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과 남자들

[계절] by 선장

by 선인장

주간 <시선> 이번 주제는 '계절'입니다.




날씨가 한창 변덕이던 3월 나는 계속해서 봄을 기다리고 있었어. 따뜻해지는 줄 알고 이사할 때 겨울옷들을 옷장 깊숙이 욱여놨었거든. 다시 헤집어서 꺼낼 힘은 없으니 며칠간은 다소 소슬하더라도 견뎌내야 했지.


그러다 냄새를 맡았나 봐. 겨울에서 겨우 멀어져 따뜻해진 공기를 코로 느낀 아침에 누군가 문득 떠올랐어. 사실 매년 겪은 냄새였을 텐데 말이야. 단지 한 해 같은 시기를 함께 보냈다고 이 계절이 그 사람으로 특정 지어졌다는 건 특별한 일이다만, 조금 억울하기도 해.




[봄]

봄의 냄새가 나니 제주 게스트하우스에서 같이 스탭 일을 했던 직원이 떠올랐어. 그는 커피보다 차를 사랑하는 바리스타였는데, 이름이 정말 특이했어. 성이 ‘안’ 씨에 이름이 ‘뜨레봄.’ 안 뜰에 봄이라니! 감수성 풍부한 어머니가 손수 작명해주신 이름이라더라. 그도 못지않게 간지러운 성격으로, 겨울에 벚꽃 향이 나는 홍차를 타 주며


“봄을 미리 선물해 드릴게요.”


라는 거야. 나는 내가 오글거리는 걸 즐기는 편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 감수성에는 감히 따라갈 수가 없더라.



[여름]

하면 눅진한 소금 내가 나는 광안리 바닷가에서 만난 블로그 이웃.


첫 직장에 입사하기 한 달 전, 나는 지난한 인턴기간을 끝낸 기념으로 부산에서 혼자 한 달 살이를 했어. 당시 블로그에 ‘이웃 공개’로 적나라한 일기를 쓰곤 했는데, 나의 삐딱한 글에 공감해주던 단 한 명의 이웃이 하필 부산에 살고 있었지.


사실 만나기 직전까지 나는 내가 그 이웃을 친구로 생각하는 줄만 알았어. 하지만 예상과 다른 그의 모습을 직접 마주하고 나니 맥이 확 꺾이는 게, 아무래도 이성으로서의 기대가 컸나 봐.


광안리 해안가에 앉아 나눈 대화는 온라인 채팅과 내용이 별반 다르지 않은데도 지나치게 지루했어. 걸탐스레 무언가 주장하던 그는 급기야 내 볼에 침까지 튀겼는데 심지어 침도 아닌, 채 삼키지 못 한 눅눅한 과자 덩어리였지. 모른 척하기 쉽지 않은 크기에 정적이 흘렀어.


그렇게 무방비한 상태로 뜻밖에 현피를 당했던, 당황스러웠던 "여름이었다"...




[가을]

그리고 가을은 아무래도 사람보다는 서브웨이 샌드위치.


가을에는 유독 행복한 추억들이 많은데, 대학교 유학 시절 먹었던 칠면조 샌드위치가 특히 기억에 남네.


그날은 미국인들의 가장 큰 명절 중 하나인 추수감사절이었어. 유학생들은 삼삼오오 다른 주로 여행을 떠났고, 이민온 친구들은 칠면조 요리를 먹으러 근방에 사는 가족들을 만나러 갔지. 나는 그럼에도 딱히 쓸쓸하진 않았어. 당시 만나던 남자 친구가 기숙사에 남아 있었거든.


하지만 잠시의 안도감이 참 무색한게, 그의 어머니가 갑자기 학교에 방문하신 거야. 무려 한국에서 말이지. 결국 예기치 않게 나는 홀로 명절을 보내게 되었어. 유독 ‘땡스기빙 데이’에 의미를 부여하는 미국 문화 탓에 나는 쉬는 날들을 모조리 그의 어머니께 양보할 수밖에 없겠더라.


결국 기숙사에서 하루 종일 msn 메신저를 켠 채 한창 유행이던 게임 템플런이나 신나게 달렸지. 괜찮은 척 했지만 역시 쓸쓸한 건 어쩔 수 없더라. 그러다 해가 지기 전 그 친구가 갑작스레 찾아왔어. 나도 식사에 초대를 하려 그러나 나도 모르게 조금 기대를 했는데... 무심하게도 내 손에 서브웨이 샌드위치만 덜렁 쥐어주고 가버리데.


“혼자 둬서 미안해”


라나. 그렇게 추수 감사절답게 어머니가 요리한 맛있는 저녁식사를 먹으러 가는 그 아이의 뒷모습이 퍽 얄미웠던 기억이 나.


그래도 그 허접한 샌드위치, 안에 얇게 저민 칠면조가 들어있는 것을 보고는 피식 웃었었는데.



[겨울]

겨울의 칼칼하고 시린 냄새를 맡으면 그제야 한 해가 끝난 게 실감이 나. 그리고 절절한 짝사랑 상대였던 운동선수가 떠오르지. 겨울 스포츠 운동을 하던 친구였거든.


그에게는 대차게 까였어. 그리고 그 뒤에도 한참 동안 연락을 참아 놓고는, 건강검진일 날 인생 최대의 흑역사를 썼더랬지. 수면내시경을 막 마치고 수면실로 이동하던 중 구구절절 오타 가득한 카톡을 보낸 거야. 술이 아닌 프로포폴에 취해 이런 짓도 가능하더라고.




이 정도면 개코인가? 그런데 올여름은 이상하게 향보다 색감을 먼저 느꼈어.


오랜만에 일찌감치 집에서 나서는데 아침 풍경이 미묘하게 달라진 기분이 들더라. 하늘 속 햇빛과 빌딩 숲 전체가 카메라에 새 필터를 입힌 것처럼 이채로워 낯설었어.


관객들은 영화를 볼 때 단 3%만 예상했던 바와 다르길 바란다고 하잖아. 여태 다른 영화들을 보며 익숙해진, 그렇기에 비슷하길 기대하게끔 만드는 퍽 진부한 요소들이 97%나 되고, 고작 3%만이 예상을 빗나가야 한다는 게 의아하지 않아?


그런데 바뀐 계절 덕에 새로 끼워진 필터가 내 기분에 미치는 효과도 비슷했더라고. 딱 3% 정도. 그 정도만 바뀌었는데도 만족스러웠어. 새삼스럽지만 눈이 두 개여서, 더 넓은 화각 안에 오늘의 풍경을 꽉꽉 담을 수 있어서 감사했던 여름날이었달까.


이제는 그 여름날들도 며칠 안 남았네. 다가올 가을에는 다른 누군가가 떠오르려나 모르겠다.




추천 영화: <리틀 포레스트, 2018>

이게 진짜지. 사진 한 장 만으로도 "여름이었다."



keyword
이전 08화청담 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