 날도 많았다. 겨울 내내 눈은 거의 내리지 않았다. 드물게 한 번인가 왔던 것 같다. 눈은 남자친구의 부모님 댁이 있는 카를스루에에 가서 제대로 보았다. 해를 넘겼으니 벌써 2년 전이다. 크리스마스 연휴를 남자친구의 가족들과 보내고, 그 중 하루는 둘만 시간을 내서 여행을 했다.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검은 숲’에 가고 싶었다. ‘블랙 포레스트(Black Forest)’라는 이름에 매혹되어 언제고 꼭 한번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독일어로는 슈바르츠발트, 하지만 독일어 발음이 낯선 내게는 ‘블랙 포레스트’라는 이름이 훨씬 신비롭게 다가왔다. 검은 숲은 독일 남서부 바덴뷔르템부르크 주에 있다. 크게 북부의 검은 숲과 남부의 검은 숲으로 나뉘는데, 카를스루에에서는 북부의 검은 숲이 가깝다. 한 시간만 가면 되었다. 막연하게 동경하던 그곳을 그냥 여행도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과 가게 되다니,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쉽게 믿기지 않았다. 

검은 숲의 북쪽을 향해 달리는 차 안은 따스하고 아늑했다. 이렇게 달린다면 몇 백시간을 달려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스위스를 여행하며 흔하게 보았던 샬레(오두막집)들이 독일의 검은 숲에도 똑같이 펼쳐졌다. 12월에도 파릇파릇한 풀들의 초원이 그대로 있는 것이 새삼 신기했다. 계절을 알 수 없는 초록색 초원을 지나 귀가 점점 먹먹해지는 산길을 달리니, 이번엔 50미터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가 우리를 반겼다. 미스테리한 안개들이 몰려왔고, 점점 키가 큰 전나무들이 덩치를 드러냈다. 바덴바덴의 산 중턱에 걸려있는 안개들을 뚫고 더 높은 데로 오르자 이번엔 새하얀 구름이 산 위에서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말 그대로 구름 바다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운해를 본 것이 얼마만인지, 태어나 처음 본 것마냥 감탄했다. 



구름이 바다를 이루고 있는 풍경을 내려다보며 산 꼭대기에 오르자 이번엔 사방이 한겨울로 바뀌었다. 캐나다 로키산맥을 달리며 보았던 몇 십 미터의 전나무들이 이곳에서도 눈을 얹고 있었다. 로키산맥의 마을 재스퍼에서 머물렀던 별장도 떠올랐다. 그런 고요한 별장이 많은 이곳 바덴바덴에서도 하룻밤을 머물며 스파를 해도 좋겠다 생각했다. 바덴바덴은 독일에서 온천 휴양지로 유명하다.  


산을 넘어 우리가 도착한 곳은 뭄멜제(Mummelsee)다. 검은 숲의 남북을 잇는 분데스스트라세  500번 도로 옆에 바로 위치한 호수다. 북부에 있는 여러 분지 호수 중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다. ‘뭄멜제’라는 이름은 흰 수련을 뜻하는 이 지역 언어 ‘뭄메른(Mummeln)’에서 유래되었다. 오래 전에는 이 부근에 흰 수련이 많았다는데, 지금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고. 지금은 물고기도 살지 않는다. 


인기 관광지답게 주차장이 다 차서 좀 멀리 차를 세우고 푹푹 꺼지는 눈길을 걸어 호숫가로 향했다. 호수로 들어가기 전에 있는 기념품 숍을 영혼없이 둘러보고 곧장 호숫가로 갔다. 계단을 오르니 느닷없이 호숫가가 펼쳐졌다. 호수를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는 눈 덮인 전나무 숲이 장관을 이루었다. 그리고 흰 숲의 풍경이 고스란히 호숫가에 투영되었다. 완벽한 데칼코마니. 신비로운 풍경이다. 하얀 눈의 정령들 때문에 해가 없어도 눈이 부셨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포즈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리는 크게 호수를 한바퀴 돌기로 했다. 

 

인간을 도와준 인어들이 살고 있는 뭄멜제 

뭄멜제는 여러가지 전설을 갖고 있다. 그중 인어와 관련된 전설이 있다. 옛날 옛적에 이 호수에는 인어들과 인어를 지키는 인어 왕이 살았다. 인간들이 이 지역으로 들어와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자, 왕은 특별히 한 인어를 선택해 인간과 같이 살게 했다. 인어는 호숫가에 살면서 밤에 사람들을 돕고, 춤추고, 노래하며 함께 지냈다. 인어는 양털을 물레에 돌려 좋은 털실을 만들어 인간에게 주었고, 인간들은 이 아름다운 털실로 짠 옷을 팔아서 돈을 많이 벌었다. 그리고 인어 왕은 매일 새벽 1시가 되면 인어들을 불러 물 속으로 데려갔다. 뭄멜제에서 새벽 1 시는 인어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불행은 언제나 그렇듯 인간들이 불러왔다. 돈 맛을 안 인간들이 점점 돈을 버는 데에 혈안이 되었다. 화가 난 인어 왕은 더이상 인간을 도와주지 않고 인어들을 데리고 물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많은 작가들이 이 인어 이야기를 비롯, 호수에 전해내려오는 여러 전설과 관련된 내용을 작품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다양한 작품과 조각상들이 호수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물레를 돌리는 인어의 모습이 새겨진 나무 조각상도 있고, 호수 한가운데에서 피는 꽃을 손에 넣으면 투명인간이 된다는 마법의 ‘푸른꽃’도 세워져 있다. 그리고 호수 중간즘 가면, 베르그호텔(Berghotel)을 바라보고 있는 인어상을 볼 수 있다바위 위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이 인어가 사람들과 함께 살던 인어다이 인어는 사람들이 자신감을 갖고 서로에 대한 연민을 가질 수 있도록 돕고호수와 숲에 살던 인어들과 동물도 보살폈다안내판에는 가지고 있는 근심을 호수에 던지고 인어가 속삭이는 말을 들으라고 써 있다그리고 스스로에게 가장 중요한 소원을 인어에게 빌라고그러면 인어가 웃으며 들어줄 거라고

이곳 마을 사람들은 뭄멜 호수를 신성시했다. 호수에 돌을 함부로 던지면 폭풍우가 몰려오고, 반드시 해코지를 당한다고 믿었다. 호수의 깊이는 무려 18미터. 저 캄캄한 물 속에 지금도 인어가 살고 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깊이였다.  


호수의 둘레는 800미터다. 인어상을 지나고 나면 동화 속에 나올 것 같은 하얀 전나무 숲길과 더 깊은 산책 길로 이어진다. 남자친구의 낮고 얇은 초록색 스니커즈는 눈길에 금새 젖었다. 가다 서기를 반복하며 사진을 찍고 시간을 지체하는 사이, 젖은 발이 엄청 시렸을 텐데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아서 몰랐다. 


“발이 점점 얼고 있어.” 


짜증이라곤 조금도 섞이지 않은 그의 말이 호숫가의 얼음처럼 고요했다. 그제서야 눈치를 챈 나는 카메라를 가방에 집어넣고 그와 서둘러 걸어 나왔다. 출발했던 지점으로 돌아와 베르그호텔의  따스한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당시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처럼 몸을 녹이고 따뜻한 수프를 먹으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사람들이 뿜어내는 온기가 가득했던 실내에서 우리는 이 지방의 전통 음식을 나눠 먹었다. 사람들로 북적댔던 그 레스토랑도 지금 생각하면 꿈만 같다. 


그 여행이 마지막이었다. 카를스루에도, 검은 숲도, 부모님도 다시 보지 못했다. 그렇게 2020년이 지나고 2021년을 맞았다. 남자친구의 가족들은 메신저로 매일 안부를 주고 받는다. 얼마 전 부모님과 같은 도시에 살고 있는 여동생이 눈이 펑펑 내린 검은 숲의 사진을 보내왔다. 그곳에서 썰매를 타는 조카들의 모습도 함께. 다시 눈 덮인 검은 숲으로 가고 싶었다. 그 마음을 알았는지, 마침 베를린에도 눈이 내린다. 지난 해에는 한번도 제대로 보지 못한 눈이다. 일기예보를 보니 이번주 내내 눈 소식이 있다. 다시 뭄멜제에 간다면, 지난 번에 미처 하지 못한 소원을 인어에게 빌고 싶다. 올해는 사람들이 자주 가족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아무리 힘들어도 앞으로 일년에 한 번은 한국의 부모님도, 독일의 부모님도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이것 하나만 지켜달라고.  





이 글은 서울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이동미 작가의 베를리너로 살기(12)> 여행 기사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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