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 by 색시
주간 <시선> 이번 주제는 '청소'입니다.
선장, 우리 엄마 엄하셨던 거 알지?
인자함에 감동받다가도 호랑이같이 무서워서 어릴 적부터 내 생존전략은 두 가지였어. 절대복종 혹은 궁극의 거짓말. 청소는 전자였다. 더러웠던 게 말끔해져 눈에 띄는 건데, 들통날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궁극의 거짓말이 될 수 없으니 청소는 무조건이지.
먼저 엄마의 가벼운 결벽증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넘어가자.
모든 물건들엔 ‘제자리’라는 게 존재하고 항상 지켜졌다. 커터 칼은 현관 앞 콘솔 서랍, 각티슈는 1인 소파들 사이 팔걸이 위 정중앙, 손톱깎이는 큰 책장 오른쪽 서랍, 신발코는 바깥쪽으로 등등…
대중교통을 탈 때면 종종 장갑을 끼셨고 식당에선 따로 챙겨가신 미네랄워터를 드셨다. 합성계면활성제가 들어가지 않은 세제들만 사용하셨고 속옷이나 수건은 반드시 삶는 빨래 후 햇빛 소독. 매일 목욕 후 물때가 끼지 않도록 욕실 청소까지 싹 하고 나오셨고 전 날의 설거지가 다음날까지 넘어간 적은 없었다. 설거지 후 수전이나 싱크대 상판에 물기가 남아있던 적도 없었어. 일사불란하게 정리되어 있는 생필품들 정경은 엄마의 여군 시절을 상상하게 만들었는데, 맞다. 우리 엄만 하사 출신이셨다. 선장한테도 얘기했었지. 우리 가족은 나 빼고 전부 군필이네.
이런 엄마의 청소는 템포가 느린 대신 섬세했고, 그 가르침을 따랐던 나의 청소 역시 꽤 닮아있어 자취 후엔 편의상 요령이 살짝 필요했다.
대청소를 자주 하기보다 ‘그때그때 치우자’가 모토였어. 샤워 후 물이 튄 모든 곳을 찬물로 씻어내고(그래야 곰팡이가 덜 핀다) 거름망의 머리카락은 바로 끄집어내 휴지통으로. 세면대에 불투명한 물기가 남아있다면 슥 닦아준다. 얼룩 생기는 거 정말 싫어. 거울에도 최대한 물이 안 튀도록 고개는 푹 숙이고 세수해.
습관이 되면 딱히 시간이 배로 걸리지도, 번거롭지도 않은 행위들에 불과해.
비 오는 날은 현관에 미리 신문지를 몇 겹 깔아놓는다. 화창한 날에도 맨발로 현관 바닥을 밟진 않아. 신발로 오고 가던 바닥을 밟은 맨발로 마루를 또 밟고 돌아다니면 걸레질을 더 자주 더 빡빡해야 하잖아. 그런 의미로 쪼리나 샌들을 자주 신는 여름엔 꼭 현관 문 턱에 젖은 수건을 깔아두었다. 들어오면서 발바닥 닦고 들어가려고…
습관이 되면 시간이 배로 걸리지도, 번거롭지도 않은 행위들이지.
식사가 끝난 후 식기류는 설거지통에 담아 물에 불려 놓는다. 설거지는 바로 안 하더라도(어느 정도 쌓인 상태에서 해야 수도세와 세제를 줄일 수 있으니) 할 때에 박박 긁거나 잘 안 닦여 반복하는 수고를 덜기 위해. 기름기는 안 쓰는 천 쪼가리나 키친타월로 한 번 닦아낸 뒤 담가 두어야 편하다. 웬만하면 남기지 말고 다 먹고.
역시 습관이 되면 시간이 배로 걸리지도, 번거롭지도 않은…
엄마의 청소에서 더욱 효율적으로 어레인지 되었다고 자부하던 나의 청소는 자취 집을 찾은 측근들에게도 전파(강요) 되고 있었다. 특히 그 당시 만났던 이성친구들과는 청소문제로 여러 번 얼굴을 붉혔는데 이해 안 가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 설거지가 끝나고 세제 섞인 물기가 보란 듯이 포진되어 있는데 왜 닦질 않고 뭐든 대충 치우는 것인지. 현관 바닥 좀 밟지 말라 몇 번을 얘기하는데 듣질 않고 발바닥으로 아스팔트 먼지는 왜 그리 옮겨대는 것인지. 그렇다고 바닥 걸레질을 부탁하면 이따가 할게 볼멘소리하곤 까먹어 버리기 부지기수. 일부러 까먹은 척한 거겠지? 물건을 제자리에 놓는 법도 거의 없어. 그러니 부아가 잔뜩 나서는 너라도 제자리로 좀 돌아가세요 하고 등 떠밀어 내보냈지. 남의 물건들 치울게 늘어나면 번거로우니 애초에 양말 한 짝도 매번 들려보냈던지라 이별 후 따로 청소할 건 딱히 없어 편하더라.
‘그때그때 치우자’ 시간이 배로 걸리지도, 번거롭지도 않은 효율적인 청소방법!
그래서 작년 초 겨울, L의 옷가지들이 한 짐 가득 내 방 한편과 장롱 한 칸을 차지하였을 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어. 이전엔 누가 외출복으로 침대에 걸터앉기라도 하면 난리 난리를 쳤었는데 이제는 귀가 후 지친 몸 얼른 누이라고 새 스프레드를 업어와 이불 위에 깔아놓고 있더라니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설거지하고 물기 좀 있으면 어때, 냉장고에 물 마시러 가면서 한 번 슥 닦는 거 뭐 어려운 일이라고. 샤워는 내가 마지막으로 한 뒤 정리하고 나오면 되고… L이 현관 바닥을 맨발로 밟은 적은 있던가? 기억이 안 나네. 신경 써서 본 적이 없어. 별로 안 중요한 거였나 봐 하하 이게 정말 무슨 일일까 싶은 거지.
그러고 보니 그렇게 엄하고 까탈스러운 엄마도 우리 남매의 개인 공간에 있어서만은 너그러우셨던 것 같아. 자립심을 길러 주려던 것도 있었겠지만 알게 모르게 신경 써 주시면서도 잔소리는 거의 안 하셨어. 가끔 내무사열하자며 뒷짐지고 들어오셔서는 이불 빨아야겠다 커튼 바꿔야겠다 본인 할 일들만 잔뜩 메모해가시곤 했다.
아끼는 마음인가 봐. 사랑이라 표현하자니 청소 얘기하다 갑자기 쑥스럽긴 한데 그렇게 고집해온 규칙들이 단 번에 아무것도 아닌 게 되면서 내 희생과 상대의 안녕이 전부가 된다니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어.
L과 결혼을 결심한 데엔 이 이유가 컸다.
깔끔이란 깔끔은 다 떨어대던 예민쟁이가 타인과의 공동생활에서 아무런 불편을 못 느끼고 편안해하는 거야. 정확히 말하면 순간순간 느껴지는 불편들이 거짓 같은 거야. 이걸 내가 왜 불편해했더라 생각하다 보면 별게 아닌 거지. 알고 있던 정답에서 벗어나면 큰일이다 정해놓고 그 자그마한 틀 안에서 아등바등 댔던 거지. 내가 하는 청소 외에 타인에게 들이대던 청소의 잣대는 결국 사람에 따라 다른 거였다.
이걸 이미 알고 계셨던 엄마의 요령 덕에 나는 절대복종하여 심신의 기술들을 일분 얻어올 수 있었나 보다.
요령이 아니라 사랑이라 해야 하나? 기술이 아니라 이것도 사랑이라 해야 할 것 같은데 뭐 어쨌든.
추천 음반 : Vienna Teng [Inland Territory]
Vienna Teng의 재치있는 편곡들은 청소 효율을 향상시키는 듯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