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명품 포장 아르바이트
멋드러진 척을 해보자. 나는 물질보다 형이상학적인 것에 관심을 두며 속세로부터 자유롭고, 주변인들이 대부분 목매는 ‘벌고, 사고’에 대해서는 한발 비켜서서 팔짱 낀 채 “굳이?” 혹은 "그보다 난..." 하며 관조하는 쿨한 사람이다. 점심을 먹기 위해 만난, 나와 가치관과 라이프스타일이 다른 친구는 (진짜 속마음은 모르지만) 잠깐동안 이런 나를 대단하다 치켜세워주고, 또 (실은 안타까워해주는 말이지만) 어떻게 다수가 욕망하는 것을 따르지 않는지 신기해한다. 그리고 나는 그런 시선을 즐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겸손을 떨며 “생각 없는 알바생이지, 뭐.” 하곤 속 편한 한량 행세를 한다. 하지만 ‘남들과 다른 나’라는 특별함에 우쭐한 것도 잠시. 우리 앞에 놓인 그릇이 어느새 비었다. 이제 계산을 할 시간이다.
친구는 스타트업 대표로, 남자친구와 아기자기하게 꾸린 사업이 어느덧 직원 스무 명 이상의 규모로 커진 지도 벌써 몇 년이 흘렀다. 중학교 때부터 허구한 날 붙어 다니던 우리는 한때 서로가 씀씀이의 기준이었지만, 친구의 사업이 번창하며 소비 규모가 서서히 차이 나기 시작했다. 친구는 이제 나와 다른 단위에서 살고 있었다.
친구가 정한 식사 장소는 20대 때 함께 다니던 왁자지껄했던 곳들보다는 조금 더 단정했고, 친절했으며, 양이 적었다. 하지만 나를 배려해서인지 적당히 만만한 곳이었다. ‘그 소득에 그 엥겔지수면 평소 얼마나 팬시한 곳들만 다니는지 알고 있는데, 괜히 나 때문에 안 내키는 거 먹는 거 아냐? 평소 가던 데보다 지저분한 곳에 온 거 아냐?’ 맛있게 먹고 있는 친구 앞에서 괜스레 눈치와 자격지심이 동시에 일었다가 사라졌다. 실은 요즘도 일주일에 두세 번씩 가는, 친구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점일지도 모르는데.
식사를 마치고 계산대에 선 친구와 나는 각자 카드를 들고 무의미한 실랑이를 잠시동안 벌였다. 어떤 결말이 날지는 식사 전부터 예견돼 있었지만, 계산대 앞에서 우린 늘 조금의 쇼맨십을 발휘한다. 결국 점원이 든 건 내 카드였고, 친구가 금액의 반을 송금하는 뻔한 엔딩으로 끝이 났다. 형편이 비슷하거나 자주 만나는 친구와는 이런 번거롭고 무용한 액션이 생략되고 자동 더치페이로 직행하지만, "넌 곧 더 잘될 거니까 그때 사줘" 라며 언제나 카드를 들이미는, 이 부유하고 착한 친구에겐 늘 적어도 세 번씩은 우겨야 한다. 얻어먹는 기쁨도 최대 1-2년이지, 그 이상은 무난한 염치를 가진 사람이 할 짓이 못된다. 내 지갑을 위하다가, 그보다는 자존심을 위하다가, 결국 친구와의 관계를 위해 결국 무조건 더치페이다. 만남의 빈도는 줄여야 했지만.
식당에서 나오자 친구가 미리 잡아둔 택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주에 봐.” 내가 평소 포장해 왔을 법한 구두로 택시에 올라타며 친구가 말했다. 친구를 태운 택시가 떠나자 나는 매일 신던 운동화가 괜히 불편하게 느껴졌다. 함께한 저녁 내내 친구가 입고 있던 옷, 들고 있던 가방에는 큰 관심이 가지 않았지만, 피로가 뒤늦게 몰려오자 익숙한 듯 택시에 올라타던 친구의 모습이, 택시 뒷좌석의 안락함이, 빠르게 떠나던 택시의 뒷모습이 자꾸만 눈에 아른거렸다. 30대가 넘어서자 어느 새부터 친구들은 하나 둘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았다.
지하철에 앉으니 다음 주 생각에 착잡했다. ‘백수인 거 알면서, 말이라도 [빈 손으로 와도 된다]고 해 주지. 아님, 오늘 식사자리만 패스했어도 여유 있었을 텐데.’ 머릿속으로 다양한 쪼잔함을 변주해 가며 이번 달 남은 생활비를 계산해 봤다. 다음 주에는 오늘 만난 친구 아이의 돌잔치가 예정돼 있었다. 몇 해 전, 다른 친구의 돌잔치에 초대받았을 때 분명 이 친구에게 “돌잔치는 가족끼리 하는 게 맞지 않아?” 라며 같이 짜증 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난다면 다행인 걸까.
쪼잔하기가 죽기보다 싫은 게 문제다.
사실 퇴사한 지금도 어차피 약속 자체가 적어 생활비가 부족할 일은 거의 없다. 가뭄에 콩 나듯 나가는 모임에선 한 번씩 통 크게 어울리기도 한다. 쪼잔할 기회가 딱히 없는 것이다. 하지만 보다 어른스런 친구들이 삶의 다음 국면으로 넘어갈 때, 그리고 이를 공개적으로 축하하는 자리에서, 나는 때때로 한없이 유치한 쫌생이가 된다. ‘빈손으로 와도 된다고 말이라도 해주지’를 뻔뻔히 기대했던 것처럼.
지난달 신라호텔 결혼식에 초대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청첩장을 받자마자 익숙하게 식대부터 검색했다. 최소 16만 원 최대 30만 원이라는 금액에 당황했고, 초대해 준 대학 선배와 16-30만 원만큼 친하지 않아 더욱 곤란했다. 식에 가지 않고 축의만 따로 송금할까도 생각했지만, 바쁜데 굳이 날을 잡아 실물 청첩장을 건네준 성의를 생각하면 참석하는 게 도리였다. 2안으로 밥을 먹지 않고 인사만 건네고 간다면, 축의금을 대폭 줄여도 되지 않을까 단톡방에서 친구들과 논의했으나... 내 자리는 이미 지정석으로 마련되어 있었다.
형편에 맞지 않는, 욕심나지도 않는 호텔 코스요리라니. 심지어 나는 고기를 먹지 않아 억울하기까지 했다. 축의금에서 스테이크 값만 빼서 계산하면 안 되나? 그런데 내가 스테이크를 먹지 않았다는 걸 선배에게 어떻게 자연스럽게 알리지? 따로 카톡으로 연락이라도 해야 되나? 제가요, 축의는 많이 못했는데 스테이크를 안 먹은 걸 감안해 주세요, 이렇게? 궁상맞은 궁리를 하면서도 한편으론 이런 고민을 할 수 있어서, 선배와 16-30만 원만큼 친하지 않아서 안도했다. 빼도 박도 못 하는 지출이 아닌 빠져나갈 구석이 있는 게 다행이었다.
이렇듯 스스로에게 종종 현타가 온다. 한 달에 경조사가 두 개 이상 있으면 비상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나이에 맞는 소비가 있다. 결혼식에서도 개개인이 처한 사정을 고려하기보다는(그 사정을 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나이대에 따라 당연히 여겨지는, 기대하는 금액이 따로 또 존재한다. 친한 정도나 식대를 떠나 “그래도 우리 나이대에 ~원은 좀 그렇지 않아?” 하는 기류가 은근히 깔려 있는 것이다. 프리터족에게 불리한 기류다.
진심으로 축하해 줘야 마땅한 자리에 돈걱정에 전전긍긍하는 내 모습은 볼품없다. 제일 사랑하는 친구의 아기가 첫 생일파티를 열고 날 초대한다는데 스트레스부터 받다니. 한 때는 꿈이 '부자 이모'였는데, 조카가 한 둘이 아니라 열 명 가까이 되자 이도저도 못 하는 '거지 이모' 신세인 게 서글퍼진다. 간혹 선물을 줘야 할 때 백화점이 아닌 쿠팡에서 샀다는 걸 알리기 꺼려진다. 중요한 사람의 중요한 날, 인색한 모습을 보이는 건 내가 추구했던 그 '있어 보이는 미니멀리즘'이 아니었다.
아무렴 프리터족은 멋드러지고 특별한 척하는 데 한계가 있다. 20세기 후반, 물질주의와 과학에 냉소를 보이며 자연으로 떠난 히피들이 삶의 끝에선 결국 도심의 병원으로 돌아오듯, 결국엔 세속에 쩔쩔매는 날이 온다.
이처럼 종종 궁상맞고 난처한데도 여전히 취직하지 않고, 아르바이트로 연명하고, 손가락 빨며 버티고 있는 이유는… 현재의 만족도가 그 초라함과 불안정함을 거뜬히 이기기 때문일까? 적어도 아직까진 말이다.
어쩌면 구차함에 내성이 생겼을 수도 있다. 아니면 나는 쪼잔하기가 죽기보다 싫은 게 아니고, 나인 투 식스 하기가 죽기보다 싫은 건지도 모른다. 낮 시간을 내가 원하는 대로 보내는 것은 도무지 질리지가 않는 것이다.
대표2의 식사 제안이 잦아졌다. 와중에 다행인 게 있다면, 대표2는 회를 못 먹고, 나는 고기를 못 먹는다는 것이었다. 퇴사와 비슷한 시기, 여러 이유로 나는 <생선은 먹지만 고기는 먹지 못 하는 페스코테리언>이 되었다. 이 식생활의 변화는 사실 프리터족으로 지내는 데에도 꽤나 유리했다. 고기를 먹지 않으니 갈 수 있는 맛집의 폭이 급격히 줄었고 자연스레 음식에 대한 관심이 끊겼다.
삼겹살에 이어 양꼬치까지 거절당하니 대표2는 대체 음식을 찾으려는 듯 보였지만, 나는 얼른 쓰레기더미가 든 박스를 들고 도망치듯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박스를 양손에 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쓰레기 더미 위 종이 한 장이 눈에 띄었다. 중간에 끼워 넣어 감출 성의도 보이지 않고, 아니 적어도 뒤집어 놓을 생각도 하지 않고, 보란 듯 맨 위에 올려져 있던 A4용지 한 장. 종이에는 큰 글씨로 [동업 해지서]가 적혀 있었다.