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by 선장
주간 <시선> 이번 주제는 '여행'입니다.
기념사진과 웃음 강박
코로나로 막혀있던 하늘길이 이제서야 차차 열리고 있어. 당장 해외여행은 비행기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무리겠지만, 디지털 풍화에도 살아남은 여행사진들을 보고 있자면 어김없이 들떠. 무려 10년 전 나폴리에서 찍은 여행 사진이 아직 핸드폰에 남아있더라고. 나, 소윤, 그리고 일본인 친구 타카가 어색하게 포즈를 취한 사진.
가난한 대학생이던 나와 소윤은 유럽 배낭여행 동안 종종 구질구질하고, 또 자주 너덜너덜했어. 그럼에도 사진 속 표정은 어쩜 저렇게 맑기만 한지. 사실 저 정도까지 행복하진 않았을 텐데 말이야.
그러고 보면 여행 사진은 늘 웃으며 찍잖아. 여행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모든 '사진'의 속성이 다 그런 듯 싶지만, 나는 특히 여행지에서 '더' 행복한 척하는 것 같더라고. 평소 나올법한 자연스러운 미소에 조금의 노력을 덧붙인 티가 나. 어이없게도 타지 배경으로는 대부분 치아가 보이게끔 웃고 있더라. 어렴풋이 기억나는 가지각색의 갈등들은 애초에 있지도 않았던 양.
왜 그리 힘내서 웃었을까? 돌이켜보면 여행지에서 나는 쫓기듯 즐거움을 찾으려 했어. 한 번 가는 여행에도 많은 돈, 시간, 노력이 들어가잖아. 이를 조금이라도 낭비하기 싫으니 '행복 강박'이 있었나 봐. 추후 돌아봤을 때에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길 바랐어. 더불어 여행은 'ㅇ박 ㅇ일'이라는 시간에 묶여있잖아. 시간까지 한정적인지라 더욱 촉박한 마음에 과장된 미소가 나오는 거지. 그만큼, 그러니까 치아가 훤히 보이게 웃을 만큼 행복하지 않다면 마치 엄청난 손해인 것처럼 말이야. 그렇게 본전 이상 뽑았다는 증거를 곳곳마다 사진에 남겨뒀어.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는 사진을 훑어보며 그때의 행복을 주입시키는 작업이 또 들어가. 고르고 고른 최고의 순간들만 계속해서 기억에 덧씌우고, 진하게 남기는 거야. 짜증 가득한 에피소드는 물리적으로 남아있지 않으니 형태를 잃고 희미해져. 그러니 시간이 지날수록 여행지에서의 추억은 점점 미화될 수밖에.
조금 인위적이기까지 한 이런 노력이 내게 도움이 될 때가 있어. 특히 ‘지금’의 소중함을 도무지 찾을 수 없는 날. 내가 항상 ‘지금’처럼 불행한 사람은 아니었다고 위안받고 싶은 날. 그리고 매일 굳어진 일상을 깨부수고 타성에서 벗어나고 싶은 날. 괜스레 여행 사진을 넘겨보게 돼.
마음이 작아질 때면 이 시간 저 시간 속에 숨고 싶나 봐. 그곳에서는 늘 즐거움만 가득 차 보이거든. 지금과는 다소 괴리감이 느껴지는 사진 속 해사한 표정을 보고 또 보고. 내멋대로 정한 온갖 행선지를 따라가며 잃어가던 자기효능감을 충전하고. 짧게 포착된 그 순간들 사이에서나마 행복을 찾아내는 일.
무용한 걸 알면서도 이만한 도피처가 또 없어.
카프리 섬의 타카히로
10년 전 카프리 섬에서 유독 눈에 띄었던, 혼자 온 듯 한 남자 여행객이 있었어. 동선이 겹치는지 그날 이동하는 곳마다 그가 있더라. 나는 신기하면서도 뻘쭘해 눈이 마주치면 잽싸게 고개를 돌렸어. 하지만 일정이 끝날 무렵 나폴리에서까지 마주치자 더 이상 모른 척하기도 힘들더라. 그새 눈에 익었는지, 그래서 정이라도 들었는지 반갑더라고. 그가 먼저 어색한 듯 웃었고 나와 내 친구도 따라 웃었어.
그의 이름은 타카히로, 스쿠버다이빙 강사였어. 카프리에서 강습을 하기 위해 일본을 떠나온 지 4개월이 넘었다더라. 나와 친구는 빠듯한 배낭여행 스케줄 탓에 기차역으로 떠나야 했는데, 타카가 동행을 자처해 이야기를 더 나눌 수 있었어. 30분 남짓이었지만, 기차를 타기 직전까지 짧은 영어로 뭐라도 더 말하려 했던 모습이 생각나.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어눌한 영어 발음도.
우리는 헤어지기 전 페이스북 아이디를 교환했어. 여행지에서의 인연이 신기한만큼 퍽 아쉬웠나 봐. 기차가 사라질 때까지 타카는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어줬어. 나는 뭔지 모를 아쉬움과 설렘이 뒤섞인 채 다음 여행지로 향했고, 그렇게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그로부터 두 달 뒤 타카가 한국으로 왔어.
타카는 오래전부터 한국에 와보고 싶었다더라고. 당시 백수였던 나는 흔쾌히 여행 가이드가 되어줬지. 그러다 타카의 한국 여행이 거의 끝나갈 무렵, 인사동에서 친구 대여섯 명과 같이 ‘한국식’ 술자리를 가졌어. 막걸리를 시키고, 조잡한 술 게임을 하고.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고 허접하지만, 분위기는 좋았어. 다행히 친구 중 일본어 능력자가 있었거든. 덕분에 타카도 어색하지 않게 어울렸고 나도 안심했지.
그런데 이 친구가 취하니까 대뜸 큰 소리로 타카가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거야. 순간 당황했지만, 나는 장난으로 넘기려 옆에 앉아있던 타카에게 “스키? 스키?" 하며 까불었어. 타카 역시 헤실헤실 반쯤 취해 있었거든. 그런데 타카가 갑자기 술이라도 깼는지 진지한 표정을 짓더라. 그리고는 무방비 상태의 나에게 단호하게 "다이스키", 하는데 안 넘어갈 수가 없겠더라고...
타카와의 연애는 끝이 정해져 있는 짧은 여행 같았어. 그만큼 여독도 빨리 풀렸지. 그럼에도 한동안 타카가 인사동에서 삼천 원 주고 사줬던 반지를 매일 밤 끼고 잤던 기억이 나. 그 반지를 끼면 외롭거나 우울한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거든. 내가 그런 풋풋하고 간지러운 사랑을 받았던 사람이라는 게 상기되어 따뜻해졌나 봐. 여행 사진을 다시 꺼내보는 거랑 비슷한 맥락인 것 같기도 하다.
여행지에서 인연을 만나는 일은 드문 만큼 참 귀해. 10년 전, 나폴리에서 찍은 사진 속 내 웃음은 아무래도 타카의 영향이 컸을 거야. 그날 오전에 내 버킷리스트였던 카프리섬 '푸른 동굴'을 보지 못 해 기분이 영 별로였거든. 하지만 사진을 보면 그 큰 아쉬움보다 이곳저곳에서 생뚱맞게 타카와 마주쳤던 기억들만 선연하네.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2010>
타카와 내가 마주쳤던 나폴리 피자집에서 줄리아 로버츠가 기막힌 먹방을 선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