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by 색시
주간 <시선> 이번 주제는 '여행'입니다.
사랑하는 선장, 오랜만이야. 한 달 동안 타국을 여행하던 때 하루 정도는 방에 머물며 가져간 책을 읽고 뒹굴뒹굴하다 정오 볕에 노곤노곤 낮잠도 자고 했었는데 오늘이 꼭 그런 날이었어. 그간의 피로가 쌓였는지 몇 시간을 내리 자고 나서야 겨우 책상 앞에 앉았다. 오랜만의 주제로 ‘여행’ 어때? 하고 던져놓고는 막상 적어 보려니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 무엇부터 어떻게 풀어보아야 할지 어렵네. 패기만 있으면 어디든 여행할 수 있던 때의 모험담들을 회상하는 게 여행에 대해 떠올릴 수 있는 전부인 걸까 싶은 역병의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구나.
매일매일을 여행이라 생각한다.
요 몇 주간의 테마는 [청담 기행]
나고 자라 첫 자취로 서초동에서 1년 반 보낸 시간을 제외하면 약 30년을 이곳에서 살았지만 이렇게 청담 기행을 떠올리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 6*-14, 6*-2, 그리고 9*-1번지. 이렇게 옮겨 왔네. 작년 초 만난 배필과 산책 중 영화처럼 발견한 9*-1번지는 층 두 개를 빌려 아래층엔 설계사무소와 내 작업실, 위층엔 자그마한 신혼집을 꾸며 모든 공간을 한 건물에 합친다는 설렘으로 반짝였다. 봄날 이사를 하고 반년이 흘러 예상치 못한(예상했으나 도파민의 여파로 잠시 제쳐놓았던) 문제에 봉착해 버리기까지 모두 영화 같았지.
20년을 홀로 자유로이 살아온 L에게 개인 공간 하나 없는 상태에서 타인과의 24시간 동거는 쉽지 않았고 점점 스트레스가 축적돼 우울감을 토로하기 시작했어. 생활면에서 그 어떤 잔소리며 참견도 없이 죽이 잘 맞지만 우리 모두 알다시피 ‘자기만의 방’은 필요하기 마련이잖아. 나는 신혼집과 사무실을 잇는 내부계단의 사용이 제한되었고 L의 업무 중 최대한 눈에 띄지 않으려 피해 다니게 됐다. 어쩔 수 없는 내 피아노 소리 외의 움직임을 모두 없애기 위해 까치발은 기본이고 생활 소음의 볼륨 전부를 낮췄어. 하지만 갖은 노력들에도 물리적으로 붙어 있는 공간 내에서 서로 떨어져 있다 자위하긴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내 나름의 여행을 계획했어. 개인 아틀리에에 탄력적이지만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고 업무량이 어마어마한 그에 비해 프리랜서인데다 노동시간이 비교적 적은 내가, 그 업무시간 동안 외출을 감행한 것. 같은 건물에 있는 시간을 삭제하고 싶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시도하는 타인의 안녕을 위한 여행이야.
이전의 여행들에서도 괴나리봇짐마냥 한짐 싸 들고 다니길 좋아했는데 이번이라고 대충 나갈 생각은 없어 커다란 보스턴백에 공부할 거리들, 일기장, 스케줄러, 읽을 책, 충전기, 간단한 화장품, 물 한 병 등등 넣어 집을 나섰다. 잠은 집에서 자지만 그 외의 시간들 가급적이면 이 동네를 열심히 탐방하리라 다짐했던 월요일 오전이었어. 더없이 익숙하지만 나이 서른이 넘어 다시 뒤적여보는 골목들은 또 다르겠지 싶었는데 정말 그렇더라.
우선 나 역시도 L의 스트레스가 옮겨붙었는지 위장이 좋지 않아 내과를 찾았어. 여행지에서 가보는 병원은 처음이야. 모국어로 병원 일을 볼 수 있다니 마음이 놓여. 우리*병원 사거리 하나은행 건물의 B 내과 혹시 가 봤으려나? 전기세를 아끼려 그러는 건지 콘셉트인지 홀이 조금 어두워서 분위기가 묘해. 대기 인원이 많아 약 30분을 기다리는 사이 집에서 못 쓴 아침 일기도 몇 자 적었어, 그러고 보면 나는 어느 여행지에서든 틈만 나면 수첩을 꺼내 무엇이든 적어. 그렇게 적어놓은 글들 모아서 선장 편지에 동봉해도 꽤 재밌을 텐데. 내용은 중구난방이지만…
약 처방을 받고 나와 버스로 두 정거장 오니 배가 슬슬 고파.
평소 눈여겨두었던 짬뽕 집엘 들어가서 한 끼 해결하고 나오는데 괜히 재밌어. 꼭 타지에서 온 나그네가 사연 한가득 이고 지고 와서는 혼자 국 한 그릇 비우고 다시 먼 길 떠나는 것 같잖아, 담배 태울 것도 아니면서 가게 앞 재떨이 근처를 배회하며 킥킥거리다 큰 길로 나왔다.
원래 계획은 우리의 추억이 묻어 있는 청담 도서관 일명 ‘청도’에 가서 챙겨온 것들로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글도 쓰는 거였어, 내 거의 유일무이한 취미인 다이어리도 정리해야 했고. 오랜만에 설레는 마음으로 청담동 주민센터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에 내렸는데 이게 뭐야 월요일은 휴무다. 하긴 한 15년을 안 갔으니 휴무 정도 까먹을 만도 하지. 허무함 아쉬움과 함께 밀려드는 나름의 재미. 이게 바로 여행의 묘미 아니겠나 예상치 못한 난관 뭐 그런 거. 잠시 고민하다 길 건너 별다방으로 갔어. 무거운 짐가방에 한 아름 처방받은 약 봉지,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치고 들러서는 구입한 올리*영 쇼핑백을 바리바리 싸 들고 나트륨 한껏 섭취한 몸으로 움직이려니 살짝 힘들어.
며칠을 이렇게 보냈어, 청담 여행기 그 사이 네가 잠시 머물고 있는 을지로 기행도 한 꼭지 들어있고. 다음날엔 청도 입성에 성공했으나 우리가 기억하던 그 열람실은 온데간데없고 정말 ‘도서관’이 되어 있더라. 벽을 빙 둘러 있는 책상 한 편에 앉아 읽고 쓰다 나왔는데 창가라 발이 조금 시렸어. 골목도 건물도 많이 변했어.
안 변할 것 같았는데.
L은 알까 모르겠어. 자기의 스트레스 때문에 타인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다며 혼자 있고 싶단 말 한마디 못하겠다길래 알아서 집 나와 여행 중인 아내의 마음을. 여행의 시작 역시 사랑이구나 깨닫는 마음을.
이 영화 같은 공간에서 매일 눈 뜨고 하루를 보내고 별게 아니어도 직접 요리해 사랑하는 이를 먹이니 괜히 더 맛있어 보이는 식사를 하는 것 모두 여행이라 생각했는데 청담 기행도 나름 매력 있더라. 토종 서울 사람임에도 생각보다 서울을 잘 모르는 바보라, 언젠가는 서울 도심의 호텔들을 돌며 몇 주간 서울 여행해 보고 싶다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슬슬 계획해 볼까 봐. 돈을 모아야겠지, 여행하면서 피아노 연습을 챙기려면 따로 시간제 연습실도 빌려야 할 테고. 뭐 이렇게까지 하나 싶겠지만 ‘생’이라는 기나긴 여행 제2막의 컨디션을 위한 몸풀기 같은 느낌으로 받아들이면 될 거 같아. 아아 역시 여행에 대하여 하고 싶은 말은 차고 넘쳐 우선 줄일게.
우리 선장 새해 복 많이 받자, 올 한 해도 잘 부탁해.
추천 음반 : Esperanza Spalding [Esperanza]
그녀 자기 자신, 여행에서 찾는 내 자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